심병길 횡성중앙의원

진정한 속죄는 용서를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그러나 어떤 용서는 속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상대방과 상관없이 이미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겐 용서 자체가 무의미 할지 모른다. 미움이 없는데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7)

그가 허물어진 모습으로 진료실에 들어설 때 알았다. 내 짐작이 맞았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며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병원에 다녀가신 지 사흘 만이라고 했다. 덕분에 삼우제까지 잘 마쳤다며 그는 몇 번이나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가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왔던 날이 생각났다.

노인은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보단 삶을 억지로 붙들고 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혈압이 낮고, 맥박이 좀 빠르고, 탈수가 만성으로 진행된 것 말고 활력징후에 큰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눈은 총기가 사라져 흐릿했고 무엇보다 마음에서 이미 삶을 놓아버린 것 같았다. 노인에게서 입맛이 떨어져 나간 지는 오래 되었고, 끼니 때 겨우 몇 숟갈 넘기던 것마저 이젠 다 토해버려 곡기를 끊은 지 닷새는 되었다고 했다. 입원을 시켜드렸지만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사코 집으로 가기를 고집했다. 주사도 약도 모두 거부했다. 병원에서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하는 수 없이 집으로 오긴 했지만 답답한 마음에 무작정 모시고 왔다며 아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주사도 약도 거부하는 노인께 내가 딱히 해 드릴 일은 없었다. 사정을 알면서도 나는 일단 입원실이 있는 대형 병원을 권했다. 입원은 고사하고 약도 주사도 거부하는데 달리 방도가 없겠냐며 아들은 거의 울먹였다.

이런 경우 고열량 고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중증 환자에게만 제한적으로 처방하는 수액제가 있었다. 주사제가 아닌 입으로 빨아 먹거나 비위관(鼻胃管)을 통해 주입하는 경장영양(經腸營養)수액제였다. 그러나 암 환자나 수술 후 회복기 환자, 또는 중증 만성질환자들을 위해 대학병원에서나 가끔 나오는 처방인지라 나 같은 시골 개업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련의 때나 써보았지 개업한 이후로는 아예 잊고 지내던 처방이었다. 20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어떤 수액제가 나왔는지 알지도 못했다. 일단 이곳 H읍에서 가까운 W시 대학병원의 지인에게 그곳에선 어떤 수액제를 처방하는지 알아보았다. ‘하모닐란액’이란 먹는 영양수액제가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읍내 약국에 그것이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당연히 구비해둔 약국은 없었다. 친분이 있는 읍내 약국의 약사에게 하모닐란을 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가 한 번 알아보겠다고 했다.

H읍은 아직도 닷새마다 오일장이 열렸다. 그날은 마침 장날이라 밖에 대기하는 환자가 많았다. 시간이 꽤 흘렀나보다. 접수하는 직원이 문을 빼곡 열고 안을 들여본다. 걱정 반 호기심 반의 얼굴이다. 대기실의 환자들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라고 눈치를 준 것 같다. 그 때 약국에서 연락이 왔다. 오후에 약이 도착하니 처방을 하면 된다고 했다. 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들이 노인을 부축해 일어섰다. 진료실을 나서다 말고 노인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노인의 눈에서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보았다. 떠나는 사람이 남아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눈. 내게 익숙한 그 눈빛을 뒤로하고 노인은 진료실을 나섰다. 그리고 사흘 후 돌아가셨다.

그에게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잠시 들을 수 있었다. H읍으로 오기 전까지 그는 수원에서 살았다. 결혼한 형님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몸이 약하셨던 어머님이 병환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H읍에 인연이 닿아 이곳으로 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다. 부친은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몸도 마음도 급격히 약해지셨다. 어머님 가까이에 있으면 건강을 회복하실까 싶어 이곳으로 터를 옮기게 되었다. 그동안 몇 차례 혼담이 오갔지만 이런저런 일-아마도 아버님을 모시는 일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어긋났고 그러다 보니 혼기를 놓쳐버렸다. 그렇게 그는 부친과 서로 의지하고 살면서 사십을 넘겼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니 어찌 그리 잘못한 일만 생각나는지 자기는 죄인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돌아가셨으니 이젠 용서를 빌 수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결혼도 포기하고 부모님을 지극정성 모셔온 그가 내 앞에서 죄인이라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했다. 명치 부위가 뻐근하게 아려왔다.

