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천숙 산부인과 전문의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또 훅 진료실이 더워진다. 요즘엔 봄이 너무 짧다. 벌써 여름이 오려는가…문득 작년 여름에 만났던 G가 떠오른다. G–그를 한 번 본 사람은 그의 특이한 외모를 결코 잊지 못한다. 얼굴도 귀도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요정 도비랑,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합쳐 놓은 듯하다. 사고가 있었던 날 그를 봤던 당직의도, 백병원에서 한 번 그를 봤던 펠로우 선생님도 G를 기억했다.

그는 그리고 시선을 잘 맞추지 않는다. 거의 항상 45도 왼쪽 아래를 보고 얘기한다. 나는 산전검진 동안 한 번도 그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말도 툭툭 내뱉듯이 하고, 아내에게 말을 함부로 하기도 했다. 필리핀이 고향인 아내는 임신 후 쉬고 있긴 하지만 영어 강사였다. 키가 작고 통통하며 얼굴이 동그랗고 새카만 그녀는 결코 미인형도 호감형도 아니었다. 산모는 부산역 앞에 파는 필리핀 음식이 너무나 먹고 싶다고 내게 몇 번 말했다.

산모는 유난히 영어에 투정을 많이 섞었다. 영어로 저토록 징징거릴 수 있다는 걸 나는 첨으로 알았다. 나는 그게 다 G가 아내에게 잘 해주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암튼 G는 돈이 없어서 사 줄 수 없노라 하였다. 고향인 필리핀에 한 번 가고 싶다고 산모가 애원해도 돈이 없어서 못 보내준다고 했다. 나는 산모가 너무 불쌍했다.

“보호자분~~여자는 임신을 하게 되면 친정 엄마가 해 주시는 음식이 너무나 간절하게 먹고 싶어져요. 그건 산모만을 위해서가 아니고 태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돈이 없는데요, 뭐.”

태교로 방향을 틀어 봐도 불통이었다. 산모를 위해 해주는 일이 결국 태아를 위해 하는 일이고, 태아를 위해 하는 일이 좋은 태교가 되어 똘똘하고 착하고 건강한 아이를 보게 된다고 누차 강조하고 설득하였다. 나는 가운에, 꼬깃꼬깃 접은 만원짜리 몇 장을 그들 부부가 올 때마다 만지작거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주지는 못했다. 그러한 일회성 동정이 과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 사이에 입덧은 좋아지고, 산모는 더 이상 필리핀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 몇 만원을 쥐어주는 대신, 지인으로 등록해서 진료비를 할인해주었고 가끔 초음파비를 받지 않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 돈으로 산모에게 꼭 부산역에 데려가 필리핀 음식을 사주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래도 그는 가끔 병원에 전화해서 산모에게 사주는 철분제며 영양제가 넘 비싸다고 우리 간호사를 달달 볶았다. 암튼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G가 산모에게 잘 해 줄 수 있도록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귀에 들어가는지, 그리고 실천은 하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차에 아마도 내 말은 그에게 소귀에 경 읽기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일이 있었다.

산모가 20주쯤 때였다. 조산기가 있어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자궁 수축이 있어 절대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아침 회진 중에 나는 어처구니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G가 침대 한가운데 큰대자로 떡하니 누워있어 산모는 침대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내가 아래턱을 털썩 떨어뜨리고 바라보자, 침대보를 잡고 침대 귀퉁이에 누워있던 산모가 애처로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보호자분! 산모가 절대 안정이 필요해요! 여기 누워 계시면 안돼요!“

그러자 G는 천천히 일어나며 역시나 눈은 맞추지 않고 변명했다.

“어제 밤새 당직 섰더니 피곤해서….”

그가 가고 나자 산모도 훨씬 편해 보였고, 나는 그가 도대체 임신한 아내를 생각이나 해주는지 궁금했다. 우리나라도 이제 다국적 가족들이 많다. 옛날에 비해서는 정말로 서로 사랑에 빠져서 결혼 한 사람들도 보인다. 그러나 대부분은 베트남의 나이차가 많이 나는 딸 같은 아내를 둔 남편이 많다. 지난번 어떤 부부는 둘째 출산 과정에서 아내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남편이 내게 수술을 부탁했다. 그녀가 심장의 문제로 심장내과 선생님이 상주해 있는 대학에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설명했으나 남편은 돈이 없다며, 아내가 죽어도 좋다는 각서를 작성하고 아기만 무사히 꺼내달라고 했다. 다행히 산모 아기 모두 무사했지만 참 씁쓸했던 기억이다. 한국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나 진통중이나 출산의 과정에서 자신의 아내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자신의 아기를 더 우선시 하는 경우들이 있다. 나는 G를 그런 부류의 최상단에 놓고 최고로 싫어하였다.

