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마음 정신건강의학과의원 김준기 원장

마치 경고 하듯이, P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내게 말하였다.

“내가 먹고 토하는 건, 선생님이 생각하는 단순한 다이어트 강박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식이장애 환자들의 날 선 태도에 꽤나 익숙한 편이었지만, 처음 만난 날부터 P의 얼굴에는 예사롭지 않은 저항감이 서려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식이장애를 단지 지나친 다이어트의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지만, 사실 식이장애는 트라우마의 용광로라고 할 만큼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상처들과 연관이 깊다. 그래서 나는 순순히 P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먼저 폭식 구토 증상을 완화시킨 뒤에 다른 복잡한 문제들도 다루어가자고 부드럽게 제안하였다. 하지만 P는 내 눈을 차갑게 응시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글쎄요? 과연 선생님이 내가 겪었던 일들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P는 일곱 살 때부터 무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이 살던 아파트 경비에게 거의 매일 같이 성폭행을 당했다. 이 끔찍한 사건을 다루는 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성폭행 사건은 P가 겪은 트라우마의 시작점에 불과했다. 이후 상담의 초점이 가족 내에서 일어난 터무니 없는 방임과 학대로 옮겨가자 P의 감정 기복은 더욱 널뛰었다. 성폭행 사건을 인지한 뒤에도 어린 딸의 상처를 보듬지 않았던 1차 양육자, 즉 부모에 대한 분노가 훨씬 더 강렬했기 때문이다. P의 어머니는 극심한 분노를 표출하는 P 앞에서는 쩔쩔매며 달래주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작 내 앞에서는 도대체 얘가 왜 저렇게 유난을 떠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딸이 오랫동안 겪어 온 좌절과 분노의 감정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것이 가장 강력한 치료가 될 수 있다고 하면, P의 어머니는 그냥 딸 아이가 먹고 토하지나 않게 약이나 처방해달라고 하였다. P의 어머니는 딸의 아픔을 보듬고 연민의 감정을 가질 만큼 마음의 여유와 온기를 갖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 역시 아픈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삶에 늘 벅찬 상태였으니 말이다. 어머니를 설득하려 할 때마다 난 거대한 차돌 덩이를 끌어안는 느낌을 받았다. 싸늘하게 닫힌 그 느낌에 닿을 때마다 내 마음도 싸늘하게 닫혀갔다. “모성은 본능인데, 그 본능이 애초부터 따뜻한 색이 아니고 차가운 색이라고 한다면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릇 자기애적 엄마(narcissistic mother)는 모든 정신과 의사들의 기피 대상이다. 점점 답답함과 무기력감이 커진 난 어머니와의 만남을 은밀히 회피하고 있었다. 누가 역전이(counter transference)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외과 의사도 자신이 할 수 없는 수술은 못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내가 무슨 도사도 아니고!” 창피함을 숨기기 위해 난 내 감정의 정당함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고가 터졌다. 우연히도 P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문이 적혀있는 일기장을 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 저 아이는 자기의 잘못을 모릅니다. 게다가 욕심도 끝이 없는 아이입니다. 저는 지금 너무 힘들어요. 제발 저 아이가 회개하게 도와주세요.”

사과하며 달래주던 겉모습과는 전혀 다른 진짜 속내, 딸에 대한 연민보다는 자신의 억울함이 더 소중한 어머니의 본심! P는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한 배신감과 참담함을 맛보았으리라. 그 이후 P는 폭식과 구토는 물론이고, 어머니에 대한 폭언과 폭행까지 심해졌다. 심각한 자해 시도도 서슴지 않았다. 한번은 유서를 품고 진짜 끝장을 내려 한강 다리 위로 달려갔다가 마침 그곳을 순찰 중이던 잠복 경찰에게 발견되어 겨우 살아남은 적도 있었다.

