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 을지대병원 소아청소년과

나는 말린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달아 놓으면 하루하루 수분이 빠지면서 빠르게 말라버리는 드라이플라워, 말린 꽃이 고운 색종이같이 예쁘다고 하지만 나는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싫다. 그래서 가끔씩 들어오는 꽃다발은 말리지 않고 화병에 꽂아 매일 물을 갈아주고 틈틈이 햇빛도 쬐어주면서 시들어짐을 늦추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면 뿌리 없이 꺾인 꽃인데도 한 달여 남짓을 버텨주는 기특한 꽃줄기들도 있다. 오늘도 화병의 물을 갈아주다가 아직도 생기 있게 싱그러운 꽃잎을 보면서 문득 ‘참 오래도 가네’ 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4주 넘게 인큐베이터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꼬맹이가 떠올랐다.

- 꼬맹이가 태어나다

우리 꼬맹이는 23+4주, 650g, 더 설명할 것도 없이 꼬맹이다. 태반이 박리되면서 초 응급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린 아기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을까? 세보질 않았으나 겨우 4주 동안인데도 지겨워질 만큼이었다. 상태가 심각한 아기의 심폐소생술을 이십여 분 이상 하다 보면 ‘얼마나 더 해야 할까? 그만해야 하는 이유를 보호자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지? 얼마나 더 버티려나…’ 같은 몹쓸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몸은 몹쓸 생각과는 다르게, 더 열심히 흉부압박을 하고 심장을 뛰게 하는 약의 용량을 올리고, 힘이 빠진 소생술 인력의 교체를 지시한다. 어린 생명을 놓쳐 본 적이 있는 의료진들은 잠시 잠깐 떠오르는 사특한 생각이 지배할 수 없는 본능으로, 아기가 포기할 때까지 절대로 아기의 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소생술을 받던 아기의 심장은 다시 혼자서 뛰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도 서너 번은 더 생사의 문턱을 널뛰기 하 듯 넘나들었던 꼬맹이였다. 기적적인 소생이었지만, 손가락 열 개가 다 접히는 만큼 많은 약들이 들어가면서 나는 살아있노라고 꼼지락거리는 아기가, 화병의 꽃을 보다 생각이 났다.

늘 충혈된 눈으로 얼굴이 붉게 그슬려 있는 아빠는 딱 봐도 쉽지 않은 삶이고 벌써 산후 붓기가 다 빠져버린 엄마는 젊디 젊다. 아기의 힘든 삶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부모들은 하루하루가 형벌일진데, 그 앞에서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란 치기 어린 호언장담을 할 수 없는 나도 벌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꼬맹이의 여리고 가는 숨 줄을 현대 의학의 힘으로 간신히 연명 시키면서 스스로 뿌리 내려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절망에 빠진 부모를 위해서 위로도 뭣도 아닌 허상한 말을 던지는 것 대신에, 그들의 아기로 얼마 만큼을 살아줄지 모르는 꼬맹이를 만질 수 있게 해드리기로 했다. 엄마는 정성껏 닦은 깨끗한 손으로 아기를 보듬으며 가끔씩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미소였다. 감염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어 걱정스럽기도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마와 아기의 교감이 아기의 생명 줄을 늘려주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꼬맹이는 벌써 4주째 버텨내고 있었다.

- 수술

꼬맹이는 이른둥이들이 거의 다 앓고 지나가는 동맥관 개존증을 약물투여만으로도 수월하게 넘기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약으로 닫혔던 동맥관이 다시 열렸고 심장은 무리를 받아 조금씩 커져오기 시작했다. 약을 다시 썼지만 처음처럼 막히지 않았고 점점 더 부하를 받은 심장은 폐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고 여느 때처럼 신생아중환자실에서 동맥관 결찰 수술을 준비했다. 수술을 할 아기가 있으면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시는 흉부외과 교수님은 당일 오후에 바로 수술을 해주시기로 하였고, 우리는 익숙하게 수술을 준비했다. 부모님들에게 수술을 설명하며 ‘나는 당신들의 아기를 정말 살리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책임질 수 없는 감성은 도움이 되지 않기에 말을 아꼈다.

