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영 일신의원 원장

국세청에서 발급받을 서류가 필요해 서재로 들어가 컴퓨터를 켠다. 공인인증서 어쩌구 하는 창이 뜬다. 요즘에 휴대폰으로 결제나 이체를 하면서 인증서 암호라는 걸 넣은 적이 있었나 싶다. 예상대로 인증서는 갱신 기한이 만료된 상태였다. 재발급을 받으려 은행 홈페이지를 연다. 통장은 찾았는데 서랍을 다 뒤집어도 보안 카드라는 놈이 당최 보이질 않는다. 급기야 책장의 책들을 하나씩 꺼내 탈탈 털어보는 상황에 이르렀다. 책을 읽다 중간에 덮을 때 주변의 아무거나 책갈피로 끼워 넣는 나의 습관 때문이었다. 이런 게 여기 왜 들어갔을까 싶은 공중전화 카드도, 만 원짜리 지폐도, 심지어 말라버린 낙엽도 떨어지는데 그것만 없다. 한참 책을 털다가 애꿎은 국세청 욕을 할 때쯤, 익숙했지만 낯설어진 노트를 발견했다. 오래 전의 일기장이었다. 가죽 표지인줄 알고 비싸게 샀던 건데 그새 이렇게 헐어 버리다니, 가죽 흉내를 낸 비닐이었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보안 카드는 머리에서도 사라지고, 어느새 낡은 표지만큼의 낡은 시간을 거슬러 오른다.

1999년, 나는 인턴이었다. 면허증에 찍힌 복지부 장관 직인이 채 마르지도 않았을 풋내기 시절에 빠져들다가 그 해 어느 봄날의 일기에서 멈춰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잊으려 했지만 잊혀지지 않던 그 일이 희미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내 팔자에 무슨.
잠에 막 빠져드는 순간에 여지없이 삐삐가 울린다. 병동이다. 머리를 쥐어 뜯으며 책상으로 기어가 전화기를 더듬었다. 3년차 선생님이 ‘어, 와.’ 그러고 끊는다. 병동에 올라 갔다. 역시 그 꼬마였다. 백혈병으로 골수 이식을 받고 이식 병동에 있던 아이였는데 어제부터 열이 났었다. 폐렴이 심해졌고 아직 쌀쌀한 4월의 깊은 새벽에 결국 숨이 넘어가 기도에 관을 넣어야 했다. 치프 레지던트가 날 부른 이유는 병원에 남은 인공 호흡기가 한 개도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심한 호흡 부전이 와서 일단 기도에 튜브는 넣었는데 소아용은 물론 성인용 인공 호흡기까지 전부 사용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나. 사람이 인공 호흡기 역할을 하는 수밖에.

기계를 대신해 공기 주머니를 손으로 쥐어 짜 숨을 불어 넣는 작업은 당연히 소아과 당직 인턴인 나의 몫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 인공 호흡기가 섭외되든지 교대해줄 누군가가 오지 않으면 절대 끝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 3시쯤 시작된 그 일은 벌써 6시를 넘기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 공기 주머니를 짜고 있으려니 손이 저리다 못해 팔의 감각도 사라지는 것 같았는데 그보다 더 힘든 건 무섭게 내려오는 눈꺼풀과 싸우는 일이었다. 팔뚝과 손에 힘을 주면 공기 주머니가 쭈그러들고 곧 녀석의 작은 가슴이 갸르릉 하며 살며시 부풀어 오르는 일련의 과정이 끝도 없이 되풀이되면서 ‘내가 지금 이걸 왜 손에 쥐고 있지?’라는, 각성을 위한 반복적 자문조차 가물가물해지고 있는데 회진을 준비하던 2년차 선생님이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잘 해라. 너 졸면 얘 죽는 거야."