어느 정도 심정이 이해는 되지만, 지나친 분노 폭발과 자해는 문제 해결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현실적인 설득은 P의 분노심에 휘발유를 붓는 꼴이 될 뿐이었다. 어머니 역시 상처가 많아서 그런 것이니 어머니를 바꾸려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면 어떻겠느냐는 어설픈 조언을 듣고 간 날 밤에는 P의 자해가 더 심각해졌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이성적 접근이 무엇이지?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과학적인 개입일까? 정신과 치료에 과연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건가? 치료자로서 혼란과 낭패감을 겪고 있는 동안, P의 자기파괴적 행동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고, 결국 나도 한계치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P의 목에 선명하게 찍혀있던 목맨 자국을 보았을 때는 당장 입원해야 한다는 말이 목젖까지 거의 올라왔었다. 그러나 입원이라는 말을 입에서 내뱉자마자 P는 내게도 강한 배신감과 분노를 토해낼 것이 뻔했다. “치료자마저 자신을 버린다고 받아들이겠지? 성가시고 까다롭다고 환자를 내친다면 엄마와 뭐가 다를 게 있냐며 또 따지겠지?” 가까스로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내 표정과 몸짓은 무력감과 두려움을 숨기지 못했다. 떨떠름한 내 표정과 어정쩡한 내 몸짓을 눈치챈 P는 더욱 강하게 쏘아붙였다.

“선생님도 내가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죠? 선생님은 해줄 것이 없고, 엄마는 이제 잘못이 없고, 결국 지금은 나만 미친년인 셈이네. 또 입원해야 한다는 말이나 하고 싶은 거죠?”

들킨 속내를 감추려 허술한 변명을 할수록 P는 더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P의 적개심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 이미 방어 능력이 없는 날 물어뜯듯이 다그쳤다. 마치 당신이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보자는 듯이 P는 자신의 몸에 더 깊게 상처를 냈다. “그녀의 분노하는 마음에 공감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그녀의 위험한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 하는 건가? 그녀의 엄마를 다시 적극적으로 만나야 하나? 치료를 잠시 중단하자고 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인가? 지금 이 순간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그녀의 치료과정은 모든 것이 불확실하였다. 그저 무력감에 압도되지 않도록 먼저 나 자신을 진정시키면서, P의 분노가 수그러들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신박한 대처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녀의 독기를 다 뽑아내려 하다가 오히려 그녀의 독기에 내 정신줄이 간당거리는 꼴이 되어버렸다. 어쩌다 그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상담을 못 온 날에는 하루종일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렇게 P와 나의 치료관계는 외줄을 타듯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 P와 나의 아슬아슬한 치료관계가 끊기지 않고 지속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순간을 나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일기장 사건 이후 서너 달쯤 지났을 때의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이었다. 갑작스럽게 핸드폰 액정에 P의 어머니 이름이 보였다. 한숨부터 새어 나왔지만, 잠시 갈등하다가 핸드폰을 받았다.

“선생님, 얘가 또 별것도 아닌 일로 자해를 해서 응급실에 왔어요. 게다가 심근경색까지 의심된다며 여기 의사가 당장 입원시켜야 한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의 심드렁한 목소리 너머로 P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도 입원은 안 하겠다며 발악하는 울음소리! 순간, 연휴의 나른함에 취해 있던 내 머릿속에서는 비상벨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심혈관계가 튼튼한 20대 여성에게 심근경색이 발생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런데도 그 희박하다는 심근경색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절정에 다다른 P의 분노와 절망감이 실제로 자신의 심장을 찌른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응급실에서 바로 입원하는 것이 P의 안전에도 최선이었고, 나 또한 남은 추석 연휴를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P는 분명 입원을 거절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그냥 집에 돌아가 경과를 지켜보자고 하는 것도 여러 정황상 위험천만한 응급 상황!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다급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적절한 해법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시간이라도 조금 벌어보자는 심정으로 P의 어머니에게 P를 내 진료실로 데리고 오라고 전했다. 내가 직접 입원 치료를 설득해야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난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진료실로 향했다. 보나 마나 여느 때와 같이 P가 분노발작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 예측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지만.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P를 입원시켜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P는 마치 유령처럼 축 처져서, 싸늘한 얼굴을 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침묵하며 앉아있던 P는 작심한 듯, 희미하게 입을 열었다. 웅얼거리는 소리라 잘 들리지 않았지만, 요점은 명확했다. 어머니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악을 쓰는 것이 자신의 문제라고 한다면, 차라리 죽는 쪽을 선택하겠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건 최후통첩과도 같았다. 괜한 과장이나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어설프게 입원을 권유하는 말을 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긴박한 상황이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쿵쾅거리는 내 심장 소리만 크게 들렸다. 그런 날 P는 싸늘하게 바라보았다. P의 눈빛은 마치 “어때요? 선생님도 더는 날 말릴 재간이 없죠?”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든 어머니를 치료해볼게.”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나는 얼떨결에 허튼소리를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쉽게 변할 것 같지 않으니 먼저 네가 변하는 것이 우리의 치료 목표”라고 그동안 수십 번도 넘게 P에게 말해왔는데. 이제 와서 딴소리? 자신이 가장 억울하다는 P의 어머니를 대체 무슨 수로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서 순간적으로 나온, 그녀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허망한 공약이었을 뿐이다. P는 한참을 조용히 앉아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늦게 P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말도 안 되는 말 쥐어 짜내느라 애쓰셨어요. 하지만 고마워요. 절 포기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해할께요.”

