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도 훌쩍 넘은 1993년 경 초겨울의 서울은 문민정부의 개혁바람과 1980년대의 경제 급성장의 후광으로 활기에 차 있었다. 이제 그때의 기억은 아련해지기 시작하는 나이지만 당시 내 또래 정도의 전공의들과 수술실과 병동에서 여전히 씨름하는 대학병원 교수의 하루도 늘 바쁘기만 하다.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정신없이 보냈을 그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복도에서 요란한 발자국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학교동기인 성형외과 전공의 친구가 다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야, OOO 교수님께 협진 냈으니 환자 한 명 잘 봐주라.” 그 당시 자천타천 우
문 앞이다. 인위적인 페퍼민트 향이 방안에서 뿜어져 나온다. 화사한 분홍색 장미벽지, 하이얀 침대보, 진한 코발트색 환자복. 그럼에도, 그 안에 깊게 움을 묻은 죽음의 향취를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다.‘이런. 감기라 하고 마스크라도 하고 올 걸…’왕진 때마다 반복되는 순간적인 상념들이다.“안녕하세요, 어르신. 오늘 기분은 어떠세요?”변하려는 안색을 다듬고, 어린이집 교사 같은 한껏 온화한 미소를 던진다. 주름과 검버섯이 만개한 얼굴, 안개가 서린 듯한 눈, 조금만 세게 움켜져도 바삭하고 아스라질 것 같은 여윈 몸매. 게다가
나는 간이식을 전공한 외과 전문의다. 간이식이란 말 그대로 병들어 있는 기존의 간을 새로운 간으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전공의 때만 하여도 간이식만큼은 절대로 전공으로 삼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내가 지금 간이식을 하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환자가 많이 죽어서’였다. 전공 선택을 앞두고 찬찬히 과거사를 곱씹어보니 그 때 내 앞에서 죽어간 환자들이 정말로 죽을 운명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 의문은 이내 ‘살릴 수 있었겠는데?’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힘든 전공의 생활을 끝내고 군의관을 하면서 생긴 마음의 여유
절망은 그렇게 예기치 않게 찾아왔다. 어제 같은 오늘이 내일도 별다를 것 같지 않은 하루가 지날 때 누군가의 가슴을 내려앉게 하려던 말을 멈추게 하고 찾아왔다. 그 날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녀가 홀로 병원을 찾은 날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분명 누군가의 어머니였을 그녀는 그날 저녁 자식들과의 저녁 약속이 있었을 것이고 어린 손주는 할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렸을 것이다. 나 또한 그날 저녁에 있을 가족 모임을 머리 한편에 놓아두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속이 아프다며 홀로 내원해 위 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동굴 같은 식도를 지나 위
출국장으로 멀어져 가는 아내와 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보고 있자니 착잡해진다. 수술에 필요한 준비를 위해 먼저 출발하는 가족들이 바다 건너에서 애쓰는 동안 나는 그저 초조함을 견딜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무력감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근 삼 년간 무력감은 나의 일부였다. 시상하부과오종(視床下部過誤腫). 마치 어느 종교의 이름이나 무협지 속 주문처럼 들리는 이 병은 아이의 생후 이틀째, 우연히 시행한 초음파 검사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 가족의 틈을 파고들었다. 당시 국가 공인의 전문의 자격을 목표로 수련 중이었지만 교과서엔 불과 몇
이리저리 늘어진 링겔 줄, 깜빡거리는 바이탈 싸인 모니터. 그 아래 산소마스크를 쓰고 누워있는 환자.‘어라? 원래 이렇게 왜소했나?’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안아주고 다독여 주는 분, 널따란 품을 가진 거인, 엄마는 절대 깨지지 않을 쇳덩어리인 줄 알았다. 4남매를 혼자 키워내고, 철의 삼각지 전투에서 눈을 다쳐 20대 초반에 실명을 하신 아버지를 여든이 넘도록 돌봐 왔으니. 그런 엄마는 이제 없다. 무릎이 퉁퉁 부어 잘 걷지 못하고 심장혈관이 막혀 시술을 받은 환자, 자칫하면 부서질 거 같은 유리였다.“바쁜데 왜 왔어?