아버님은 내가 전문의 시험에 합격한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 평양이 고향이셨던 아버님은 6·25전쟁 때 가족들과 헤어져 홀로 남하하셨다. 삼십 후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하셨고 늦게 낳은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칠십 가까이 일을 하셨다. 은퇴 하실 즈음 고생하신 부모님을 위해 동남아로 여행을 보내드렸다. 그리고 여행 이틀 째 아버님께서 쓰려지셨다. 매제와 함께 필리핀 푸켓으로 갔을 때 아버님은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계셨다. 목 아래로 전신 마비가 와있었다. 의식은 맑았지만 기관 삽관상태라 말씀을 못하셨다. 필리핀 담당의사는 ‘길리안-바레 증후군(Guillain-Barre syndrome)’ 같다고 했다. 그러나 평소 당뇨가 있었고 마비가 진행되는 양상으로 보아 혈전에 인한 뇌경색증이 의심되었다. 초기에 신속히 항혈전제를 투입했어야 했다. ‘길리안-바레’로 생각하고 항혈전제를 투입하지 않았다면 이미 골든타임을 놓친 것이다. 그렇다면 아버님이 회복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 와중에도 아버님은 내 얼굴을 보시자 반가운지 얼굴에 웃음을 띠셨다. 마치 아버지를 만난 아들 같았다. 어머님은 그새 10년은 늙어보였다. 식사도 제대로 못하셔서 어머님마저 병이 날까 걱정되었다. 두 분을 어떻게든 빨리 모시고 와야 했다, 인천의 한 대학병원에 아버님의 상황을 알리고 병상을 예약해놓았다. 호흡기를 뗀 튜브에 한국에서 챙겨 간 앰부백을 연결하고 앰부배깅(ambubagging)을 하며 앰뷸런스로 푸켓 공항까지 이동했다. 아시아나 항공에서 좌석 둘을 나란히 내주어 아버님께서 누워 가실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김포공항에 미리 앰뷸런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아버님을 병원으로 바로 이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을 놓친 뇌세포는 회복 되지 않았다. 몇 개월이 지나 병원에서는 퇴원을 권했다. 소변 줄을 끼우고 기관절개를 한 상태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콧줄(비위관)을 끼워 주사기로 유동식을 넣어드렸다. 가래를 뽑아드리고, 대변을 받아내고, 소변줄을 갈고, 몸을 닦아드리고, 파우더를 발라드리고,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자세를 바꿔드렸다. 처음엔 힘들고 조심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쉽고 익숙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자 그 일들은 기계적인 의식(儀式)으로 바뀌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부친이 누워 계신 방은 퇴근 후 습관적으로 들르는 의례적인 곳이 되었다, 아버님과는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처음엔 아버님도 답답하신지 입술을 움직거려 의사를 표현하려 하셨지만 약해진 안면근육 때문에 금방 포기하셨다. 그냥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사를 드리러 가면 나를 보시고 입술을 움직여 뭐라 자꾸 말씀을 하셨다. 어디가 불편하시다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 물어보시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땐 ‘네’하며 그냥 웃어드리곤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서해안의 한 도시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늦은 가을 새벽 어머님의 전화를 받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뵈니 숨이 없으셨다고 했다. 유언도 없으셨고 임종하는 자식도 없었다. 힘들고 외롭게 사시다가 또한 그렇게 돌아가셨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운전하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붕(天崩)이라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진다고 했는데 머리 위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아침햇살은 눈부셨다. 엄청나게 슬플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차분했다. 나는 앞으로 치러야할 며칠을 생각했다. 연락할 지인들과 영안실과 발인을 생각했다. 그러다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 내게 화가 났다. 아버님이 계신 곳이 가까워지자 세상이 차츰 낯설게 느껴졌다.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할 무언가가 갑자기 사라져 버린 세상. 그 텅 비고 낯선 세상 속으로 들어서자 눈에 무언가가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처럼 슬프고, 두렵고, 낯설고, 화가 나는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켜 가슴 한켠에 내려앉았다. 세월이 지나며 나는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죄책감’이라 불렀다.

