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우 강동경희대병원 외과

엄마, 아빠는 얼굴이 하얬지만 6개월 된 한울이(가명)는 얼굴이 노랬다. 혈중 빌리루빈(담즙 배출과 간 기능을 반영) 수치가 올라 황달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얼굴 색만 달랐지 엄마, 아빠를 닮아 한울이도 생김생김이 참 귀여웠다. 이한울. 연예인과 비슷한 이름이지만 어떤 연예인보다도 귀여운 얼굴. 요모조모 뜯어보면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앙다문 입, 뚜렷하게 잘 자리잡은 코와 귀. 외모가 사랑받을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양심적, 당위적 선언은 빼어난 외모 앞에서 설 자리를 잃으니, 사랑스러운 어린아이 앞에서 여전히 나는 인생 수련이 모자람을 반성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외과 전공의 4년차 시절, 그 전 달까지 간담췌 파트(간, 담도, 담낭, 췌장 등)를 돌고 이식 파트로 넘어온 나는 흥미로운 인연을 마주했다. 간담췌 파트 끝 무렵 한울이 아빠를 내 환자로 봤고, 이식 파트로 가서는 곧바로 한울이를 내 환자로 본 것이다. 한울이는 담도 폐쇄로 카사이 수술(간-소장문합술)을 받을지, 간 이식을 받을지 과 내 소아와 이식 파트 간의 많은 토론 끝에 이식을 받기로 결정되었고, 간의 제공자는 바로 아빠였으니. 보통 간을 주는 환자는 간담췌 파트에서 수술 및 수술 후 관리를 맡고, 간을 받는 환자는 이식 파트에서 담당하니 나는 연달아 부자를 모두 환자로 맡게 된 것이다. 말이 부자지 어린 아이들을 두 명, 아니 엄마까지 합치면 세 명을 보게 되어 버렸다. 아빠가 스물한 살, 엄마는 열아홉 살이었고, 행동거지를 보면 이 앳된 부모보다도 한울이가 가장 어른스러웠으니 말이다. 나는 외과 안에서도 이식과 소아를 전공하는 사람들을 존경해마지 않지만, 두 파트 모두 절대로 전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그 결정은 여전히 유효해서 지금의 분야를 전공하기까지 이르고 있다. 그러니 이식과 소아를 함께 보게 된 것은 적잖은 스트레스였다.

군대도 아직 안 간 아빠는 무슨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를 하고, 엄마는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판다고 했다. 두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를 해줬는데 기억이 잘 안 난다. 나이트를럽에서였던가? 둘 다 부모님이 안 계신다고 했지만 돌아가신 건지 헤어진 건지 물어보진 못했다. 나뿐 아니라 당시 이식 파트를 돌던 후배 전공의, 스탭, 병동 간호사들까지 모두가 그들을 대견하게 여겼다. 쉽게 성을 즐기고 사고 파는 기이한 시대는, 쾌락의 뒤에 따라오는 새 생명의 엄중한 무게에 대해서는 사전에 상세히 설명하지 않기에, 어린 나이에 임신이라는 거대한 일을 만났지만 유산하지 않고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기특했다. 물론 먹고사니즘이 대중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던 당시, 그들의 어려운 생계는 분명 철저한 산전 검사를 방해했을 것이다. 저소득이지만 나름대로 맞벌이여서 무척이나 바쁜 삶에 배가 불러오니 그냥 아이가 들어섰고 때 되면 나오나 보다 했을 수도 있다.

물론 장밋빛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야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온 시점에서 그들이 기특하게 느껴졌을 뿐이지 어쩌면 유산 시도를 여러 번 했다가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엄청난 전쟁이 부부 사이에 계속해서 있었을 수도 있다. 둘이서 죽어라 일하는데 벌이는 시원찮으니 임신 사실을 알고 술과 담배로 많은 나날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막상 아이가 태어났는데 황달이 지속되는 것을 잘 몰랐다가, 이렇게나 큰 병인 걸 알고 그 전쟁은 극단으로 치달았을 수도 있다. 수술비는 어떻게 마련할 것이며, 앞으로 아이가 먹게 될 면역억제제도 결코 저렴하지 않은데.

“왜 그 때 안 지웠어? 왜? 왜?”