그러던 중 그 사고가 터졌다. 작년 7월 마지막 날, 그녀는 임신 32주였다. 밤중에 질 출혈과 복통으로 우리 병원 응급실을 방문했고, 당직의는 임신 자간증과 태반박리로 진단하고 바로 대학병원으로 전원하였다. 그 날 G는 아내가 잘못 되면 다 죽인다고 대학병원에서 난동을 피웠다 했다. 혈압이 엄청나게 오르고 출혈도 많았으나 다행히 산모는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를 잃었다. 사실 임신 자간증은 전조증상과 의심할 만한 소견들이 20주 이후에 조금씩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부부의 경우 산전검진 동안 태아는 아주 잘 자라고 있었고, 양수량도 풍부했고, 산모의 혈압도 안정적이었다. 다만, 사고가 터지기 전 마지막 방문 때 딱 한 번 혈압이 138/92로 올랐다. 그러나 역시 태아는 또래 주수보다 훨씬 잘 자라고 있었고, 나는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프거나 소변량이 줄거나 애기가 잘 놀지 않으면 오라고 설명한 후 보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방문 전에 그만 그런 사고가 터지고 만 것이다. 이런 경우 의례히 보호자는 병원에 전화를 해서 끊임없이 불평을 한다. 심하게는 욕이나 협박을 하기도 한다. 이후엔 병원에 온다. 난동을 부린다. 병원 로비에서 시끄럽게 떠들거나 진료를 방해한다. 결국은 소송을 걸거나 돈을 요구한다. 우리의 G도 그 통과의례를 시작한 듯 하였다. 전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간호사에게 불평하던 전화가 내게 넘어왔다.

“마지막 방문 때 혈압이 높았는데 막을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보호자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당시의 한 번의 혈압 오름은 제 의학적 판단으론 문제가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다른 여러가지도 같이 봐야 하고, 경과도 봐야하고, 초음파상이나 다른 검사 상에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설명하고 다음 방문시…. (뚜뚜뚜뚜) 보호자분? 보호자분!“

G는 딱 한마디 하고는 내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가 말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욕을 한 것도 아니었으나 그게 더 무서웠다. 일전의 파견 간 병원에서, 화난 보호자가 칼을 산부인과 주치의의 목에 대고 끌고 가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최근의 뉴스를 보니 아이가 감기약을 먹고 낫지를 않는다고 아예 주치의를 조폭처럼 두들겨 패는 모습이 CCTV에 찍힌 것도 있었다. G와 그의 아내가 그 나이에 어떻게 얻은 애기인가…이유불문하고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게다가 분명 대학병원의 수술비와 입원비를 낼 돈도 없을 것이다. 설명을 해야겠는데 전화도 막 끊어버린다. 나는 G가 두려웠다. 능히 그 어떤 짓도 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전화가 온 그 날부터 고뇌가 시작되었다. 입맛도 떨어지고 잠도 잘 오지 않고 살도 막 빠진다. 그러던 며칠째 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G가 병원에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찾아가서 담판을 짓자! 그래 가서 설명하자! 죽든 살든 기다리다가 피를 말리느니 그게 낫겠다.

그렇게 결심한 다음 날 아침–토요일이었다. 그 날도 근무가 있으니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이 일을 해결하고 출근하자는 생각으로 새벽부터 집을 나섰다. 아침인데도 끈끈한 7월의 더운 공기가 온 몸에 감겼다. 가다가 돌아서기를 몇 번-드디어 대학병원에 도착했다. 직원에게 확인해보니 다행히 아직 퇴원하지 않고 입원해 있었다. 나는 빨리 뛰기 시작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빵집이 문을 열었길래 들어가서 갓 구운 따끈한 팥빵, 슈크림빵, 소보루, 카스텔라 등이랑 바나나 우유를 2개 샀다. 아마도 문병 오는 사람도 없으리라 싶어서 뭐든 사가야 할 것 같았다. 암튼 이젠 돌아설 수 없다. 머리로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게 아니라, 가슴이 시키는대로 하자 생각하며 입원실을 찾아 들어갔다. 아직 한참 아침인데도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옆에 있던 다른 보호자분이 복도에 운동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복도로 나왔더니 이른 아침인데도 보호자, 환자들로 복도가 나름 부산했다. 그리고–멀리서 그들이 보였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 폴대를 밀며 천천히 걸어오는 산모는 긴 머리를 하나로 가지런히 땋아 앞으로 넘기고 있었다. G는 그 옆에서 천천히 산모의 등을 어루만지며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볼 때까지 서서 기다렸다. 마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그리고 눈물이 왈칵 솟았다. 바로 그 때 나를 발견한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정면에서 G를 보았다. G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빵이 든 비닐봉지를 든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크게 뜬 눈은 지금까지의 그의 인상을 완전히 딴판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얼마나 마주보고 있었을까. 그는 곧 원래대로 시선을 떨구었다. 반면 산모는 나를 보더니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 껴안았다. 내 몸에서 뜨거운 것이 확 솟아올랐다. 내가 빵 봉지를 내밀자 산모가 휴게실로 나를 이끌었다. 산모, 나, G–이렇게 셋이서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그녀는 영어로 그녀의 병명을 정확하게 얘기하고, 그렇게 갑작스럽게 오는 경우는 드문데, 그것이 자신의 체질과 가족력 때문이라고 얘기했다. 그리고 다시 애기를 가지면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안다고 덧붙였다. G는 고개 숙이고 가만히 듣기만 했다. 나는 얘기를 들으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설명을 잘 해주신 대학의 주치의 선생님에게도 고마웠고, 그래도 내가 더 신경 썼으면 태아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자책도 되었다.

