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해서 미안해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현재 임신 8개월의 산모이다.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 임부복을 입고 집밖을 나서기만 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건넨다. “배가 많이 나와 힘들겠네.” “몇 개월이나 됐어요?”…배가 남산만한 여자가 하얀 가운을 입고 그것도 ‘산부인과 의사’ 명찰까지 달고 병원을 활보하다 보면 굉장한 볼거리가 되는가 보다. 지나가는 환자도, 원무과 직원도, 심지어 편의점 아르바이트생까지 “배가 큰 것을 보니 고추인가 보네”, “배가 아래로 축 처진 것이 곧 나올 때가 되었나봐.”…모두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늘 만났던 사람처럼, 내게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씩 말을 붙인다.

나는 산모이자 산모를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그런 나는 산모들과 울고 웃으며, 잠깐은 그녀들을 이해했다, 또 잠깐은 그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그녀들을 미워했다, 어떤 날은 그녀들에게 화를 냈다, 또 어떤 날은 그녀들에게 고마워했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녀들과 수없이 많은 감정을 나누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다.

오늘 오전 나는 외래진료실에서 만 45세의 난임 부부를 만났다. 학회로 공석이 된 교수님 대신 나는 시험관시술의 실패를 전달하는 원치 않는 악역을 맡아야 했다. 흉수와 복수가 차는 수십 번의 시험관시술 부작용의 위기를 지나며 마지막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대학병원을 찾은 그녀에게 이번에도 역시 신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았나보다. 안타까운 마음을 막 추스르고 있는 찰나, 진료실 미닫이문이 드르륵하고 열렸다.

막 들어온 두 남녀의 시선이 약속이나 한 듯 불룩 나온 내 배로 동시에 향했다. 부러움과 희망으로 가득 찬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하고 이번 난자채취에 단 하나의 난자도 성공적으로 자라지 못하였다는 말을 전하려니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튀어나온 배를 책상 밑으로 어떻게든 구겨 넣으며 그녀를 어설프게 위로하는 말들로 그렇게 횡설수설 진료를 마쳤다. 문밖을 나서며 “선생님 임신하셨나 봐요, 축하드려요.” 그녀의 마지막 인사가 내 가슴을 아프게 쓸어내렸다. 임신한 산부인과 의사로서 임신을 세상 그 무엇보다 원하지만 임신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만날 때, 같은 여자로서 정말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임신해서 미안해요.” 맴도는 한마디를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하고 그렇게 오전 진료를 마쳤다.

수술에, 회진에, 컨퍼런스에, 늘 그렇듯 바쁜 하루가 지나갔다. 업무 순간순간 배속에서 딸꾹질하는 아이의 움직임을 느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고된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녹아내린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이런 나도 잠깐이지만 임신소식이 없어 애 닳았던 시간이 있었다. 이 글을 빌어 고백하는데, 사실 그 시간동안 나는 산모들을 마음속으로 많이 미워했다. 남들이 하는 건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이기적인 내 욕심 때문이었겠지만,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로서 하루 종일 산모들을 상대하며 위로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 잔인하다고 면피하고 싶다.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왜 신은 아기를 주시지 않는 것일까, 저 여자들은 얼마나 열심히 살았기에 신은 아기를 연이어 주시는 것일까.’ ‘임신’이라는 말만 들어도 우울한 감정이 휘몰아치던 내게, ‘산모’라는 이유만으로 여자로서 그리고 환자로서 대접받으며 인생 최대의 황금기를 누리는 것 같은 그녀들을 진료하는 일은 여간 힘든 감정노동이 아니었다.

그런 나도 막상 산모가 되어보니 비로소 산모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을 해봐야 진짜 산부인과 의사가 되는 것이다’라고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씀 하셨나보다. 왜 항상 옆으로 누워 잘 수밖에 없는지, 왜 항상 뒤뚱뒤뚱 팔자걸음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지...그날 저녁도 예외 없이 때를 놓쳐 컵라면에 물을 붓는 나에게, 장기입원 중인 산모가 다가와 막 지은 듯 따뜻한 밥을 건냈다. “선생님, 임신한 것만으로도 힘드실 텐데 고생이 많으세요. 산모는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데...힘내세요.” 역시 산모를 이해하는 건 남편도, 의사도, 아닌 산모인가 보다.