이런 젠장. 눈을 부릅뜨느라 이마에 힘을 잔뜩 주는데 그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다 원망스럽다.
왜 이 녀석은 백혈병에 걸렸는가. 왜 별일 없이 지나가지 못하고 폐렴이 왔는가. 왜 이 새벽에 숨이 차서 기도 삽관까지 하게 만드는가. 왜 하필 내가 당직인 오늘, 이 큰 병원에 남아 있는 인공 호흡기가 단 한대도 없는가. 도대체 왜 왜 왜!!!

결국 회진 준비까지 동료에게 맡기고 소처럼 꾸준히 앰부를 짜고 또 짰다. 다른 인턴이 손을 바꿔줘도 되었지만 우리들의 하루 중 가장 정신 없는 시간이 아침 회진 전후였기 때문에 교대하느라 번거로울 바엔 그냥 깔끔하게 나 혼자 그러고 있는 편이 나았다.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몇 시간이 더 지나 회진이 끝나고 마침내 나를 구해줄 동료가 왔다. 팔은 물론 뇌까지 마비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한 시간 정도 눈을 붙였고, 그렇게 기절했다가 깨어났더니 몇 년 동안 잠이 들었던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맡겼던 삐삐를 찾아 다시 콜을 받으며 병원 이곳 저곳을 돌아 다니다 보니 어느덧 저녁이 되었고 밤이 왔고 새벽을 맞았다. 입원 환자 명단을 정리하려고 의국 컴퓨터 앞에 앉아서야 비로소 녀석이 떠올랐고 마침 옆에 있던 동기에게 물었다.

"새벽에 Intubation(기도 삽관) 했던 그 애 아직도 Ventilator(인공 호흡기) 못 구했어?”

"아니 아까 오후에 달던데.”

"다행이네."

그 순간 ‘다행’이라는 단어는 ‘그럼 오늘은 어제처럼 밤새지 않아도 되겠구나’라는 얄팍한 안도감에서 나온 말이었지만 그건 어쨌든 녀석에게도 다행이었다. 아이는 이후로 빠르게 회복이 되었고 내가 밥을 채 열 번도 챙겨 먹기 전에 호흡기를 떼고 튜브를 뽑았다. 그러곤 중환자실에서 이식 병동으로 다시 돌아갔다.

내가 소속된 파트가 아니라 회진 때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인턴이 콜을 받고 병동에 갈 일은 차고 넘쳤으니 나날이 좋아지는 녀석을 목격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던 아이가 몇 일 후엔 앉아서 나를 기다렸고, 소독약을 바르면서 간지럽거나 아프지 않냐고 물으면 고개를 움직이며 대답을 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나중에 커서 진짜 화가가 되면 더 큰 종이에 더 신나게 그림을 그릴거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언젠가부터 녀석은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여섯 살 아이였으니 나와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났는데도 그랬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눈썹까지 내려 쓴 모자와 코와 입을 전부 가리고도 남을 마스크 때문에 얼굴에서 보여지는 건 겨우 눈밖에 없었는데, 그 눈이 늘 웃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기계에 의지해 간신히 살아 있던 몸을 다시 일으켜 이제 마음껏 먹고 숨쉬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웃을 만했다. 그러니 굳이 오빠라고 부르는 이유까지 묻지 않아도 또 듣지 않아도 난 결코 아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녀석 덕분에 이식 병동에서 오는 콜은 늘 설렜다. 먹고 자는 것조차 사치였던 그 구질구질한 시절의 나를 '쌤'이나 '아저씨'나 ‘어이’나 ‘여기요’가 아닌 '오빠'라고 불러줄 사람이 병원 천지에 대체 누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설레던 어느 날, 주사 꽂아 놓은 자리를 소독해주러 갔는데 웬일인지 아무 말이 없었다. ‘오늘은 이 녀석 컨디션이 별로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다른 날과 달리 목에 손수건을 감고 있었으니 어쩌면 감기 기운이 있는 건가도 싶었다. 드레싱을 끝내고 조용히 나오려는데 녀석이 손짓을 하곤 뭘 하나 내민다. 편지였다. 공책만한 흰 종이에 내 얼굴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었고 그 아래에 ‘오빠, 고맙습니다’라고 써 있었다. 올망졸망 귀엽게 줄을 맞춘 몇 개의 글자들을 내려다보며 “야 너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더니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애가 벌써 한글도 쓰고” 같은 시답잖은 소릴 하고 있는데 주책맞은 내 눈이 예고도 없이 뻑뻑해졌다. 고맙단 말은커녕 고개도 못 들고 어물어물 하다 마침 울어준 삐삐를 꺼내며 서둘러 방을 나왔다.