노인의 아들이 찾아온 날 집에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앉아 있었다. 나는 요즘 며칠 동안 늦도록 이곳에 앉아 아이가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다. 사춘기라서 그럴까? 며칠 전 내가 뭐라 좀 나무라서일까? 아이는 며칠 째 말도 없고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노인과 그의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선친이었다면 아마도 의사인 나보다 그가 아들이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자 답답하고 불안한 무언가가 가슴 한켠에서 뭉클거리며 일어났다.

그 때 아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이는 거실에 있는 나를 보았지만 그냥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 때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 물었고, 그러자 아이가 “네”하고 짧게 대답했다. 그랬다. 꾸짖는 대신 나는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밥은 먹었니?” 어두운 방안에 누워계신 아버님도 내게 그렇게 물으셨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만 벙긋거리며 물으셨다. “밥은 먹었니?” 아버님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아들을 기다리셨다. 의사랍시고 하루 잠시 얼굴 보기도 힘든 녀석. 그 녀석의 무심함을 꾸짖지 않으시고 그저 물어보셨다.

나는 어두운 거실에 앉아 굳게 닫힌 아이의 방문을 바라보았다. 나는 내게 물었다. 내 안에 저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가? 원망하는 마음이 있는가? 아니었다. 그저 안쓰럽고 애잔한 마음뿐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아버님은 이미 나를 용서하셨음을. 아니, 미리 용서하셨음을. 세상 어떤 아들과도 바꿀 생각이 없으셨음을.

나는 일어나 거실의 불을 켰다. 갑자기 환해진 세상에 눈부셔하며 나는 노인의 아들을 다시 만나면 꼭 이 말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아들이어서 부친은 참으로 행복하셨을 겁니다.”

아버님에 관한 글을 쓰며 두려웠다. 글에는 이미 내가 개입되어 있어 스스로도 속을 만큼 교묘하게 나를 미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소시효도 없는 ‘그 일’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생생해졌고, 날아가는 화살처럼 기회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어떻게든 두 여인에게 용서를 구해야했다. ‘한미수필문학상’은 선택된 모든 작품들에 소감의 장(場)을 마련해 주었고, 운 좋게 선택되어 이처럼 공개적으로 용서를 빌고 있으니 나는 글을 쓴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활어와 건설자재를 실은 트럭들이 달리는 4차선 도로가 내려다보이던 연안부두의 아파트. 그 한켠에 정물(靜物)처럼 누워계시던 아버님. 잠시도 떨어지려하지 않는 어린 손녀를 들쳐 업고 아픈 허리를 두드리며 간호를 하시던 어머님. ‘의사며느리’라는 천형을 짊어지고 병원과 집이라는 두 ‘감옥’을 오가며 생명의 진액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대던 한 여인. 주변은커녕 남편으로부터도 전혀 보호와 위로를 받지 못했던 그 가엾은 여인에게 용서를 구한다. 나는 얼마나 비열하고 무심했는가?

이순을 바라보며 이제야 조금씩 알아간다. 삶이 나를 견디어 왔음을. 아내와 아이들이 그러했고, 부모와 형제들이 그러했고, 친구와 동료들과, 선배와 후배들과, 직원들과 환자들과...그렇게 온 세상이 나를 견디어 왔음을. 그리고 지금도 견디고 있음을.

얼굴 화끈거리는 글을 읽어 주시고, 게다가 뽑아주기까지 하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기회의 장을 마련해준 ‘한미약품’과 ‘청년의사’께도 감사드린다. 끝으로 마음만은 언제나 늘푸른 청춘이신 횡성의 할머니 할아버님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늙어갈 수 있도록 아직껏 제 생명을 붙들고 계시는 그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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