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의 몇 년 동안, 해외 출장을 참 많이 다녔습니다. 지금보다는 덜했지만 그때도 이미 한국의료가 위기를 맞고 있다는 인식이 존재했고,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나 고령화와 같은 문제들도 그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습니다. 한편에서는 의료의 질 관리, 환자안전, 환자경험과 서비스디자인, 새로운 기술의 활용 등의 이슈가 점점 더 중요해지는 시점이기도 했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먼저 파악하여 독자들에게 전해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기에 다양한 곳을 직접 방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 최고로 손꼽히는 병원들도 여럿 방문했고, 유명한 연구소나 협회들도 꽤 가 보았습니다. 새로운 의료 정책을 도입한 외국의 정부 관계자들도 만났고, 외국의 의사 단체들은 어떻게 운영되며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기회도 있었습니다. 제약회사나 NGO들, 심지어 디자인 관련 회사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고령화에 대처하는 다양한 방법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고 소문난 곳들을 꽤 많이 방문했고, 새로운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컨퍼런스들도 여러 번 참석해 보았습니다. 선진국은 선진국대로, 개발도상국은 개발도상국대로, 각기 비슷하면서도 다른 고민들을 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

당연히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참신한 아이디어들도 많이 발견했고, 최고 수준의 경쟁력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 깨달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부러웠던 것은 끊임없이 창의적인 고민을 하고 혁신적인 실험을 시도하는 분위기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것들을 허용하고 장려하는 각 기관의 리더십과 정부기관의 정책적 뒷받침도 무척이나 부러웠습니다.

기관 방문은 구체적인 내용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좋지만, 아무래도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회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것일 텐데요, 제가 참석한 행사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메이요 클리닉이 주최하는 ‘Transform Symposium’과 클리블랜드 클리닉이 주최하는 ‘Patient Experience: Empathy + Innovation Summit’이었습니다. 둘 다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전자는 ‘혁신’에 방점이 찍혀 있고, 후자는 ‘환자경험’을 좀 더 비중 있게 다룬다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두 개의 컨퍼런스는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형식’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혁신을 주제로 하는 행사이니 진행도 혁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인 형태의 발표는 최소화하는 대신 패널들과 청중들이 함께 토론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더군요.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궁금한 점이 많이 생기는 법이니까요. 보건의료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으려는 노력도 하고, 청중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들을 곳곳에 배치하는 시도도 하더군요.

제가 이들 행사에 참석했을 때, 참가자 수는 300~400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놀라운 것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참가한 나라가 한국이었다는 점입니다. 사실 외국인 참가자가 그리 많지 않았는데, 한국인이 20여 명 정도나 참가했던 것입니다. 의대 교수들도 몇 명 있었지만, 다수는 병원에서 ‘혁신’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들이었습니다. 로체스터나 클리블랜드 모두 직항편이 없는 곳이라 일정도 오래 걸리고, 수천 달러에 달하는 등록비 외에 항공료와 숙박비 등을 고려하면 병원들이 상당히 많은 비용을 투자하는 것이었죠.

효과가 있었을까요? 솔직히 가성비는 꽝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강의가 아니라 토론 위주의 행사라서 언어 장벽은 더 높았고, 의료 시스템이 우리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서 실제로 벤치마킹을 할 만한 내용은 별로 없었습니다. 솔직히 어떤 부분은 우리가 더 창의적이고 실용적으로 잘 대처하고 있다고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병원들은 워낙 ‘없는 살림(?)’에 익숙해져 있어서, 풍요로운 미국 병원들은 엄두도 내지 않는 혁신적(?)인 시도들도 하고 있으니까요.

결국 생각했습니다. 우리 병원들도 혁신에 목말라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남들은 뭘 하고 있는지, 우리만 뭘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그 와중에도 각자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다, 어쩌면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의식이 그와 같은 흐름을 추동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국판’ 병원 혁신 컨퍼런스를 만들자.

그렇게 탄생한 것이 HiPex(Hospital Innovation and Patient Experience)입니다. 첫해인 2014년에는 이틀간 열렸지만, 2015년부터는 사흘간 열리고 있습니다. 매년 6월에 개최하는 것으로 정했지만, 2015년에는 메르스로 인해 3개월 늦게 열렸고, 2020년과 2021년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아예 열리지 못했고, 2022년에는 10월말에야 겨우, 그것도 온라인/오프라인 하이브리드 형태로 열렸습니다. 그러니 다음달 21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HiPex 2023은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열리는 행사입니다.

매년 90여 개 기관에서 250명 내외의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서 혁신의 기운을 서로 주고받는 행사입니다. 외국의 ‘힙한’ 컨퍼런스처럼, 단순한 강의의 연속이 아니라 짧은 발표들과 긴 토론, 그리고 청중이 직접 참여하는 질의응답들로 채워지는 ‘재미있는’ 행사라고 자부합니다. 무대에 오르는 전문가만 41명에 달합니다. 여러 번 참가하신 분들도 많고, 매년 직원들을 보내는 병원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애초의 기대에 비해 ‘의사’ 참가자의 비율이 너무 낮습니다. 저는 최소한 30% 정도는 병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의사들이 참가해 주기를 희망했는데, 첫해에도 그 비율은 25% 정도였고, 지금은 20%를 넘지 못합니다. 가장 큰 장애물이 ‘사흘이나 진료를 빼야 한다’는 사실일 겁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환자를 봐야 하니, 직원들을 대신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이펙스에 더 많은 의사들이 직접 참가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의사들이 병원 혁신의 가장 큰 동력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의사들이야말로 병원 혁신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관련기사: 병원 혁신의 4가지 걸림돌).

학회들은 가시잖아요. 국내 학회도 이틀 정도, 해외 학회는 일주일 정도 시간을 내시잖아요. 벤치마킹을 위해 외국의 병원들도 가시잖아요. 해외 출장보다 훨씬 적은 비용과 길지 않은 시간만 지불하시면 됩니다. 언어 장벽도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나라 병원들에도 벤치마킹할 내용들이 많습니다. 보통은 3개월 전에 일정을 공개하는데요, 임상 의사들의 원활한 스케줄 조정을 위해 앞으로는 더 일찍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참석이 가능하시면 www.hipex.org에서 사전등록해 주시고, 올해는 어렵다 하시면 내년 일정을 미리 잡아 주세요. 2024년에는 6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열립니다. 장소도 명지병원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바뀔 예정입니다.

그런데, 혁신도 어렵지만 혁신에 관한 컨퍼런스 운영도 어려운가 봅니다. 구글링을 해보니, 하이펙스에 영감을 주었던 메이요 클리닉과 클리블랜드 클리닉의 혁신적인 컨퍼런스들은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단된 듯합니다. 하이펙스는 올해 10년째(횟수로는 8회째)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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