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편한내과 김지선

1.

“검사를 받지 않았으면…,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냥 편하게 한 2년 정도 살다가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그 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엄마에게 뭐 별다른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엄마는 뭐라도 좀 드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날 시킨 그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버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엄마랑 커피를 마시러 나갔던 그 날은 따사로운 날씨가 절정을 이루던 5월말 어느 저녁이었다. 몇 달 전 나는 엄마가 계속 속이 쓰리다 배가 아프다 이런 증상을 호소하셔서 건강검진을 시켜드렸고, 당시 일반 검진항목에 추가할 검사를 고민하던 중 엄마 연세에 그냥 의도적으로 검진을 하지 않는 한 잘 검사받지 않을 것 같은 부위가 어딜까 생각하다 흉부 CT 검사를 추가 시켜드렸던 터였다. 이상이 나올 것 같았던 위내시경이나 대장내시경 검사에서는 특이소견이 없었지만 그냥 한번 점검하자고 추가 한 그 검사에서 이상소견이 나오게 된 것이다.

직장으로 배달되어 온 검진결과지.

위, 대장 내시경 결과는 검사 당일 들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머지 부분은 별거 없을 거라 생각하고 휙 넘겼는데…. 나는 그 검진 결과지를 앞뒤로 몇 번이나 다시 봐야 했다. ‘폐암 의증’. 다른 사람 것이 잘못 온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주민번호와 이름과 주소를 여러 번 확인했다. 얼마 전에 찍었던 흉부 X선에서는 별거 없었었는데….

집 근처 병원에서 간단한 검사 결과에 조금만 이상이 나와도 불안해하시고, 괜찮은 소견이다 말씀드려도 전화할 때마다 걱정하시고, 이제 안심하시겠지 생각하고 있으면 며칠 뒤 또 같은 그 문제로 걱정하고 계시다고 다른 형제들에게 전해 듣게 되는 이런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나는 평소 걱정이 많은 엄마에게 바로 이 결과를 알려줄 수는 없었다. 일단 검사를 순조롭게 진행하려면 돌려 말해야 했다. 그냥 별거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뭐가 있어 보인다 하니 확실하게 한 번 검사나 해보자고, 그냥 무심히 지나가는 말투로 그렇게 말씀드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양성종양일 것 같았던, 그럴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던 폐의 이상소견은 정밀검사를 하면 할수록 악성으로 확진되어갔다. 엄마는 담배 연기도 싫어하셨던 분이셨고, 돌아가신 아빠도 담배는 한가치도 태우지 않으시던 분이셨는데 폐암이라니…. 설상가상으로 폐암이라 해도 기껏 해봐야 1기 정도일 것 같았던 소견은 마지막 검사를 마치고 난 뒤에는 3A기로 판정이 되어 있었다. 담당교수님은 힘들겠지만 수술을 한번 해보시겠다고 했고, 그 뒤에 항암, 방사선치료도 같이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처음부터 폐암 3기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예 수술을 안 받으실 걸 알기에 나는 그냥 양성종양이다, 수술만 하면 끝이다 이렇게 안심시켜드리고 수술을 일단 진행시켰다. 살면서 자의든 타의든 비밀이라는 건 얼마나 지키기 힘든 것인지…. 수술 전날 엄마는 무심히 수술동의서를 받으러 온 병원 치료진 누군가에게 <폐암 수술 동의서>를 받으러 왔다고 듣게 되었고, 그 말에 충격 받은 엄마는 “제가 폐암이여요?” 하고 여러 번 동의서를 들고 있는 분에게 물었다고 했다. 그제서야 내가 당신을 속였다고 생각한 엄마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엄마를 위한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 많이 나셨던 것 같다. 화나지만, 화가 나지만…, 그냥 참겠다고, 그냥 모르는 척하고 수술 받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나는 다른 형제들에게 전해 듣게 되었다.

수술은 진행되었다.

