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창 부산 탑비뇨의학과의원

노인은 말이 없으셨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애를 쓰시는 것 같았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노인이 꼬깃꼬깃 접은 약포지를 내미셨다. 그 약포지에는 ‘부산 탑 클리닉’이라는 병원명과 내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6개월 전에 지리산 강청 마을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였다.

개원 1년 차. 의약분업이 시작되어 의료계가 어수선하던 2000년 가을이었다. 소아과를 개원하고 계시던 선배 의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장 원장, 11월 초 주말에 1박2일로 지리산 강청 마을로 의료봉사를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예. 좋아요.”

나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이제 막 개원하여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보내던 시절, 선배 의사의 권유는 내게 청량제처럼 다가왔다.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초행길에, 의료봉사까지! 드디어 나도 의료봉사라는 것을 한번 해보는구나.’ 개원 초 심신의 피로를 식히고 싶었던 나는 의료봉사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의료봉사에 참여하기로 했지만 나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막막했다. 소아과 선배님은 이미 여러 번 다녀오셨으므로 의사 세 명이 각각 준비해 갈 것을 정해주셨다. 두 분 선배님께서 의약품과 5% 포도당 수액을 준비하기로 했다. 나는 의약분업으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약포지와 약 포장기를 가져가기로 했다. 날짜가 다가올수록 가슴이 점점 더 설레었다.

의사가 되면 의대 졸업식에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다. 그 첫 문장에는 '인류봉사'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의사라면 한 번쯤은 의료봉사를 하고 싶어 한다. 의사가 하는 일 자체가 아픈 사람을 위한 봉사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생업으로 할 때와는 느낌이 좀 다르다. 평소 진료할 때보다 친절하고 세심하게 환자와 소통하려고 애쓴다. 의료봉사를 하는 동안에는 ‘나는 인술을 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어쩌면 의료봉사는 남보다 나를 위한 일인지도 모른다. 베푼 것보다 더 큰 자기만족이 있기 때문이다.

토요일 늦은 오후에 도착한 강청 마을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이었다. 때마침 계곡을 따라 단풍이 절정을 이루고 있어서 가을의 운치를 더했다. 강청 마을은 지리산 권역인 창암산 자락에 위치한다. 지리산에서 가장 길고 아름답다는 백무동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이 맑아 이름도 강청(江淸)이다. 주위 환경에 동화되어서인지 마을 주민들의 심성도 맑고 순박했다. 도시화 현상이 이곳이라고 비껴갈 수가 없었던지 젊은이는 모두 도시로 떠나고 마을에는 노인들만 모여 살았다.

일요일 아침에 마을 농협 건물에서 진료가 시작되었다. 의사 세 명 앞에는 각각 내과, 정형외과, 비뇨기과라는 종이 표지가 붙었다.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은 거의 다 노인이었다. 사실 진료라고 할 것도 없었다. 노인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고 증상에 맞게 소염진통제, 소화제, 진해거담제 등을 처방해주는 정도였다. 비뇨기과 전문의인 나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조금 지켜보다가 수액 정맥주사를 맡아서 했다.

나는 먼저 5% 포도당 수액에 비콤헥사(Beecomhexa) 주사액을 섞었다. 수액은 알맞은 노란색을 띠면서 값비싼 영양제 같은 느낌을 주었다. 마치 잘 익은 참외 같았다. 수액걸이가 없어서 양쪽 기둥에 못을 박고 철사로 빨랫줄처럼 연결했다. 바닥에는 돗자리를 여러 장 깔았다. 한 분, 두 분 링거주사를 맞는 것을 본 노인들은 너도 나도 맞겠다고 몰려들었다.

“자, 어르신들 일단 자리에 누우세요.”

나는 자칫 실수하여 약해진 노인들의 혈관을 터트릴까 봐 평소 진료할 때보다 더 많은 신경을 썼다. 링거주사를 기다리는 이들의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의 깊이만큼 이마, 눈가, 입가에 주름이 잡혀있었다. 바늘에 찔리기 전에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있다가 노란 수액이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주름이 쭉 펴지면서 흐뭇해하셨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마음도 어릴 적 순수함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살아가면서 짊어진 삶의 무게는 서로 주고받는 정(情) 때문에 가벼워지곤 한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떠나고, 외롭게 살아가는 이곳 노인들은 정에 굶주려 있었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링거주사를 병원 치료의 상징처럼 여긴다. 일부는 누워서, 일부는 앉아서 서로 정담을 나누며 링거주사를 맞던 노인들은 하나같이 편안해 보였다. 의사들은 질병의 치료에만 관심을 두고 환자의 마음속 상처를 보듬지 못할 때가 많다. 가벼운 말 한마디, 미소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오전 진료 후 나는 마을 주민이 차려 준 점심을 먹고 홀로 백무동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링거주사를 놓아 준 나를 알아보신 것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났다는 표정이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왜소한 체구의 할아버지는 등이 굽어서 더 작아 보였다.

“주사 고마웠소. 의사 양반. 요즈음 온몸에 안 아픈 곳이 없었는데, 주사를 맞고 나니 다 낫은 기분이오. 젊은 선생을 보니 아들이 생각나는 구려….”

할아버지는 말끝을 흐리셨다. 무슨 애틋한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초면에 꼬치꼬치 물어볼 수도 없어서 나는 간단히 대답했다.

“효과가 있었다니 다행이네요.”

