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경고 하듯이, P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내게 말하였다.“내가 먹고 토하는 건, 선생님이 생각하는 단순한 다이어트 강박 때문이 아니에요.”나는 식이장애 환자들의 날 선 태도에 꽤나 익숙한 편이었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P의 얼굴에는 예사롭지 않은 저항감이 서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식이장애를 단지 지나친 다이어트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식이장애는 트라우마의 용광로라고 할 만큼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상처들과 연관이 깊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P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먼저 폭식 구토 증상을 완화시킨 뒤에 다른 복잡한 문제
어릴 때 나는 전쟁영화를 참 좋아했다. 선악의 구도가 명확했고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어린 나에게는 멋져 보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선과 악의 모호함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하지만 철이 들면서 명확해 보였던 선악의 구도가 모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 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떤 이에게는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선의를 가지고 행한 것이 악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전쟁영화를 즐겨보지 않게 되었다.의사가 되어서 전공과목을 정해야 하던 인턴시기에 나는 외과가 참 멋있어 보였
병원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간이역이라고 한다면, 그 입구는 응급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와선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곤 했다. 역 입구는 운명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인해 소란이 늘 끊이지 않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응급실에 와보니 응급의학과 선생님은 한쪽에선 사고를 당해 피를 흘리고 있는 환자를 처치하고 다른 쪽에선 심장 정지 환자를 심폐소생술 한다고 정신없었다. 나는 그 난장판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도착한 곳은 응급실 접수처. 어떤 남자가 잔뜩 화가 난 상태로 고함을 치고 있었다.“이건 다 산부인과 진료
“Hello? good morning nurse. nice to meet you.""Good morning doctor? I am student nurse innu marhajan."“I'm doctor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외곽에 있는 마을 벅터푸르의 아침, 도시빈민들을 위한 의료캠프 첫날, 나는 진료를 도와줄 네팔 간호대학 학생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한국말로 하셔도 됩니다.” 옆에 있던 현지인이 갑자기 한국말을 한다. 통역을 해줄 팀원이란다.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오! 안녕하세요? 한국말 잘하네요?
1."선생님, 어제 사망진단서 세장이나 작성하셨네요. 고생하셨습니다."아침 컨퍼런스에서 충혈 된 눈으로 전날 환자들을 말한다. 세 번 사망 선언하고, 사망진단서세장에 서명해야만 하는 상황을 담담히 말씀하신다. 낮 시간에 작업 도중 높은 건물에서 추락한 환자, 스스로 목숨 끊은 환자. 마지막 사망진단서는 새벽 1시에 한 생명을 마무리하는 도장이 찍혀나갔다. 오토바이 사고로 가슴, 배에 피가 나 수술 중 환자가 못 버티고 사망한 환자. 총 세 장 사망진단서에 면허번호와 사망 선언한 의사 서명이 적혀나갔다.나도 지금껏 수없이 많은 사망진
퇴근 후, 너른 백화점 안에서 여러 번 길을 헤매다 결국 안내도를 보고서야 유아동 코너를 찾을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분유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나풀대는 작은 옷들이 주변에 수없이 널려 있었다. 잠시 머뭇대다 가장 가까이 있는 매장으로 들어갔다. 웃는 낯의 직원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선물, 이라고 입을 떼자마자 질문이 이어졌다. “지금 애기가 몇 개월이죠?”“36주 4일이요.”“아, 애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건가요?”“아뇨, 애기가 미숙아예요.”“어머, 그러시구나. 애기 엄마가 걱정이 많으시겠네요.”호들갑을 떠는 중년의 직원에게
한 통곡이 끝나면 새 울부짖음이 이어지는 정적 같은 시간이었다. 해안가 그물에 칭칭 걸린 채 아무런 미동도 없이 모래 위에 박혀 있는 거북이 사체를 본 순간. 저녁에 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뉴스를 보았다. 제주도 비양도 인근 해안가에서 죽은 지 15일 정도 지난 것으로 파악된 푸른 바다거북이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거였다. 멸종위기에 처한 바다거북이의 보호가 절실하다는 뉴스였다. 바닷가에 어지럽게 버려진 어획도구들, 여러 가지 덫이나 올가미, 주낙 자망 등에 걸린 거북이들에게 절망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는