이런 푸념도 잠시, 갑작스런 응급실 콜 벨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수화기를 놓기 무섭게 퉁퉁 부은 눈의 산모가 분만실로 들어왔다. 불길한 느낌은 늘 틀리는 법이 없다. 그녀의 힘없는 손에 들린 진료의뢰서 속 ‘자궁 내 태아사망’이라는 진단명이 단번에 내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그날 밤 나는 나와 같은 8개월의 산모를 마주해야 했다. 내 배속의 태아는 여지없이 발차기를 하고 있었고, 그녀의 배속에서 태아는 사산된 상태로, 서로 다른 처지의 우리 둘은 그렇게 의사와 환자로 만났다. 오늘 오전 진료실에서처럼, 그녀의 첫 시선도 어김없이 불룩 나온 내 배로 향했고, 나는 피하고 싶은 순간을 또 한 번 직면해야 했다.

잠깐의 시술로 끝나는 초기 유산과 달리 중기 유산은 여러 번의 시술과 긴 과정의 고통이 따른다. 의학적으로 위험성이 크며 정신적으로도 괴로워 의사도, 환자도 힘든 시간이다. 첫 임신인 그녀의 좁은 자궁경부를 넓히는 시술을 3차례 반복한 뒤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사산된 태아가 분만 신호를 보였다.

분만 장으로 서둘러 그녀를 옮기자, 아이러니하게 수술복 밖으로 불룩 튀어나온 내 배가 그녀의 산도 앞을 제일 앞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바쁜 일과와 몽롱한 정신에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있던 때, 문득 배 속에 아기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쁜 것만 보여줘야 하는데, 태교는 못해줄 망정 밤새 끼니도 거르면서 몸을 혹사시키는 것도 모자라 일반인은 볼 수조차 없는 흉측한 사산아의 모습을 함께 봐야 하다니. 그렇게 산모, 그녀의 아기, 나의 아기 셋 모두에게 죄인이 된 듯한 어두운 밤을 보내자 비로소 날이 밝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그녀는 큰 합병증 없이 퇴원할 수 있었다. “선생님 순산하세요. 지난밤에 고마웠어요. 다음에 임신해서 다시 올게요”라며 그녀는 내게 마지막 인사를 건냈다. 나는 어제 오전에 만난 환자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이번에는 용기내서 하기로 했다. 의사이기 이전에 엄마가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같은 여자로서 “임신해서 미안해요”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산모이자 산모를 진료하는 산부인과 의사이다. 그런 나는 산모들과 울고 웃으며, 잠깐은 그녀들을 이해했다, 또 잠깐은 그녀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그녀들을 미워했다, 어떤 날은 그녀들에게 화를 냈다, 또 어떤 날은 그녀들에게 고마워했다, 나와 같은 모습을 한 그녀들과 수없이 많은 감정을 나누며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다.

정말 오랜만에 펜을 들었다.

당직으로 점철된 전공의 생활로 하루하루 지쳐갈 때쯤 '한미수필문학상' 공고가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이성적인 사고, 감정을 억제하는 자세가 강요되는 의사의 삶 속에서 꽁꽁 숨겨왔던 속마음과 생각들을 온전히 공유하고 나니, 종교인은 아니지만 마치 회계받은 것과 같은, 발가벗겨진 것 같으면서도 후련한, 복잡 미묘한 기분이 든다.

육아와 임신, 학위 공부에 병원 근무까지... 주제넘게 벌려놓은 일들로 밤낮을 허덕이는 내게 늘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 양영훈, 예쁜 우리 공주님 양은서, 고맙고 사랑한다.

늘 부족한 딸이자 며느리이지만 항상 자랑스럽다고 해주는 친정식구들과 시부모님, 연이은 두번의 임신으로 업무에 민폐가 될 텐데도 따뜻하게 축하해 주셨던 교수님들과 병원 동료분들께 이 기회를 통해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김없이 씩씩하게 발차기를 하고 있는 배속의 나의 둘째 아이 은순이와 나와 같은 모습으로 하루 하루 자신의 아이를 위해 고군분투 중인 전국의 모든 산모들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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