나는 가족 중 유일하게 내가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누군가 아플 때마다 검사, 치료 등 모든 일련의 결정들이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좌지우지 되는 게 너무나 부담스러웠고 이번에는 특히 더 그랬다. 수술 전 동의서도 그렇지만, 그 외 CT, 위내시경 등 이런 검사 전 동의서를 작성할 때마다, 검사 결과들이 하나하나씩 나올 때마다 근무를 하고 있는 시간에도 번갈아 가며 엄마의 옆을 지키고 있는 형제들에게서 수시로 전화가 왔다. 이런 글귀가 있는데 사인해도 되냐, 나중에 네가 와서 봐야하는 거 아니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데 정말 괜찮은거냐…. 그럴 때마다 안심시켜야 했다. 형제들도 안심시켜야 했고, 엄마도 안심시켜야 했다. 그들의 불안을 이해했지만, 때때로 어느 순간에는 그 짐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수술이 끝나자마자 엄마는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수술은 잘 됐을지, 또 중간에 다른 문제는 없었을지, 막상 수술장 들어가 보니 병기가 더 나쁘게 판정된 건 아닌지 불안해하고 있는데, 얼마 후 수술장에서 교수님을 도와 수술을 보조했던 chief가 나와서 격양된 어조로 “xxx씨 보호자분!” 하고 불렀다. 나와 가족들은 하루 종일 결과를 기다리느라 초조하고 불안했는데 그 chief는 간단한 양성종양 하나 떼어내고 나온 듯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설명하기를 “보호자분, 수술은 잘 됐지만 갑자기 나빠질 수도 있고 수술 잘 되도 길어야 6개월 정도밖에 못 사시는 거 알고 계시죠?” 이렇게 말했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이것이 지금 흉부외과 4년차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맞는 걸까? 그 활기찬 얼굴에 조금이라도 안타까운 표정이 있었더라면, 아니 그것도 욕심이라면 조금은 위로하는 듯한 태도로 설명해줘도 좋았을텐데…. 사려 깊지 못한 태도로 비수를 던지며 이런 식으로 밖에 말하지 못하는 레지던트의 모습이 슬펐고, 순간 나는 나 또한 다른 환자들을 대할 때 저런 모습은 없었는지 새삼 뒤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무력하게 뒤돌아서서, 저 말이 무엇을 뜻하는 거냐며 불안해하고 격분해하는 가족들을 달래야 했다.

그랬다. 나에게 그동안 병원이라는 공간은 그리 낯설지 않은 곳이었는데, 의사로서 느껴왔던 병원과 환자 보호자로서 느껴지는 병원의 온도는 확연히 달랐다. 여러 가지 각박한 상황을 이해는 했지만 당황스러웠고, 의사의 말 한마디가, 그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보호자들은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의사인 내 자신도 이럴지언대 다른 보호자들의 심정은 어떨지 감히 상상이 됐다.

수술 후 엄마는 항암치료를 받고, 또 방사선 치료도 받아야 했다. 몇 차례의 항암치료로 엄마의 머리카락은 봄바람에 민들레 홀씨 날리듯이 조금씩 빠져나가다가 나중에는 한움큼씩 뭉텅뭉텅 빠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행되던 방사선 치료는 한 달 동안 주말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병원에 가서 받아야 했고, 안 그래도 수술부위 통증으로 힘든데, 방사선 치료 합병증으로 식도염이 와서 이제 엄마는 식사조차 제대로 못하시게 되었다. 이래저래 엄마의 고왔던 외모는 탈모와 체중감소로 누가 보기에도 많이 처참해져갔고, 그걸 알고 있는 엄마의 마음은 우울감과 절망감으로 매일 매일 지하 바닥으로 한층 한층씩 끝도 없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엄마는 머리 빠져도 외모가 되니까 괜찮네. 나도 엄마처럼 좀 예쁘게 낳아주지.” “엄마, 엄마는 딸이 의사여서 좋겠네. 매일 이렇게 영양제도 놔주고…. 아님 엄마 매일 병원가서 줄서서 영양제 맞고 오고 그래야하는데…. 감사하지?”

“추울 때 이랬으면 정말 힘들었을 텐데, 날씨 좋은 5월에 이렇게 돼서 그나마 정말 다행이다. 수술도 잘됬고….”

“엄마는 복도 많다. 아들이 그나마 시간조절을 할 수 있는 직업이라 매일 매일 엄마 모시고 방사선 치료도 가고…. 아님 엄마는 매일 택시나 버스 타고 혼자 다녀야 했을텐데….”

엄마가 듣는지 마는지 그냥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매일 매일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가족이, 특히 항상 내게 정신적인 지주였던 엄마가 자기감정과 힘듦을 평소처럼 통제하지 못하고 막혔던 댐 무너지듯 무방비로 내보이는 그 모습이, 그 모습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저몄다. 나에게는 정말 하루하루가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그 날은 그렇게 고생하다가 겨우 모든 치료가 끝나고, 영양 보충만 되면 엄마댁으로 가기 로 돼있던,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그래서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던 어느 날이었다. 오랜만에 나는 엄마랑 다른 사람들 살듯이 그냥 그렇게, 그런 일상을 즐기고 싶어서, 엄마 콧바람이라도 쐬시라고 모시고 나왔던 터였다.