수술장 상담실 앞에 잠시 멈춰 서서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상담실 문을 열면 아이 엄마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아이의 수술이 시작된 지 벌써 세 시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문 너머 엄마의 표정이 문을 열지 않았는데도 눈앞에 훤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마음을 다잡아야만 했다. 긴장의 끈을 놓았다가는 내가 먼저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한 달 전 외래에서 처음 마주친 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의 훤칠한 키와 떡 벌어진 어깨는 여느 장정 못지 않았지만 마스크 너머 드러난 앳된 얼굴은 아
심장이 뛴다. 어른의 심장보다도 빠르게, 갓 태어난 불그죽죽하고 끈적한 작은 아기는 자신의 첫 목소리를 내뱉으며 ‘내가 태어났다.’고 세상에 알린다. 나는 작디작은 강한 움직임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 빠른 심장소리를. 성인 평균 심박수 60회보다 두 배는 빠르게 작은 심장이 뛴다. 어찌나 경이로운지, 또 한 사람의 삶이 시작되는 신호다.내가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한 이유는 어쩌면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어설프고 하찮게 느껴질 수 있다. 아이들이 좋았다. 나아서 집으로 가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는 많았다. 학생 실습시간에
‘속 장갑, 가운, 신발 덮개, N95 마스크, 고글, 후드, 겉 장갑….’나는 level D 방호복을 입으면서 병동에 비치된 착용 방법 포스터를 읽고 또 읽었다. 이미 여러 번 입어본 방호복이었지만 그날따라 순서가 틀릴까 노심초사했다. 마스크를 누른 채 숨을 쉬어 보면서 혹시나 공기가 새는 틈이 있는지 몇 번씩 확인했다.'이것만이 나를 지켜줄 수 있다.'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계속해서 되뇌었다. 착용을 마치자 이내 갈 곳을 잃은 몸의 열기가 방호복 안을 맴돌기 시작했다. 더위를 느끼면서 방호복을 제대로 입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L
“무슨 일을 하세요?”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흔히 듣게 되는 이 질문을 들으면 나는 조금 곤혹스러워진다. 도대체 내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전에 병원에서 일할 때는 “정신과 의사입니다”라고 하면 대개는 듣는 사람 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새로운 직장에서 일하게 된 후, 지금까지 여러 개의 답변을 시도해보았지만, 만족스럽게 전달된 적은 거의 없다. 지금의 나는 처방권도 없고, 진료도 보지 않아 의사라고 답하기가 어렵다. “군인입니다”와 “임기제 공무원입니다”도 시도해보았으나 그러면 부연설명이 더 길어지게 된다. 병역판정전
말기 간질환, 심장질환, 폐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나 투석을 받고 있는 만성신부전 환자들에게는 뇌사자 장기이식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중환자실에서 신음하던 이런 분들이 장기이식을 받고 일이주일 만에 건강해진 몸으로 웃으며 걸어서 퇴원하는 것을 보는 것은 의사로서 큰 보람이고 마치 마술이나 기적을 보는 것 같다. 이식을 받고 병상에서 엄지척을 하고 로또 일등에 당첨된 것보다도 이제는 살게 되어 더 기쁘다는 환자도 있었다. 나는 이제까지 이십년 동안 뇌사가 의심되는 환자의 보호자 분들을 만나서 뇌사 상태와 장기기증의 절차에 대해서 설명
아기가 왔다. 소아과가 없는 우리병원에선 어린 환자를 보는 일이 드물기에, 아기가 오면 다들 “어머 깜찍하다, 귀엽네”라며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런데 병원문을 열고 유모차에 비스듬히 기댄 채 들어선 그 아기에겐 달랐다. 모든 사람의 표정은 일순간 굳었고, 입은 벌어졌지만, 그 속에선 침묵만이 쏟아졌다. 진료실 안까지 들릴 정도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여윈 몸에 비해 무거워 보이는 털옷을 걸친 아이의 목에서 작은 관(管)이 보였기 때문이다. 하얗고 가느다란 아기의 목 앞으로 삐죽 튀어나온 그것은 T-tube(기관절개관)
법으로 분명하게 금지하고 있었다. 형량도 꽤 셌다. 아마도 불법 장기적출을 생각하며 만든 법일 것이다. 장기이식법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적출할 수 있는 장기’를 정의하였는데, ‘신장은 정상인 것 2개 중 1개’, ‘간장, 골수의 일부’ 만 포함되어 있을 뿐, ‘폐’는 해당하지 않았다. 이를 어기고,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적출할 수 없는 장기 등을 적출한 자’ 는 ‘무기징역 또는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며, 적출하여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한 자는 사형,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라고 시행령으로 명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