또 다시 온 병원을 돌아다니다 피곤에 절은 몸으로 숙소에 들어온 새벽. 그제서야 겨우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고 가운 주머니에 하루 종일 들어 있던 편지를 꺼냈다. 그러곤 나를 그린 그림을, 내게 쓴 글씨를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가운도 벗지 못하고 쓰러져 있던 나를 아침이 오기도 전에 깨운 건 당연히 삐삐였다. 눈이 떠지지 않아 그 망할 기계를 손에 쥐고 미친놈마냥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마침 방에 들어왔던 룸메이트가 침대를 발로 찬다.

“야 니 오늘 오프라매. 정신 채리라. 바라 콜 또 온다 니.”

어느새 달력은 5월로 넘어가 있었고 그날은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어린이날이라는 것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오프가 걸렸다면 얘기가 전혀 달랐다. 보통 휴일 오프의 경우 오전 회진을 마치면 다음날 아침까지 무려 18시간 동안 자유의 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거의 한달 만에 인턴 숙소의 이층 침대를 벗어나 집에 간다는 생각에 뛸 듯이 일어났다.

회진을 어떻게 끝냈는지도 모를 들뜬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지만 결과는 충분히 예상한대로였다. 나는 산후 조리하러 친정에 온 딸마냥 손 하나 까딱 않고 최선을 다해 늘어졌다.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하루가 원래 이렇게 짧은 거였나'라며 투덜대다 다음날 새벽 출근을 위해 짐을 챙기던 늦은 밤, 가방에서 녀석의 편지를 발견했다.

완벽하게 잊혀졌던 기억이 그제서야 다시 돌아와 내 멍청한 뇌를 때렸다. ‘어린이날에 선물이라도 해줘야겠네’라며 챙겨두었던 편지. 하지만 어린이날은 이미 한달 만의 산후 조리로 증발해 버린 터였고, 편지는 다시 가방에 던져졌다.

다음날 아침 회진이 끝나자마자 병원 근처를 뒤져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사고 포장을 했다. '얼른 나아서 오빠 얼굴 또 그려줘'라는 유치한 편지를 넣느라 포장을 풀었다가 다시 싸맸다. 몇 개의 콜을 받으면서도 기어코 이식 병동에 도착했고 소독을 하고 가운을 갈아 입었다. 다른 날보다 더 설렌 맘으로 뛰느라 헐떡이던 숨이 마스크 틈으로 새어 나온다. 선물을 뒤로 감추고 병실 문을 열며 녀석의 웃는 눈을 잠시 떠올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없다. 침대 시트도 말끔하다. 방을 옮겼나 보다. 스테이션에 나와 간호사에게 물었다.

"OO이 얼루 옮겼어요?"

"어머, 선생님… 혹시 어제 오프였어요?”