수술이 시작되었다. 동맥관 결찰술은 필요 없는 혈관인 동맥관을 묶어버리는 그리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기를 전신 마취시키고 폐를 눌러대며 하는 수술이라 수술 중에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를 잘 관찰해야 한다. 수술이 시작된 지 십여 분이 지났을까, 동맥관을 결찰하기 위해 폐를 누르자 아기의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인공호흡기의 산소 투여를 최대로 올렸으나 호전되지 않았다. 수술을 위해 덮은 포 밑으로 들어가서 인공호흡기를 떼고 기관튜브로 직접 앰부를 짜서 산소를 넣어주기로 했다. 급속도로 떨어지는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에 수술하는 의료진들의 손놀림은 바빠졌고, 나는 수술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포에 덮인 아기의 기관튜브를 간신히 찾아내어 앰부를 짜기 시작했다. 담당 간호사가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의 변동을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실시간 외쳐댔고, 나는 무섭고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아기에게 산소를 넣어주기 위해 앰부를 짰다. 너무 세게 짜면 아기의 약한 폐가 찢어질 것이고, 기관튜브를 너무 당기면 삽입된 가는 관이 빠지면서 아기의 숨 길을 다시 잡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 것이다. 머릿속은 침착을 외쳐대지만 도무지 오르지 않는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에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그러나 그럴수록 손가락의 힘은 더 정교하고 적당한 압력을 유지해서 앰부를 눌러댔고 기관튜브를 잡은 반대편 손은 흔들림 없이 고정됐다. 이것 역시 이제는 본능이 되어버린, 생각과 상관없이 몸이 하는 일이었다. 길기도 긴 삼분 여가 지나 아기의 산소포화도와 심장박동수는 수술에 지장 없을 만큼 회복을 하였고 수술은 중단 없이 마칠 수가 있었다. 다시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고 수술 포 밖으로 나와 앰부를 내려 놓자 그제서야 긴장이 풀린 손이 정신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꼬맹이는 수술이 끝나고 서너 시간이 지난 후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 넘은 산은 도대체 몇 번째 산이었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산을 넘어야 하는지…인형보다 작은 아기는 눈, 코, 입이 오밀조밀 가지런하고 수려하다. 내 보기에 이렇게 예쁜데 부모가 보기엔 오죽할까. 끝이 없는 여정을 예측할 수 없기에 그냥 하루 하루 정성껏 물을 갈아주고 햇빛을 쬐어주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튼튼한 뿌리에 물을 주고 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기적을 기대해 본다.

-또 심폐소생술

수술 후 그 다음 날부터 꼬맹이는 힘들다고 온갖 사인을 다 보내기 시작했고 급기야 수술 나흘째 되는 날, 또 심폐소생술 상황이 벌어졌다. 토요일, 오전 내내 긴 회진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아이 점심을 챙겨 주려고 하는데, 꼬맹이가 심폐소생술 중이라고 전화가 왔다. 멀쩡히 회진을 끝낸 지 겨우 삼십여 분 지난 시간이었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아들은 얼른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고, 나는 정신없이 차를 몰고 달렸다. ‘병원까지 족히 십여 분은 걸리는데 버텨주려나? 숱한 생사의 기로를 넘기던 아기가 이제는 쉬고 싶어서 잡은 날이 오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애써 떨쳐버리며 병원에 도착한 나는 검은 나무토막처럼 변한 아기를 보자 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할까 봐 겁이 났다. 방금 전 기관튜브를 빼고 재삽관까지 했는데도 전혀 산소포화도가 오르지 않는다는, 꽤 일 잘하는 고년 차 레지던트의 절망 섞인 노티를 받았다. 부랴부랴 손을 닦고 장갑을 끼고 앰부를 짜기 시작했다. 앰부를 짜면 들어가는 공기로 가슴이 올라와줘야 하는데 아기의 가슴은 반응이 없었다. 방금 전에도 같은 상황이라 재삽관을 했을 테지만 그래도 다시 삽관을 해봐야만 했다. 분초를 다투는 상황이라 “인튜베이션(삽관) 준비해주세요” 소리침과 동시에 재삽관을 했다. 새 관을 넣기 위해서 빼낸 관은 피와 살점이 섞인 분비물로 꽉 막혀 있었고 재삽관 한 지 오 분도 안되었다며 레지던트 선생들과 간호사들은 기가 막혀 했다. 다시 넣은 관으로 앰부를 짜자 아기의 폐는 오르락내리락 반응을 했고, 피부는 차츰 발갛게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아기는 그렇게 또 한고비를 넘겼다.

친정 언니들과 간만의 여행을 다음주로 미뤘기 망정이지 내가 주말에 예정되었던 여행을 그냥 갔더라면 어쩔 뻔 했을까. 나는 다음주로 연기한 여행을 아예 취소해 버렸다.