“저는 꼭 성혜윤 선생님을 만나야 합니다. 제 담당 의사로 그 선생님을 배정해 주세요.”어젯밤에 입원한 환자의 기록이다. 출근 후 당직 보고에서 응급입원한 환자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은 후, 의무 기록을 확인하며 나도 모르는 새에 한숨이 나왔다. 이 환자는 나에게 어떤 기대를 하고 왔을까. 길지 않았던 첫 번째 입원 기간에서 그 환자는 나에게 어떤 인상을 받았던 것일까.만약 내가 지금 전공의 1년차였다면 겉으로는 티를 내지 못했겠지만 속으로는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늘 실수할까봐 조마조마하고 눈치 보고 혼이 나는 상황에서 이렇게 자
여느 때처럼 출근준비를 하며 화장대에 앉아 로션을 바르고 있는데,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숨이 막힌다. 왜 이러지? 나는 원래 폐가 약하다. 아버지처럼 폐암인가? 덜컥 겁이 난다. 요즘 분만과 수술이 너무 많아서인지 왼쪽 어깨와 목이 너무 아파 어젯밤 잠을 설쳤었다. 혹시 그 탓인가… 갱년기? 뇌종양? 걱정을 잔뜩 하며 지하철을 탔다. 20년 전 - 방향치에다 성격이 급한 나는, 차를 끌고 나간 첫 날 사고를 냈다. 그 이후로 쭉 지하철을 타고 책을 읽으며 출퇴근 한다. 대개는 나 출근할 때 다른 사람들도 다 출근하므로
그는 내가 보는 수많은 파킨슨병 환자 중 한 사람이었지만, 첫 만남부터 유달리 기억에 남았다. 파킨슨병을 전공한 내가 병원에 온 뒤로 신경과 진료를 나에게 받게 된 박춘엽 님. 늘 오전 진료 마지막 시간대를 예약하고 가끔 늦기도 하지만 간호사들에게 오히려 짜증을 내면서 들어오는 그는 어찌 보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르신’이라고 불릴 만한 74세 남자였다. 진료 때마다 같은 박 씨라는 공통점(?)을 강조하며 흐뭇해 하다가 그 말에 내가 웃으면 더 흐뭇해하면서 슬며시 반말을 쓰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 기분 나쁘지 않은 그
당직 없는 주말이면 종종 서점에 들른다. 계획 없이라도 일단 들어서면, 책들에 둘러싸이는 것만으로도 한 주간의 긴장이 풀리는 곳. 시와 에세이 공간으로는 마음부터 먼저 뛰어간다. 그러다 마음 끌린 시집 한 권이라도 품고 돌아오는 날이면, 그날 저녁은 시원한 맥주 한 캔과 함께 맘껏 말랑해질 준비가 된다.내게 말랑해진다는 건, 잔잔한 감정의 호수에 일부러 돌 몇 개를 던져 어지르는 일이다. 그 돌은 주로 시와 맥주, 어떤 때는 홍대 싱어송라이터의 차분한 목소리가 되기도 한다. 나 편하라고 제 무게만큼 가라앉아 숨죽이고 있는 감정들을
7개월 전 지방 음악대학에서 근무하는 S교수에게서 편지를 받았다. 그는 테너 성악가로서 비엔나음대에 유학을 하고 독일정부 연구비를 수혜하여 독일가곡 연구활동을 수행한 바 있고, 한국슈베르트협회장을 맡고 있는 저명한 음악인이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슈베르트 탄생 222주년 기념 S교수 독창회 초청장이 들어있었다.‘아 드디어 독창회를 가질 수 있을 만큼 성대가 회복되었구나.’나는 놀라움과 기쁨에 차서 초청장을 재차 보면서 가슴 졸였던 10년 전을 떠올렸다.진료실에서 처음 만난 S교수는 쉰 목소리로
“임신해서 미안해요.”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현재 임신 8개월의 산모이다.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 임부복을 입고 집밖을 나서기만 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건넨다. “배가 많이 나와 힘들겠네.” “몇 개월이나 됐어요?”…배가 남산만한 여자가 하얀 가운을 입고 그것도 ‘산부인과 의사’ 명찰까지 달고 병원을 활보하다 보면 굉장한 볼거리가 되는가 보다. 지나가는 환자도, 원무과 직원도, 심지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까지 “배가 큰 것을 보니 고추인가 보네”, “배가 아래로 축 처진 것이 곧 나올 때가 되었나봐.”&hell
국세청에서 발급받을 서류가 필요해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켠다. 공인인증서 어쩌구 하는 창이 뜬다. 요즘에 휴대폰으로 결제나 이체를 하면서 인증서 암호라는 걸 넣은 적이 있었나 싶다. 예상대로 인증서는 갱신 기한이 만료된 상태였다. 재발급을 받으려 은행 홈페이지를 연다. 통장은 찾았는데 서랍을 다 뒤집어도 보안 카드라는 놈이 당최 보이질 않는다. 급기야 책장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 탈탈 털어보는 상황에 이르렀다. 책을 읽다 중간에 덮을 때 주변의 아무거나 책갈피로 끼워 넣는 나의 습관 때문이었다. 이런 게 여기 왜 들어갔을까 싶은 공
“인공호흡기는 언제까지 달아야 하나? 심폐소생술은?”중환자실에서 장인어른의 면회를 마친 후였다. 처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장모님이 내게 물어보셨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림을 느꼈다. 그들은 사위가 아닌 의사로서 내 의견을 구하는 듯했다. 아니 보호자와 담당의사의 생각을 절묘하게 절충한 답변을 기다렸다고 봐야 할 게다. 중환자실로 옮긴 뒤 50여 일을 인공호흡기에 의존하여 연명하고 계신 장인어른은 거의 뇌사상태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후 여러 차례 고비를 넘기신 장인어른의 7년여에 걸친 투병생활도 이제 막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