산모가 얘기를 끝마치자 세 사람사이에 침묵이 오랫동안 감돌았다. 뭐라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말했다. 다시 아기를 가지면 내가 책임지고 순산시켜 주겠다고. 매주 보든, 입원을 시키든 어떻게든 하면 현대의학으로 못 할 게 뭐냐 싶어서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그랬더니 G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내가 죽을 수도 있대요. 우린 이제 아이를 안 가지기로 얘기 끝났어요.“

그 때 나는 알았다. 내가 틀렸었다는 것을. 내 생각과 달리 G는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어떤 다른 남편보다도.

그리고도 한참 말없이 셋이 앉아 있다가 나오는 길에 치료비를 내 카드로 계산한 것은 순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평소의 나였으면 이것이 일회성인가, 이후에 계속 부탁하거나 하면 어쩌나, 이런 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은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또는 단 한 마디라도 나를 원망했거나, 아님 보통의 경우처럼 싸워야 했다면, 싸우면 싸웠지 절대로 치료비를 내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기에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더 놀란 것은 그 한 달 뒤였다. 카드사용 내역을 보던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병원비가 환불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다시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G가 환불한 것이다. 인턴까지 치면 거의 20년을 병원에서 일 하면서 나는 무수히 많은 직종의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보아왔다. 판사, 의사, 교수, 선생님, 기자, 경찰…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선하고 예쁘던 얼굴들이, 어떠한 작은 일이든 틀어지는 경우에 어떻게 괴물로 변하는지를 무수히 보아왔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와도, 학문적 깊이와도, 돈의 양과도 상관이 없었다. 많은 부분 그 이유는 어떤 이유든 의사를 향해 팽배해 있는 불신과 연관되어 있다. 또한 화장실 들어갈 때랑 나올 때 맘이 다른 것은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그런데 G는…. 과연 그는 누구인가. 나는 마음속으로 일어나서 그에게 90도 절하였다. 앞으로 그를 만나면 나는 그를 보호자분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는 내가 안 그 어떤 선생님보다도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탐파의 겨울은 따뜻합니다. 남편 출근하고, 아이 학교 가고 나서 청소하다가 나른한 오후에 창가에 앉아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노라면, 그 동안의 일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가곤 합니다. 인턴부터 치면 17년, 의대 본과까지 치면 20년 동안 쉼 없이 달려왔네요. 미국 오기 전전날까지도 119 차안에서 한 손으론 산모의 하혈하는 곳을 틀어막고, 의식을 잃지 않게 끊임없이 말을 걸며 제발 산모에게 별 일 없기를 빌며 대학병원으로 마구 달리던 일이 눈에 선합니다. 그 어떤 산모 때문에 밤중에 아파트 정원에 앉아 술을 마시며 대성통곡하던 일도 아직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떠올리기엔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산모와 힘을 합쳐 건강한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느끼던 보람과 행복도 컸습니다. 남편의 연수로 미국에 따라와 꿈 같은 휴식을 취하는 중에도 밤에는 병원 어디쯤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외래가 너무 바쁜데 아무도 안 도와주는 꿈, 수술중 환자가 위험에 빠지는 꿈, 누군가가 애기를 자꾸 떨어뜨려 애가 타는 꿈, 진료를 보고 싶은데 내 진료실이 없어서 당황하는 꿈.

산부인과에서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 일중에 이 일은 무척 인상 깊었던 일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중 하나인 의사와 환자의 신뢰회복에 귀감이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정한 ‘자존심’을 가진 한 명의 용감한 남자를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사진기가 풍경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하듯이, 제 글의 부족함이 G를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해 안타까울 뿐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어릴 적부터 저의 소망이었지만, 제 안에 뒤엉켜 있을뿐 어떻게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 안에 있는 실뭉치의 끝을 잡아 끌어내어주신 ‘한미수필문학상’ 및 이를 주최한 ‘청년의사’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여러 가지 열악한 한국의 의료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산모와 아기에게 또 모든 환자에게 가장 좋은 결정을 고민하며 성실히 진료중인 모든 의사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수필문학상에 응모해 보라고 적극 권유해주고 항상 지지해주는 남편, 저를 항상 추켜 세워주는 딸, 응원해주는 친구들에게도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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