- 먹기 시작하다

꼬맹이가 먹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기가 먹는다고 하면 양 볼이 옴푹옴푹 들어가면서 힘차게 엄마 젖이나 분유 병을 빨아대는 것을 상상하지만, 이른둥이를 키우는 우리들은 코에서 또는 입술에서 위로 연결된 긴 관을 통해 천천히 우유를 밀어 넣어주는 경관 수유를 먼저 떠올린다. 꼬맹이도 경관 수유를 시작했고 삼사일 먹다가 배가 불러오면서 먹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시작한 수유, 조심조심 먹였지만 어느 날은 산소포화도가 후욱 떨어져서 찍어 본 엑스레이에서 폐로 넘어간 우유 때문에 오른쪽 위 폐가 하얗게 접혀있었고, 또 어느 날은 먹은 양만큼 우유가 그대로 나와서 금식, 또 금식을 반복하기도 했다. 그런 우여곡절을 여러 번 겪으며 지금은 한번에 8cc씩 여덟 번을 먹으니 하루에 64cc를 먹는다. 이제 체중이 1kg을 조금 넘었으니, 하루 종일 필요한 칼로리의 반을 아기가 소화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기적이다. 이 기적들 속에서 나는 무덤덤하게 기뻐하지도 못하고 있다. 또 다른 내 환자인 25주에 태어난 삼일 된 아기가 심각한 뇌출혈로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아기의 부모들은 아무 치료도 하지 않겠다며 내 눈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면서 아기를 지켜봐야 하는 나는 다시 극도로 불안하고 예민해졌다. 아픈 아기의 부모들이 영문도 모르고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도 벌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꼬맹이의 기적은 그냥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렸고 뇌출혈이 생긴 아기는 또 다른 내 업보가 되었다. 하루하루가 고해성사인 이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수 있을까? 이제는 말똥거리며 나를 쳐다보는 우리 꼬맹이가 내 옷자락을 꼭 잡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언젠가는 아장아장 걸어서 선생님한테 갈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라면서….

- 좀 있으면 백일

꼬맹이는 그 많던 주사약도 다 끊었고, 입으로 잘 먹으니 정맥영양 수액도 다 끊었다. 아직은 코에 양압으로 공기를 밀어 넣어주며 숨쉬는 걸 도와주고 있지만 기관삽관을 뺀 지는 꽤 오래되어 이대로라면 좋아질 일만 남았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길지 모르지만 이 녀석이 버텨 온 첩첩 산중에 비하면 평탄한 평지길일 것이다. 아기는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시들어가는 화병의 꽃이 아니었다. 뿌리를 내리지 못할까 봐 걱정했던 나는 고맙고 또 고맙다.

백일 넘게 병원에서 지내는 아기들은 신생아중환자실 모두의 아기가 된다. 출근을 하면 눈도장 먼저 찍고 ‘이쁘다’ 한번 말해주고, 퇴근을 할 때도 눈도장 한번 찍고 또 ‘이쁘다’ 말해준다. 매일 생과사의 기로에서 사투를 벌이는 아기들 사이에서 진이 빠져버린 의료진들에게 그 사투를 이겨 낸 아기들은 힘이 되어준다. 우리는 이 조그마한 꼬맹이들에게 중독되어, 살벌한 신생아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에필로그

백일 이후로도 꼬맹이는 망막증 레이저 시술을 몇 번이나 받았고 폐동맥 고혈압으로 약을 복용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지켜주고 싶었던 눈과 머리는 큰 문제 없이 무사히 퇴원을 했다. 불사신, 꼬맹이 덕에 우리 신생아중환자실 의료진들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하나 더 생겼다. 이 이야기는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던 우리들의 인생에서 회자되면서, 부족한 우리들에게 일어난 가슴 벅찬 또 하나의 기적으로 기억될 것이다.

2017년 12월, 4명의 고위험 신생아가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갑작스럽게 돌연사를 해버린,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심에 신생아집중치료실의 의료진들이 있었고, 그들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되어버리는 것을 목격한 우리들은 그 누구도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없었습니다. 고의가 아니었음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시스템이 아닌 개개인의 잘못으로 단정짓고 제대로 된 재판의 과정에 앞서 ‘구속’이라는 죄의 대가를 먼저 치러버리게 하는 끔찍한 현실은 신생아를 돌보는 의료진들 모두에게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부담감에 일터를 떠나는 동료 의료진들을 보면서, 나의 버틸 힘은 얼만큼인지 하루하루 가늠해 보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 일이 있기 전부터도 업보를 짊어진 것 같은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 하나’란 고민은 신생아집중치료실에서 일하는 모든 의료진들이 매 순간 겪고 있는 딜레마였는데 말입니다.

어린 생명을 살리기 위해 모두가 고군분투하던 꼬맹이의 이야기를 글로 담아내면서 ‘언제라도 떠날 수 있다’는 마음을 키우고 있는 제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저의 양가감정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중환자를 보는 모든 의료진들이 공감하는 현실일 겁니다. 서너 명의 의료진이 돌봐야 할 환자를 한 두 명이 숨이 턱에 차게 돌보고 있는 현실은 외면한 채 몇몇 소수의 사건들을 일반화 시켜 의료진을 공공의 적으로 몰아붙이는 여론몰이에, 소심한 우리들은 그저 한숨 한 번 쉬고 또 일을 합니다.

그나마 일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속상하고 억울할 틈도 없다는 것이 다행인 걸까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을, 조금은 남보다 잘하는 일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갈등 없이 묵묵히 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고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서, 의료계에 씌워진 불신의 멍에를 벗어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봅니다.

마지막으로 불사신처럼 힘든 순간을 씩씩하게 이겨내 준 꼬맹이와 꼬맹이의 ‘기적의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한 명, 한 명이 모두 훌륭한 바람막이가 되어준, 나의 젊고 영민한 전공의, 간호사 동료들에게 수상의 기쁨을 돌리며 글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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