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인 국립암센터 외과 전임의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겨울의 끝자락, 공기 중에는 어제보다 더 풀어진 햇살이 너울댄다. 며칠 전 출근할 때 입었던 패딩이 이제는 꽤 덥게 느껴져, 집에 돌아오는 5분 사이에 등 언저리가 제법 젖었다. 고된 당직의 흔적을 훌훌 벗어 던지고 샤워를 한 뒤, 몸도 머리도 말끔해진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 한 장을 찢었다. 모처럼 따뜻하고 맑은 주말 오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번화가로 나갔는지 창문 밖은 밤처럼 고요해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이야말로 오랫동안 별렀지만, 막상 하려 들면 정말로 일어나 버릴까 두려워서 숙제처럼 계속 미뤄왔던 일을 해치우기에 딱 좋은 날이다.

나는 오늘 유서를 썼다. 지금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 몰아치는 날에는 내일 눈 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스스로 생을 포기하기엔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을 걱정하는 난 못되지도 착하지도 않은 애매한 성격이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새가 없을 만큼 바쁘게 살고 있기도 하니까. 평균적인 자연사 연령과 비교해 보았을 때 30대 초반의 나는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아직까지 건강검진에서 이상소견이 나온 적도 없고, 병원 바로 뒤에 집이 있어 병원과 집만 왕복하는 출퇴근길은 차도 잘 다니지 않아 늘 평화로웠다.

그렇지만 죽음은 어디에나 있고, 어떤 모습으로 언제 나를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스스로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모두가 죽음을 대비할 수는 없다. 의사결정 권한을 박탈당한 채로 내 인생의 끝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ㅡ까지 생각이 다다른 순간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펜을 들고 앉아 있자니, 이렇게 유언장을 쓰고 생을 정리할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 느껴질 정도로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아무런 준비 없이 내몰려야 했던 환자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중환자실 근무를 하고 있었던 어느 평일 오후였다. 병동 주치의로부터 전화가 걸려왔고, 환자 한명 중환자실로 보내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매우 다급했다. 10여분 후 주치의와 함께 중환자실로 내려온 환자는 40대 중반의 젊은 여자였다. 암으로 인해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뭉개진 좌측 유방에서는 고름이 흐르고 비릿한 악취가 진동했다. 이런 환자들은 바로 수술을 할 수 없어 수술 전 항암화학요법을 통해 수술이 가능한 정도로 암의 크기를 줄인 뒤 수술을 한다. 환자는 일주일 전에 첫 번째 항암치료를 받았고, 대부분의 유방암 환자들이 항암치료 일주일 째 경험하는 골수억제 상태가 되었으며, 그 상태에서 불운하게도 괴사가 진행중인 유방암 병변 때문에 세균성 패혈증에 빠지고 말았다. 팔에 감은 혈압계로는 혈압이 잘 측정되지 않아 퉁퉁 부은 팔에 동맥관을 삽입하여 겨우 측정한 혈압이 70/50이었다. 바로 수액과 승압제를 투약하고, 고열로 의식이 없는 환자에게 기관삽관을 했다. 중환자실에서 쓸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승압제를 최대 용량으로 사용했으나 환자의 수축기 혈압은 80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았다. 나쁜 예감이 스쳤다. 이대로 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혈증의 원인은 너무나 명백했으나 그 원인을 제거할 수 없는 상태였다. 좌측 유방을 전부 잡아먹고도 모자라 우측 유방으로까지 번져 나가고 있는 병변 때문에 심폐소생술도 어려워 보였다. 담당간호사에게 보호자를 불러달라고 하고 병변부위 소독을 하고 있는데 침대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서는 교복 차림의 학생이 보였다. 환자의 유일한 보호자인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환자는 젊어서 남편과 헤어졌고, 형제자매가 있으나 모두 연락하지 않고 지낸 지 오래되었다고 했다. 나는 최대한 쉬운 단어를 사용하려고 애쓰며 환자의 아들에게 현재 상태를 설명했다. 중간의 상황들이 아이에게 전부 전해졌는지 알 수 없었지만,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았다. 견디기 어려운 침묵이 한참 이어졌고 꼭 감아쥔 아이의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였다. 환자에게 연결된 모니터에서는 끊임없이 삶과 죽음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벌어지고 있었고, 그 방향은 죽음 쪽에 훨씬 더 가까워 보였다. 주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아이의 통장 잔고는 150만원, 중환자실에서 며칠만 있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금액이었다. 사회사업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미 최대한의 치료를 하고 있는데도 심장이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겨질 아이를 위해서든 환자를 위해서든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환자의 보호자는 법적으로 의사결정권이 인정되지 않는 미성년자였다. 원내 연명의료팀의 교수님과 코디네이터에게 상의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환자가 의식을 되찾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쓰거나,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환자의 직계가족이 나타나야만 했다. 아이는 매일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채로 혼자 엄마를 찾아와 한참을 쳐다보거나 혹은 울다가 돌아갔지만 달라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중환자실의 모든 사람들이 그 아이를 가엾게 여겼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학교가 끝나고 병원을 찾았을 때 면회시간이 지났어도 면회를 허가해주는 것뿐이었다. 환자는 가끔 눈을 떴지만 알아듣기 힘든 말을 했으며 의식은 흐릿했다. 도저히 스스로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긴 패혈증으로 인해 황달이 생겼고 노랗게 변한 눈에서는 자주 눈물이 흘렀다. 아무리 조혈제를 투약해도 호중구 수치는 오를 줄 몰랐고, 그녀의 활력징후는 매일 롤러코스터를 타듯 잠깐의 호전과 긴 악화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이와 함께 처음 보는 어른들이 한 무리 찾아왔다. 환자의 형제, 자매들이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알 수 없으나 다들 황망한 얼굴이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를 반복하는 그들의 표정은 참담했고, 나는 환자의 상태가 매우 위독하며 심폐소생술을 해야 하는 순간이 곧 올지 모르고 그때를 위해 성인 보호자의 의사결정이 필요한 상황임을 설명했으나, 너무 오랜 시간동안 서로를 잊고 살았던 그들은 여동생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기를 거부했다. 같이 살고 있는 아들은 미성년자라서 할 수 없는 일이 연락이 끊어진 지 10여년이 넘은 사람들에게는 단지 성년이라는 이유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니. 때로 현실은 소설을 능가하는 비참함을 보인다. 그들은 그 후 다시는 병원에 찾아오지 않았고, 나는 깊은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지난한 시간들이 흘러갔고 환자는 몇 번의 고비를 맞았지만 결국 골수억제상태에서 회복되면서 패혈증에서 벗어났으며, 의식을 찾았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3주가량 삽관되어 있던 기관내관을 발관하고 환자가 스스로 숨을 쉬는 것을 확인한 뒤에는 무엇에게라도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환자에게는 살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빌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아이는 엄마를 잃지 않았고 환자는 기관내관을 발관한 다음 날 병동으로 올라갔으며 몇 차례의 항암 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뒤 현재는 처음의 4분의 1정도로 병변이 줄어들었다.