“이렇게 나와서 차 한잔 하니 좀 기분 좋아지지?”

나는 일부러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명랑하게 엄마에게 물었다. 한참을 무표정하게 나를 말없이 쳐다보던 엄마는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검사를 받지 않았으면…,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냥 편하게 한 2년 정도 살다가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

‘쿵!’

순간 난 무언가로 내 뒤통수를 크게 한 대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무슨 소리란 말인가? 내가 엄마에게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암을 미리 발견할 수 있게 검진을 시켜줘서 고맙고, 치료 과정 내내 함께 해줘서 고맙고, 방사선 치료 받는 한 달 내내 너희 집에서 편히 머무르게 해줘서 고맙고, 너도 힘들 텐데 퇴근 후에 와서 나 먹으라고 이것저것 맛있는 거 사오고, 밤에 잠도 못자고 수액 놔주느라 고생했다. 그 말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응, 이렇게 나오니 기분 좀 좋아진다.” 단지, 그런 말 정도만 기대했을 뿐인데….

엄마의 그 말투는 분명 이런 검사를 받게 하고 치료를 받게 한 것에 대한 불만, 아니 그 단어로는 조금 부족한 조금 더…, 좀 더 적대감이 내포된, 이렇게 고생시킨 모든 원흉이 나라는, 그런 원망감이 표시된 말투였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 날 그렇게 느껴졌다.

2.

그래, 그 날도 그랬다. 그 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냥 모든 게 정지되는 듯 멍하니 한동안 아무 생각도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었다.

폐암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일반실로 옮긴지 며칠 안됐을 무렵, 엄마의 안정적이던 혈압이 불안정해지면서 정상이하로 떨어지고 있었다고 했다. 엄마는 그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입으로 중얼중얼 애타게 계속 누구를 찾았다는데 그건 어이없게도 내가 아니라 남동생이었다. 나는 당연히 엄마가 힘들 때 나를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나름 충격을 받았다. 뭔가 내가 크게 착각하고 있었구나. 아무리 한다고 해도, 설사 의사이고 엄마 옆에서 아무리 내가 한다고 해도 엄마에게 있어 나는 남동생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 순간이었다.

3.

그랬다.

그 날 시킨 커피를 한모금도 못 마실 정도로 나는 예상치 못했던 엄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열심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엄마를 위한다고 했던 것이 사실은 엄마가 원했던 것이 아니고,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한다고는 했지만 엄마에게 남동생만큼의 위로나 의지도 되지 못했던 내 자신을 깨닫고 잠시 너무 부끄럽고,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앞으로 엄마의 진료나 치료부분에 있어서 절대 앞에 나서서 결정하거나 조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 뒤 엄마는 몇 번의 추적 검사에서 완전히 remission(관해)이 됐다고 판정받았으며, 치료해주셨던 교수님은 희귀한 case라며 case report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그 후 한 5년 정도는 정말 편안하고 행복했던 것 같다. 해외여행도 모시고 다니고, 국내여행도 여러 번 모시고 가고….

그러던 어느 날 추적관찰하고 있던 CT검사에서 재발 의심되는 소견이 보인다고 했다. 어떤 치료든 다 받겠다 했지만, 교수님은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셨다. 지금 아무 증상 없이 편하게 지내시면 그냥 놔두시라고, 나중에 호흡이 불편해지면 그 때 모시고 오라고….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지만 가족의 문제에 있어서는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치료진을 믿고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뒤 6개월 후 엄마는 조금씩 호흡곤란이 오기 시작했고, 그 해는 2015년 메르스 공포가 있었던 때였다. 당시 의료진가족들은 마치 나치시대 유대인 색출하듯,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했고, 의사부모 둔 자녀들은 등교까지 거부시키는 학교가 있었을 정도였다. 호흡이 힘들다 하셔서 다니던 병원을 가려고 했지만. 그 병원은 메르스 사태의 중심에 있던 병원이라 가지 못하고, 나 또한 엄마를 보러 가는 게 엄마한테 도움이 될지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오는 게 나을지 잘 판단이 서지를 않을 때였다. 그 때 의료진들은 그냥 두문불출하고, 타인과의 접촉은 최대한 피한 채 진료마치면 집에서 칩거하던 때였다. 고민 중 엄마의 호흡곤란은 좀 더 심해졌고, 일단 지인이 있는 다른 대학병원으로 엄마를 입원시켰다. 증상은 조금 호전되는 듯하더니, 면역력이 약해 원내감염이 된 건지 폐렴이 겹치게 되었고, 나중에는 너무 숨이 차다고 하셔서 호흡기를 달지 말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담당 주치의는 일단 너무 힘들어하시고, 산소포화도가 너무 낮아지니 우선 호흡기를 달았다가 폐렴치료 끝내고 다시 weaning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호흡기 달고 있는 동안 항암치료도 같이 하겠다고 했다. 우리 형제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더 크게 숨을 내쉬어보라고 다그쳤던 것 같다.

