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장례시장은 다니면서 늘 봤었고, 몇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2014년도 11월, 가을의 막바지이자 겨울의 초입이었고, 가로수에는 달려 있는 나뭇잎보다 인도와 주차장에 굴러다니는 낙엽이 더 많아지고 있었다. 간만에 꺼내 입은 검은색 양복 안으로 스산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장례식장 밖 흡연장소에는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과 조문객들이 약간 술이 오른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장례식장 입구에 들어섰다. 밖의 어두운 분위기에 비해, 장례식장 안은 너무 밝았고, 환한 형광등 불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아이들을 모두 재운 뒤 소파에 몸을 파묻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아내에게 물었다.“뭔데?”“만약에 결혼 날짜를 받아 둔 신랑이 대장암 3기로 진단되면 결혼을 할 수 있겠어?”“대장암 3기면 어느 정도인 건데?”글쎄, 어느 정도라고 말하기는 참 애매하다. 요즘은 원체 수술 방법이 발달하고 항암치료도 좋아져서 생존율이 많이 높아지긴 했으니까. 게다가 3기도 3기 나름이라, 어떤 경우는 5년 생존율이 80퍼센트에 달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50퍼센트도 채 안되기도 하니, 질문이 잘못되었다.“5년 안에 죽을 확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겨울의 끝자락, 공기 중에는 어제보다 더 풀어진 햇살이 너울댄다. 며칠 전 출근할 때 입었던 패딩이 이제는 꽤 덥게 느껴져, 집에 돌아오는 5분 사이에 등 언저리가 제법 젖었다. 고된 당직의 흔적을 훌훌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한 뒤, 몸도 머리도 말끔해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 한 장을 찢었다. 모처럼 따뜻하고 맑은 주말 오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번화가로 나갔는지 창문 밖은 밤처럼 고요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이야말로 오랫동안 별렀지만, 막상 하려 들면 정말로 일어나 버릴까 두려워서
진정한 속죄는 용서를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그러나 어떤 용서는 속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상대방과 상관없이 이미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쩌면 그에겐 용서 자체가 무의미 할지 모른다. 미움이 없는데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2:7)그가 허물어진 모습으로 진료실에 들어설 때 알았다. 내 짐작이 맞았다. 부친이 돌아가셨다며 그는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었다. 병원에 다녀가신 지 사흘 만이라고 했다. 덕분에 삼우제까지 잘
나는 그 해 봄을 잊지 못한다.내게는 봄이 오면 떠오르는 ‘아픈 추억’ 이 있다.8, 9년 전 응급실 당직을 몇 개월 했었다. 내가 일한 곳은 골절수술과 교통사고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정형외과였다.벚꽃소식이 들려오는 따뜻한 일요일 오후.대기실이 소란하더니 응급실에 여러 명이 들어왔다. 어른 6명, 열 살 정도 어린이 1명, 서너 살 아이 1명으로 기억한다. 차트에 큰 글씨로 TA라고 적혀 있다. TA(Traffic accident)는 교통사고를 말한다. 환자들이 모두 걸어서 왔기에 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뒤차가 서행
엄마, 아빠는 얼굴이 하얬지만 6개월 된 한울이(가명)는 얼굴이 노랬다. 혈중 빌리루빈(담즙 배출과 간 기능을 반영) 수치가 올라 황달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얼굴 색만 달랐지 엄마, 아빠를 닮아 한울이도 생김생김이 참 귀여웠다. 이한울. 연예인과 비슷한 이름이지만 어떤 연예인보다도 귀여운 얼굴. 요모조모 뜯어보면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앙다문 입, 뚜렷하게 잘 자리잡은 코와 귀. 외모가 사랑받을 필수 조건이 아니라는 양심적, 당위적 선언은 빼어난 외모 앞에서 설 자리를 잃으니, 사랑스러운 어린아이 앞에서 여전히 나는 인생 수련이 모자람
노인은 말이 없으셨다. 무언가 말을 하려고 애를 쓰시는 것 같았지만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노인이 꼬깃꼬깃 접은 약포지를 내미셨다. 그 약포지에는 ‘부산 탑 클리닉’이라는 병원명과 내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제야 나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생각이 났다. 6개월 전에 지리산 강청 마을에서 만났던 할아버지였다.개원 1년 차. 의약분업이 시작되어 의료계가 어수선하던 2000년 가을이었다. 소아과를 개원하고 계시던 선배 의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장 원장, 11월 초 주말에 1박2일로
의사 아닌 환자가 된 기분은 낯설고 또 힘겨웠다. 세 시간이나 기다려 내 담당의를 만났건만 그다지 호감가는 인상은 아니었다. 목이 다 늘어난 티셔츠에 다리지 않은 흰 가운을 대충 걸친, 키 작은 흑인 의사였다. 단정하지 않은 용모도 그렇거니와 흑인은 의학보다는 스포츠나 음악이 어울린다는 나의 인종적 편견, 무엇보다 이 사람 귤 냄새를 엄청나게 풍겨 댔다. 나를 만나러 오기 방금 전까지도 먹은 게 분명했다.내게 귤 냄새는 거의 악취에 가깝다. 귤이 왜 싫은지 어떤 정신적 트라우마도 기억에 없어 그 이유가 아직도 미스테리인데, 귤 아니
나는 말린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매달아 놓으면 하루하루 수분이 빠지면서 빠르게 말라버리는 드라이플라워, 말린 꽃이 고운 색종이같이 예쁘다고 하지만 나는 바스락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이 싫다. 그래서 가끔씩 들어오는 꽃다발은 말리지 않고 화병에 꽂아 매일 물을 갈아주고 틈틈이 햇빛도 쬐어주면서 시들어짐을 늦추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면 뿌리 없이 꺾인 꽃인데도 한 달여 남짓을 버텨주는 기특한 꽃줄기들도 있다. 오늘도 화병의 물을 갈아주다가 아직도 생기 있게 싱그러운 꽃잎을 보면서 문득 ‘참 오래도 가네’ 란 생각이 들었다.