행여 이런 무서운 말이 한울이가 듣고 있는 가운데 아빠, 혹은 엄마의 입에서 이미 나왔을 수도 있다. 입에서 안 나왔더라도 끊임없이 마음 속에서 맴돌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접한 것은 그들이 병원에 와서 간 이식을 하기로 결정하고 시행했던, 약 한 달 간의 시간이었을 뿐이지 그들의 삶 전체는 아니었으니 나는 알지 못한다. 아, 정말이지 인생들의 양태는 너무나도 다양해서 다른 누군가가 이러쿵저러쿵 평론하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그들이 걸어왔을 삶의 궤적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단지 그 어린 부부가 아이들을 낳았다는 “사실”,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여 아빠가 간을 떼어주기로 한 “사실”만을 보고 감히 “대견하다”고, “잘 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단지 칭찬하고 격려할지언정, 바라보고 응원해줄지언정, “너희들은 아주 바람직하게 잘 살고 있어”라며 채점하고 결론지을 수 없을 게다. 삶은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선택지를 마주하는 과정이지, 정답이 정해져 있는 시험의 연속이 아니니까. 만약 한두 개의 선택을 잘못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져버릴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회는, 어느 추운 겨울날 전국의 만 17세들을 모아놓고 치르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방향이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현실적인 협박이 통하는 곳이니까.

어려운 경제적 사정은 병원 내 사회사업팀이 애써서 도움의 손길을 얻고, 모 방송사도 (휴먼 다큐멘터리 류의 프로그램을 촬영하는 조건으로) 금전적 지원을 약속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한울이는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었다. 간을 준 아빠는 2주도 안 되어 퇴원한 반면 간 이식을 받은 환자는 퇴원할 때까지 1인실에 격리되는데, 소아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부모 중 한 사람이 함께 생활한다. 아빠는 간 절제 후 회복이 필요하니 엄마가 그 역할을 맡기로 한 모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한울이는 모든 지표가 안정되어감과 동시에 태도까지 의젓해져 가고 있었는데, 정작 열 아홉의 엄마는 참으로 어리고, 입도 거칠며, 철딱서니가 없었다. 화장실이 갖춰진 격리실에 꼭 있으라는 말을 제대로 지킨 적이 없고, 끊임없이 아이를 안거나 병원 로비에서 빌린 유모차에 태워서 밀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아침 회진 때는 자리에 앉아 찰나의 순간을 스쳐 지나가는 의료진의 꼬질꼬질한 가운을, 마치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면 나을 것이라 믿었던 성경의 어느 여인 같은 경건한 마음으로 바라보지만, 이 엄마만큼은 아침 회진 때 우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이닥쳐도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밤새 틀어 놓은 듯한 영화 채널에 고정된 텔레비전은 계속 옅은 빛을 발하고 있고, 한울이는 벌써 일어나 쿨쿨 자고 있는 엄마 옆에서 곤지곤지를 하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애처롭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여 모두들 한울이의 귀여운 볼살만 한 번씩 조물락거리고 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다 한울이에게 작은 위기가 왔는데, VRE(반코마이신 내성 장내구균)가 검출된 것이다. VRE는 대표적인 병원 내 감염균주 중 하나로, 정상인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많지만 면역억제 환자들에게는 나쁜 증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에 대한 위험성을 설명하고, 음전될 때까지 철저히 위생 관리와 격리실 칩거를 명령했건만 이 철부지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다녔다. 간호사들이 밀집된 스테이션을 피해 비상계단으로 위아래층을 넘나들었다. 결국 한 주 정도 지났을까. 한울이 병실의 왼쪽 두 방과 오른쪽 두 방, 총 4개의 방에서도 모두 VRE가 검출되는 대형 사고가 터졌다(물론 그 일이 그 엄마의 잘못인지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다). 두 손 두 발 다 든 스탭들은 한울이의 컨디션이 괜찮으니 신속히 퇴원시키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았고, 퇴원 목표 날짜를 일러주고 조금씩 준비를 시켰다. 그러자 한울이 병실 안에 하나 둘씩 장난감, 퍼즐, 딸랑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는 사람마다 우리 아기 선물 사달라고 졸라댄 것이었고, 나 역시도 시달리기 싫어서, 그리고 한울이의 귀여움과 애틋함을 이유로 퍼즐을 하나 사다 줬다. 그리고 며칠 후 부모가 아이 같고 아이가 부모 같았던 이 가족은 퇴원했다.