“엄마!!! 이러면 중환자실 가야해. 엄마, 조금만 힘을…, 힘을 좀 내봐.”

엄마는 잘 참으셨던 것 같다. 버틸 만큼 버티신 것 같았다. 이제는 안되겠다며 호흡기를 달아달라고 하셨다. 엄마의 눈에 두려움이 보였다. 나는 엄마랑 약속을 했다.

“엄마, 그럼 2주후에 보자. 2주후에…, 엄마 쉬고 있는 동안 폐렴치료하고, 항암치료도 하고…. 그러고 2주후에 보자. 잘 이겨내기다.”

유치하지만 호흡이 힘들어 정신없는 엄마의 새끼손가락을 쥐며 약속도 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에게 그동안 수고했다는 듯이 그 숨찬 가운데서도 잠깐 반짝 기운을 내어 한 명 한 명에게 악수를 청했고, 그리고…, 중환자실에 들어가셨다.

그러나 폐렴치료는 쉽지 않았다. 폐렴치료가 되지 않으니 항암치료를 해주지 않았고, 호흡기 달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니 weaning은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CPR 포기각서를 썼고, 쓰면서도 이걸 써야할지 말아야 할지 형제들의 의견은 분분했다. weaning 시도를 할 거냐 말거냐 그것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엄마 그만 괴롭히자 어느 순간 그렇게 얘기했다가 그래도 한번만 해보자고 했고, 한 번 실패하고 나니 또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했다. 몇 차례 시도된 weaning은 계속 실패했고, 우리 형제들은 그 시도 때마다 쌕쌕 호흡이 힘들어서 얼굴이 빨개지는 엄마의 얼굴을 뵙기도 죄스러워졌다. 매순간 형제들의 의견은 일치되지 않았고, 우리들은 어느 것이 정답일까 고민으로 속이 썩어 들어갔다. 우리들의 나이는 모두 40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지만, 부모의 삶을 결정하기에는 우리들은 아직 너무도 어리고 미숙했다.

각자 가정과 직장도 있었던 우리 형제들은 하루 2번 있는 면회를 순번을 돌아가며 가고, 그 때마다 엄마의 상태를 단체 카톡으로 전했다. 호전되기를 희망했지만 점점 우리는 그게 부질없는 희망이라는 걸 각자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들 중 그 누구 하나도 그걸 밖으로 소리 내서 기정사실화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로 무의미하게 연명하는 게 좋을지 말지 그것도 우리가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엄마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절대 weaning은 할 수가 없었고,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의사소통을 해주려고 의료진이 진정제를 조금만 줄여도 엄마는 너무 힘들어했다. 우리는 의사소통 안해도 좋으니 더 이상 엄마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다가 이제 엄마의 혈압은 50mmHg으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모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오라고 중환자실에서 연락이 왔다. 모두 중환자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다시 혈압이 80mmHg으로 올라갔다고 담당간호사가 얘기했다. 오늘은 넘기실 것 같으니 일단 한분만 빼고 다 돌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이제는 면회시간 뿐 아니라 보호자 한명이 계속 병원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어느 날은 새벽에 연락이 왔다. 다 준비하고 오시라고, 막 준비하고 나가려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다시 혈압이 올라갔으니 일단 집에서 대기하고 계시라고…. 어느 날은 낮에 연락이 왔다. 나는 진료를 중단하고, 다른 형제들은 직장을 조퇴하고 병원으로 갔다. 가서 면회하고 나면 엄마의 혈압은 다시 90mmHg으로 올라갔다. 의료진은 이런 반복적인 event에 이미 뇌손상은 왔다고 봐야 한다 했다. 우리들은 이제 이런 의미 없는 수명연장 치료는 하고 싶지 않다고, 그냥 다 빼고 집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지만, 병원에서는 그렇게 해 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나도 의사이고, 이런 걸로 절대 문제 삼지 않겠다, 각서라도 쓰겠다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엄마의 몸은 점점 망가져갔다.