봄이 오는가 싶었는데 또 훅 진료실이 더워진다. 요즘엔 봄이 너무 짧다. 벌써 여름이 오려는가…문득 작년 여름에 만났던 G가 떠오른다. G–그를 한 번 본 사람은 그의 특이한 외모를 결코 잊지 못한다. 얼굴도 귀도 마치 해리포터에 나오는 요정 도비랑,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골룸을 합쳐 놓은 듯하다. 사고가 있었던 날 그를 봤던 당직의도, 백병원에서 한 번 그를 봤던 펠로우 선생님도 G를 기억했다.그는 그리고 시선을 잘 맞추지 않는다. 거의 항상 45도 왼쪽 아래를 보고 얘기한다. 나는 산전검진 동안 한 번도
순간 땅이 출렁였다. 중심을 잃었다. 진동은 파도의 물결처럼 계속 몰아쳤다. 건물이 뿌리째 휘청였다. ‘이것이 지진이구나!’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밖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남긴 비명과 땅 울림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일순 사고가 멈추었다. 생각지 못한 일이라 현실감이 없었다.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경고는 들었다. 하지만 현실이 될 거라곤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막연하게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믿어버렸다. 세상의 불운한 사건은 전부 남들 얘기인 줄 알았다. 그러니 이 위험한 곳에 제 발로
희미하지만 느낄 수 있다. 가슴을 눌러 생기는 혈관의 벌떡거림 사이의 이것은 분명히 맥박이다.“잠깐만.”입으로 오더를 쏟아내며 눈은 모니터에 고정하고 손으로 대퇴 동맥이 지나갈 허벅지 안쪽을 짚고 있던 내가 짧은 한마디를 뱉는다. 그 말과 동시에 침상에 올라타 있던 후배가 압박을 멈췄고 땀으로 젖은 그의 시선과 함께 나를 포함한 모든 소생팀의 눈이 일순간 숨죽이며 모니터를 향한다.“돌아왔네.”결과를 확인하기 위한 잠깐의 정적이 끝나자마자 내 입에서는 새로운 오더들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고 소생 구역의 모두는 이내 각자의 역할을 찾아
1.“검사를 받지 않았으면…,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냥 편하게 한 2년 정도 살다가 갈 수 있었지 않았을까?”그 날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엄마에게 뭐 별다른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지금 기억나는 건 엄마는 뭐라도 좀 드셨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날 시킨 그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버리고 나왔다는 것이다. 엄마랑 커피를 마시러 나갔던 그 날은 따사로운 날씨가 절정을 이루던 5월말 어느 저녁이었다. 몇 달 전 나는 엄마가 계속 속이 쓰리다 배가 아프다 이런
머뭇머뭇 지인의 손에 이끌려 상담실 문을 들어선 칠순의 노동자를 만난다. 단정한 옷매무새와 차분한 말투, 오랜 시간을 두고 일터에서 그을려온 이들 특유의 구릿빛 얼굴과 미간을 가로지르는 세월의 주름, 거기에 더하여 뭔가 짐작하기 어려운 무거움과 어두움이 더해진 낯빛을 한 아버지 세대의 노동자와 마주한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노동을 시작했을 그가 아들뻘 직업환경의학과 의사를 찾아온 사연은 무엇일까?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보다는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편히 풀어내도록 해야 한다. 한자리에 머물지 못했던 시선이 조금씩 내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