다시 이들을 만난 건 여러 달 후였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긴 했는데. 4년차 말, 우연히 이식 외래 앞을 지나다 유모차에 앉아 있는 한울이를 봤다. 황달도 다 낫고 귀여운 얼굴이 더욱 귀여워져 콕 깨물어주고 싶었다. 옆에는 엄마와 어떤 아주머니가 있었다. 엄마는 역시 돈을 벌러 일을 나가야 해서 한울이를 시설에 맡겼다고 했다. 가슴이 찌릿했지만 딱히 다른 방도도, 내가 도울 능력도 없을 때는 아무리 잘 꾸며진 위로의 말도 입 밖으로 내보내기 조심스럽다. 그러다 어렵게 어렵게 꺼낸 말.

“…그런데 아기 아빠는? 낮인데 일하러 갔어요?”

그러자 여전히 발랄하고 입이 걸걸한 19살짜리 엄마가 꽤나 충격적인 내용을 별 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선생님! 그 새끼 말도 꺼내지 마세요. 간 잘라주고 군대 면제 받고 나서는 토끼었어요!”

오, 괜히 물어봤다. 이 대답을 듣고 이렇게 더 마음이 무거워질 줄 알았더라면. 나는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미스터리다. 그 순한 인상의 아기 아빠, 미스터리(Mr. Lee)는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또 하나의 Mr. Lee에게 간을 주고 정말 사라진 걸까? 별주부전의 토끼는 간을 육지에 놓고 왔다고 자라를 속이고 그냥 '토끼었'지만 그래도 이 아빠는 간이라도 주고 '토끼었'으니 좀 나은 편인가? 이 어린 부부는 왜 헤어졌을까? 단지 군대 안 가려고 간까지 내어 준 건 아니었을 게다. 아빠가 그 정도로 영악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간을 내어주고 나서야 군대를 안 가도 된다는 사실을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런 사실을 욕설과 비속어를 섞어 해맑게 말하는 엄마는 어떤 심정일까?

가끔 궁금하다. 이 가족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한울이는 면역억제제 잘 먹고 살아가고 있을까? 약값은 어떻게 충당하고 있을까? 10년이 지났는데 거부 반응은 없을까? 과거의 나는 의사로서 그들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대신 많은 기쁨을 받았지만, 현재의 나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에, 그래서 자주 궁금할 염치는 없기에 그들의 현재 진행형일 이야기는 - 상상 가능한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길 간절히 바라지만 -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저보다 인생을 덜 살았음에도 훨씬 더 힘겨운 과정을 거쳐 살아오던 어린 부부와 그들의 예쁜 아이를 만났을 때 처음에는 참 기특했고, 행동거지를 보면서는 철딱서니 없다는 딱지를 붙여봤고, 무사히 퇴원할 때는 잘 살아가기를 기원했고, 그리고 외래에서 엄마를 만났을 때는 반가움과 허탈함이 교차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의 구분이 무언지, 잘한 일 나쁜 일이 무언지 누가 과연 판단할 수 있는 건지, 판단하고 있는 내가 판단의 자격은 있는지 혼란스러웠던 기억을 글로 끄적거려 보았습니다.

모든 일은 각자의 입장에서 들어보아야 당연한 것이기에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사족을 달자면, 아빠가 토꼈다는 말은 순전히 엄마의 입에서 발화된 표현이지 (게다가 비속어인 줄 알았지만 경상도 사투리라더군요) 입원 당시 제가 맡았던 환자로서 아빠는 오직 군 면제를 위해서 간을 떼어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으로 간을 주었고, 오히려 몰랐던 혜택으로 군 면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을까요? 아, 이 역시 어떻게든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짓고 싶은 제 의도가 다분한 것 같습니다.

수상자 발표를 보고 여러 지인들이 미스터리 장르인지, 토끼가 나오는 이야기인지 궁금해 했는데 둘 다 아니니까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해왔는데, 이렇게 공개되고 난 후 반응들이 궁금하네요.

올해, 4년 연속으로 장려상을 꾸준히 주시는 청년의사와 한미약품, 그리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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