어느 날은 가보면 기도삽관튜브로 인해 앞니가 부러져있었고, 입가는 다 찢어져 있었으며, 어느 날은 피부가 혈류 순환이 안 되어 괴사가 되는 부분도 있었고, 등에 욕창도 생겼으며, 어느 순간 이젠 발가락 몇 개는 까맣게 끝이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고왔던 엄마가 이렇게 망가져 가는 걸 보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나한테 그렇게 부탁했었는데….’

“제발이지, 나중에 내가 많이 아프더라도 몸에 주사 줄 주렁주렁 달고…. 이런 짓 안하게 해줘라. 부탁한다.”

평소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부탁했었는데, 이런 엄마의 마지막 부탁조차 들어주지를 못했다. 내 자신이 의사인데도….

어느 날은 분노가 치밀었다. 사람이 존엄스럽게 자기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법을 위한 법을 주장하면서 어디까지 신체가 훼손되기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어느 날은 그래도 가끔은 아직은 따뜻한 엄마 손을 잡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더 이상 신체 훼손만 되지 않는다면, 다시는 얘기할 수 없다 해도 이렇게 조금만 더 유지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생각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이렇게 맘을 다져먹어도, 그 날 다른 형제들이 분노하면 또 내 마음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또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해야하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걱정했고…, 고민하고 고민했다. 의사이고 싶지 않았고, 자기 부모하나 지키지 못하는데 의사가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중에 더 화가 나는 건, 중환자실에서 준비하고 다 모이라고…. 이런 연락이 오는 게 여러 차례 지속되고 .반복되고…. 중환자실에 계신 지 2달이 다 되어가니 하나둘씩 가족들이 지쳐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슬픔도 조금씩 희석이 되어갔다. 이제는 그만 보내드렸음 하는 마음들이 느껴졌다. 지금 꼭 가셔야 한다면, 모두가 아파하고, 모두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도록 엉엉 울면서 통곡하는 가운데 엄마가 가시길 바랬는데…. 그 바람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서 너무나 속상하고, 슬프고, 불안하고, 화가 났다.

엄마는, 그 해 8월 마지막 날, 그렇게 조용히, 그 어느 누구하나도 펑펑 울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렇게 나는, 나의 소중한 엄마를 보내드렸다.

4.

“자식이 아픈데, 부모가 너무 건강한 것도 벌이여요.”

‘쿵!’ 하고 또 가슴이 내려앉았다.

고혈압으로 얼마 전부터 우리 병원에 다니시는 80세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자꾸 어지럽다고 오셨는데, 고혈압이 발견되었고, 몇 가지 혈액 검사상 이상소견이 보여서 조금 더 정밀검사와 주기적 추적관찰 및 검사를 권유드릴 때마다 “다음에 할게요”, “아니, 안할래요”를 반복하시더니, 오늘은 드디어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 그냥 혈압약만 먹겠습니다. 이제 검사는 안하고 싶어요. 살만큼 살았고, 이제 그만 가야죠. 이 나이에 더 건강히 살겠다고 검사하는 것도 싫어요.”

엄마도 그랬다.

방사선 치료 받으러 병원에 모시고 갔을 때, 70세 넘으신 할아버지가 딸이랑 이것저것 검사하러 오신 걸 보시고, “어휴, 검사하지말지. 70넘음, 그냥 모르고 있다가 가는 게 좋은데…” 하시면서 내 맘을 불편하게 했던, 그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러시라고 했다. 그 대신 혈압약만은 꼭 잘 챙겨서 드시라고….

환자의 개인사정을 모두 이해하고 약을 처방하고 검사를 권유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환자의 개인사정을 무시하고 원론적인 원칙과 검사, 치료만 강요한다는 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하고 환자와 그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행동인가?

5.

오늘도 하루를 시작하는 내 책상 앞에는 커피가 한 잔 놓여있다.

그동안 너무 한국에 있기 힘들어서 도피하듯이 외국에도 1년 다녀왔다. 엄마라는 단어자체를 꽁꽁 봉인해버리고…, 언제쯤이면 라디오나 다른 매체에서,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 입에서 ‘엄마’라는 단어를 들어도 무심할 수 있을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랬었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잘 살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는 또 이렇게 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이제는 엄마라는 단어를 들어도 감정이 북받치는 것을 티 안내고 참아낼 수도 있으며, 한동안 나를 휘감았던 허무주의에서도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며 벗어나려고 추스르고 있다.