녀석은 내가 오프를 받아 집에 갔던 날 밤에 사망했다고 했다. 주치의 말로는 패혈성 쇼크일거라 했단다. 4월의 그 새벽처럼 폐렴이 악화되면서 호흡 부전이 왔고 그래서 다시 튜브를 넣고 호흡기를 걸고 약을 때려 붓고 별 짓을 다 했지만 그때처럼 좋아지지는 않았다고 했다. 녀석은 그렇게 거짓말처럼 가버렸다. 새벽부터 불러내 팔이 마비되도록 밤새 앰부를 짜게 만들었다고 원망했던 그날의 미안함이 아직 고스란히 내 마음에 남았는데, 그래서 웃고 있다고 믿은 그 눈을 보며 ‘나도 참 고마워’라고 말하면 그 빚을 조금은 갚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 한번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고 녀석은 내게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왔다. 수취 불가가 되어버린 선물이 여전히 손에 들려 있었다. 가운 속에 숨겨진 채 병원을 돌아다니느라 여기저기 찌그러진 포장이 마치 내 모습 같았다. 폭풍처럼 밀려드는 흡연 욕구 속에 몇 개의 콜을 뭉개다가 겨우 숙소를 나섰다. 그러곤 끝을 알 수 없는 하루가 언제나처럼 쉼 없이 몰아쳤다. 아니 어쩌면 잠깐의 딴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죽도록 바쁘게 흘러버리길 내가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20세기의 끝자락에 숨겨놨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너무 바빠서 바쁘다고 징징댈 시간조차 없다며 죽는 소리를 해댔지만 정작 제대로 서둘렀어야 할 일에 바보같이 느려터졌던 이 먹먹함은 20년이 지나며 낡아 버린 일기장처럼 희미해졌다.

무뎌질 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지금도 여전히 바쁘다. 스물여섯의 어설픈 시절엔 상상하지도 못했던 희한한 일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와 다양한 형태로 나를 바쁘게 한다. 무엇 때문에 바쁜지, 제대로 바쁜 건 맞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던 그날의 일기에 아직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는데 빠른 시간은 바쁜 나를 항상 앞선다. 어느덧 깊어진 밤에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참 만에 되살린 기억은 희미했지만 기억 속 내 모습은 그래서 낯설지가 않다.

당장 답을 얻을 욕심은 없다. 죽기 전엔 대답할 수 있을까 싶은 부담스런 질문을 던진 자신을 가끔 이렇게 탓하며, 여태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살아가겠지. 혹시 허락된다면, 날 기다려주지 못할 누군가를 바쁘다는 핑계로 또 놓쳐버리지 않기만 그저 바랄 뿐이다. 잊거나 바빠서 만료된 공인 인증서는 어떻게든 재발급 받으면 그만이지만, 그렇게 만료되어 버린 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어찌 할 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저나 이놈의 보안 카드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기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형태가 달라지곤 합니다. 사건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느낌이 새로워 지기도 하고 심지어 내용이 수정되기도 하죠. 그 중에서 가장 희한한 일은 잊고 싶은 기억이 죽어도 사라지지 않거나, 잊지 말아야 할 기억이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아파서 사라졌으면 하는 기억이 때론 더욱 또렷해지고, 기쁘고 행복해서 오래도록 선명하길 바랬던 기억은 오히려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애써도 잊혀지지 않던 기억이 어느 날 희미해졌음을 깨달았을 때 느낀 감정은 그래서 참 복잡합니다. 힘든 기억도 시간이 지나 이렇게 무뎌졌구나 싶어 다행스럽기도 하고, 그 큰 기억이 잊혀질 정도의 다양한 사건들이 그 동안 끊임없이 나를 덮쳤구나 하는 생각에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며 어쩔 수 없이 약해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막연한 연민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20년 전에 써놓은 일기는 지금의 이런 복잡한 감정들을 위한 밑그림이었는지도 모르죠.

저에게서 잊혀지던 기억을 되살려 한편의 글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만들어주신 한미수필문학상 관계자들께 감사 드립니다. 할말도 별로 없는데 수상 소감 쓰느라 머리를 쥐어 뜯은 오늘의 기억은 또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 남아 있을지 궁금하지만 그건 뭐 그때 가보면 알겠죠. 잊고 싶지 않은 것들에 집착하기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자주 꺼내보며 오래도록 보듬고 기억하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

어줍잖은 제 글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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