환자는 요즘 환부 소독을 위해 매일같이 외래에서 나를 만난다. 일주일에 두 번은 아들의 손을 잡고 온다. 중환자실에서의 힘들었던 시절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중환자실에서 보던, 자주 눈물을 흘리던 퉁퉁 부은 얼굴보다 그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말하며 맑게 웃는 얼굴이 훨씬 보기 좋았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백 배 나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역시 이 환자에게 닿은 수많은 행운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행운은, 시간을 벌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과 더 많은 추억을 쌓을 시간, 언젠가 혼자가 될 아이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알려줄 시간, 그리고 스스로 삶을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을 말이다.

아직 살아온 날 이뤄놓은 것이 많지 않아 유서라고 해도 별로 쓸 말은 없을 줄 알았는데, 순식간에 그리 작지 않은 노트 한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운 것을 보니 나는 생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나 보다. 죽음을 맞이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만, 그런 기회가 나에게 없을지도 모르니까. 이것은 준비 없이 나와 이별해야 할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누군가와 마찬가지로 예비하지 못한 죽음 앞에 서게 될 나를 위한 일이다. 잉크를 잘 말린 뒤 작게 접어 지갑 안에 넣어 놓았을 때 서쪽으로 난 내 방의 작은 창으로 어느덧 햇살은 방안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 금빛으로 빛나고,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은 다시 흘러 창밖은 지나가는 차 소리와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분주해졌다. 흘러가는 내 시간의 끝이 어디인지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처음 유서를 쓰기 시작했을 때의 두려움은 이제 없다. 언제 올지 모를 죽음을 준비하며 썼던 글은 나를 굉장히 살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내가 앞으로 만나게 될 많은 환자들이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정리해 나갈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평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유서를 썼으면 좋겠다. 언제 그들에게 찾아올지 모를 마지막이 너무 억울하지 않길, 그리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을 준비하며 더 살고 싶어지게 되길 바란다. 남아 있는 생을, 지금보다 더 빛나도록.

<수상소감-조희인 국립암센터 외과 전임의>

의사로 살아온 짧은 날들 중 때때로 잠들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며칠 밤낮을 옆에 붙어 매달렸지만 결국 삶의 끈을 놓아버린 아저씨. 수술 후 열이 올라 칭얼대는 아이를 업고 밤새도록 병동 복도를 서성이던 젊은 엄마. 고된 하루를 마치고 누우면 떠오르는 얼굴들은 잠으로의 도피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글의 주인공인 환자 또한, 꽤 오랫동안 저를 잠못들게 했습니다. 어떤 날은 혈압이 떨어져서, 어떤 날은 아무리 애를 써도 진전이 없는 상태에 가슴이 무겁게 짓눌리는 기분이 들어서였기도 했습니다.

그런 밤에는 토해내듯 뭔가를 썼습니다. 토해낸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저에게 글을 쓰는 것이 굉장히 불수의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모르는 제 안의 어딘가에서 살고 있던 문장이 어느 날 갑자기 물 위로 떠오르는 것처럼 통 튀어오르면, 쓰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 문장을 밖으로 내어 놓을 때까지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게 시끄러운 안을 비워내고 지쳐 잠들면 포기하고 싶었던 마음은 잠잠해져, 다시 일어나 환자에게 갈 수 있었습니다.

글은 결코 쉽지 않았던 외과 4년의 수련을 마칠 수 있게 도와 준 가장 큰 조력자이자, 사실 정말 걷고 싶었지만 끝내 걸을 수 없었던 길이기도 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일이지만 마음처럼 써지지 않아 글 쓰기를 싫어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이 남아, 시끄러운 속을 쏟아내는 글일지언정 잘 쓰고 싶었습니다.

“유서”가 잘 쓴 글이냐고 물으신다면 아마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그래도 솔직한 제가 들어있는 글은 맞기 때문에,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모자란 글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그동안 고생했다는 격려처럼도 느껴져서 뭉클했습니다.

첫 도전에, 부족한 경험과 그보다 더 부족한 문장들이었는데 이렇게 분에 넘치는 상을 주신 심사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더 열심히 진료하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환자에 대해 고민하고 지새웠던 숱한 밤들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 공명하는 의사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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