가끔은 커피잔을 쳐다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그 때 그 도너츠 집에서 엄마와 마주보고 앉아있었던 그 탁자위에 놓여있던 커피잔이 생각난다. 난 그 날 도너츠도 커피도 한 입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버리고 왔었다. 마치 여기에 왔었던 흔적을 지우고 싶은 듯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가 엄마의 나머지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뺏은 건 아닌지…. 다음에 엄마를 만나면, 이 아픔이 그 때 가셔진다면, 함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아직은 닫혀있는 내 마음의 빗장이 조금 더 열리면, 엄마한테 말하고 싶다.

내가 그 때 했던 건, 내 최선이었다고…. 나도 처음이니까, 실수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다음번엔 엄마가 많이 아프고 불안해하면, 그 때는 “엄마, 우리 잘 이겨내자”, “엄마, 잘 참을 수 있을거야”, “ 별거 아니야”, 이렇게 내 입장에서 말하지 않겠다고….

그 때 “많이 아프지? 너무 힘들지?” 그렇게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냥, 괜찮아질 거야. 별거 아니야. 그렇게 그러지 말고…. 아무 말 없이, 그냥 꼭 자주 안아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커피를 다 들이키고, 엄마가 자랑스러워해 마지않았던 내 모습으로 추스르며 오늘도 나는 첫 환자를 불러본다. 오늘도 내가 이 병원에 오는 환자들에게 육체의 평안함 뿐 아니라 정신적 평안함도 줄 수 있게 도와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한 때 문학가를 꿈꾸던 문학소녀였던 적이 있었다. 당연히 국문과를 갈 거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는 국어보다는 월등히 잘 나오는 수학성적에 밀려 이과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러다 이렇게 의대를 들어오게 되었다. 입학식 때 대학정문에 발을 디디며, ‘펜은 칼보다 강하다던데 나는 약자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건가’ 하고,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 뒤 나는 가끔 나를 이과생의 탈을 쓴 문과생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는데, 그건 보편적인 의대생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에 때로는 비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나를 변명하는 방법이기도 했고, 때로는 나도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고 상처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변에 자각시켜주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올해 나는 고3 엄마였고, 이젠 아이에게 특별히 뭘 해 줄 것도 없었지만 내가 뭘 특별히 할 수 있는 마땅한 시간도 없었던 대기조였다. 좋아지리라 기대했던 아이의 성적은 가을로 접어들자 변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고 그래도 버릴 수 없는 희망고문이 지속되면서 나는 뭔가 어디에 신경을 집중할 만한 프로젝트를 찾아야 했다. 나름 바쁘게 살았고,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50을 바라보는 이 순간 나는 아무것도 내세울게 없었고, 뭘 하려고 해도 진료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집에 있는 것조차 너무 답답했던 어느 날, 카페에 혼자 앉아 커피 한잔을 시켜놓고 무너진 내 자존감을 하릴 없이 쳐다보며 긍정의 힘을 끌어올리려 애쓰던 중 나는 내가 누군가의 귀한 딸이었다는 것을 기억해냈고, 글을 쓰면 내 맘이 차분해지고 평온해졌던 기억도 떠올랐다. 언제인가부터 하루 일과의 감정을 차분히 적어낼 마음의 여유조차 잃어버렸고, 그런 방법도 잊어먹은 듯 했는데 문득 글을 쓰고 싶어졌다. 누구의 아내로서 누구의 엄마로서가 아닌 내 자신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글이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커피를 바라보며 엄마가 생각이 났고, 말주변이 없고 감정을 줄줄 표현한다는 것이 너무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세뇌되어 있었던 내 자신을 뒤돌아보며, 그 때 엄마에게 말로는 못했던 내 진심을 글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너무 시간이 많았으면 계속 미진한 글을 수정하느라 글을 내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시간이 없었으면 이런 글을 쓸 엄두조차 못 냈을 텐데 시간이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는 고3 엄마라는 특수한 상황이 적절한 속도로 글을 쓰게 하고, 수능 후에는 어찌될지 몰라 일찌감치 수능 전에 서둘러 글을 내게 했다.

막상 보내고 나니 너무 부족한 글을 냈나, 나의 글쓰기 수준이 고등학생 시절로 멈춘 걸 드러낸 건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내 감정을 표현할 적당한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써내려갔던 순간순간이 좋았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귀하고 좋은 상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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