해가 바뀌고 햇살이 눈부신 오월의 진료실. 말 못하는 할아버지의 정체를 알게 된 나는 어떻게든 의사소통을 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강청 마을에서 오신 할아버지가 맞죠?”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말을 알아듣는 것으로 봐서는 뇌졸중의 후유증으로 운동실어증(motor aphasia)이 온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말하기만 어려울 뿐 다른 장애는 없어 보였다. 내가 볼펜을 들어 보였더니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미셨다. 나는 급히 볼펜과 메모지를 할아버지께 드렸다. 할아버지는 볼펜을 꽉 잡으시더니 한참이 걸려서야 메모지에 두 글자를 쓰셨다.

‘주사’

“링거주사를 놓아달라는 이야기인가요?”

이번에는 간절한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하셨다 .

할아버지는 지리산 두메산골에서 부산까지 먼 길을 약포지에 적힌 주소를 보고 홀로 찾아오셨다. 언젠가는 찾아가리라 생각하고 약포지를 소중히 간직하셨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링거주사를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고 계셨다. 나는 차마 할아버지 병에는 링거주사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의 원대로 마음이나 편하게 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직원에게 수액을 준비시키고 내가 직접 놓아 드렸다. 노란 수액을 보자 할아버지의 근심스러운 표정은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로 바뀌었다. 주삿바늘을 찌르면서 나는 기원했다. ‘세상에는 기적이라는 것도 있잖아. 누가 알겠어? 할아버지와 나의 바람이 합쳐져 놀랄만한 일이 일어날지….’

그 후 나는 한동안 할아버지를 잊고 지냈다. 11월이 되자 다시 강청 마을로 의료봉사를 떠났다.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했다. 진료시간 내내 기다렸지만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으셨다. 혹시 할아버지에게 무슨 변고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전부터 알고 지내던 마을 주민에게 할아버지의 안부를 물었더니, “두 달 전쯤 돌아가신 것을 집에서 발견했어요. 피붙이 하나 없는 불쌍한 노인이었는데, 마을회관에 한참 동안 안 나타나셔서 댁에 가보니 이미 주검이 되어 있었지요. 몇몇 주민들이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한 후 계곡물에 뿌려드렸어요.”

“평소 그 할아버지는 말이 없으셨어요. 주민들과도 교류가 별로 없으셔서 잘 알지는 못해요. 제가 알기로는 6.25 난리 중에 가족을 모두 잃었다지요. 아마. 먹고살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다가 한 여자를 만나 아들 하나를 얻었는데, 부인은 가출을 해버리고 하나밖에 없던 아들도 사고로 잃었답디다. 우리 마을에는 십여 년 전에 돌아오셔서 혼자 살아가셨지요.”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의 눈만 바라보았다. 얼마간의 침묵이 흐른 뒤, “아 참, 할아버지 머리맡에 이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선생님이 주인인 것 같아서 오늘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외투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와 약포지를 꺼냈다. 겉면에 ‘탑’이라고 쓰인 봉투 안에는 편지가 들어있었지만 나는 바로 꺼내 읽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말을 잃어버린 할아버지, 정작 그분이 잃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나간 삶의 아픈 기억일까, 아니면 외롭고 쓸쓸한 현재의 고단함일까. 갑자기 닥친 몸의 변화에 할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측하고, 먼저 보낸 아들을 생각하며 나를 찾아오셨을 것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내가 해드린 것은 무엇인가. 고작 링거주사 한 병을 놓아드리지 않았던가. 보다 전문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드려야 했는데…. 아니다. 할아버지가 나를 찾은 이유는 링거주사가 전부였는지도 모른다. 주사를 맞는 동안 할아버지는 더 할 수 없이 행복해 보였으니까. 집으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어느 날 아들에게 유언을 하는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편지를 쓰셨다. 그리고 이것이 할아버지가 생애에 남긴 마지막 편지였으리라.

어느새 해가 저물고 서쪽 하늘에는 늦가을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 노을 너머 어디에선가 할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았다. 당장 링거주사를 들고 할아버지께 달려가고 싶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꺼내 들었다. 단 두 마디 뿐인 편지를 보면서 나는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맙소 주사’

저 멀리서 할아버지의 무언(無言)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들려오고 있었다.

2018년은 한미수필문학상 수상소감을 쓰면서 마무리하게 되는군요. 문청(文靑)과는 거리가 먼 학창시절을 보낸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입니다. 글을 쓰다 보면 산만하게 널려져 있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더군요. 50대가 되면서 제 자신도 하나, 둘 건강에 문제가 생기니 지나간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글로 남겨 두고 싶어졌습니다.

글에 소개된 할아버지는 해마다 11월이면 생각이 나던 분입니다. 언젠가는 그 분에 대한 추억을 글로 써보리라고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 보다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이 더 애절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역시 세월은 사람을 성숙시키나 봅니다.

‘한미수필문학상’의 존재는 올여름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문득 제 글에 대한 전문가의 평가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10월부터 심해진 경추 디스크 통증으로 하루하루 진료도 겨우 소화할 정도여서 글을 쓸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응모를 포기하려다가 미련이 남아서 악전고투 끝에 이 글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첫 도전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의 영광을 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2018년은 다른 문학상에서도 수상을 하게 되어 저에게는 뜻 깊은 한 해였습니다. 이제 글을 써도 된다는 전문가들의 허락(?)을 받은 것으로 알고,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생각이나 감정들을 계속 기록해 나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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