난 지금도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얼떨결에 말해버린 그 허망한 공약 덕분에, P와 나 사이에 비교적 탄탄한 라포(rapport)가 만들어졌다고 믿고 있다. 이후 우리의 치료적 만남은 무려 20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P가 갑작스레 내게 물었다.

“선생님 저 참 오래 다녔죠? 이러다가 저 환갑 되겠어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언제부터 선생님이 정말 내 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요?” 자동적으로 내 머릿속엔 그 추석 연휴의 마지막 날이 떠올랐지만, 난 짐짓 모른 척했다. 그러자 P는 전혀 예상 밖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추석 연휴 사건이 터지고 나서 한 달쯤 뒤, P의 남자친구가 날 찾아온 적이 있었다. P의 남자친구는 P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만, 가족이나 친구들로부터 헤어지라는 종용을 강하게 받아 혼란스럽다고 했다. ‘트라우마는 평생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성격장애는 절대 치료할 수 없다’, ‘정신병은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등의 매우 상식적이지만 동시에 매우 편파적인 조언에 그의 지순한 사랑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결단을 내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날 만나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 그 남자친구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자 P가 먼저 말을 이어갔다. “선생님, 그 남자랑은 결국 인연이 거기까지였어요. 그런데 나중에 헤어질 때 그 남자가 선생님에게 들은 말을 전해주었어요. 선생님이 해준 말 때문에 저랑 헤어지기가 정말 괴로웠다고 하면서요. (.......) 그때 무슨 말하셨는지 기억나세요? (.......) 실망이네! (.......) 하긴 20년이 다 되어가니 (......) 그래도 잘 기억하고 계셔야 해요. 그래야 또 저 같은 사람을 도울 수 있죠.”

P가 들려준 말에 의하면 그때 나는 그 남자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헤어질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결정은 결국 당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에 달린 문제입니다. 내가 그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우울증이나 성격장애 같은 진단명을 붙이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일 뿐입니다. 겨우 살아남았지만 어쩔 수 없이 후유증이 남아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의 회복을 조용히 응원하는 것뿐입니다.”

그동안 P를 치료해 오면서 계속 배우고 성장했다고 어쭙잖게 둘러댈 수는 있지만, 전문가로서 창피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관심을 가졌던 치료기법에 따라 치료 방향은 오락가락하였고, 그녀의 상태도 들쑥날쑥하였다. 너무 치료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게 환자와 치료자 관계인지, 인생의 동반자 관계인지 헷갈릴 때도 종종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P가 최근 수년째 폭식 구토 자해와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 또 있다. 격렬한 치료과정 속에서도 P는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여 나름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P는 자신이 분노를 내려놓으면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갈 것 같다는 ‘터무니없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계속해서 ‘개지랄’이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엄마가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휘저어 놓을 것이라는 피해의식 또한 끈질기게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인 자신만 긴 세월 동안 치료받느라고 ‘개고생’을 하고 있다는 억울함도 계속 가슴속에 담아두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도대체 어디가 치료의 끝인가? 과연 P와 어머니의 관계에 따듯한 온기가 돌아올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P와 같은 복합 트라우마 환자의 치료는 여전히 많은 것들이 불확실하다. 이제 나이가 점점 들어가니, 과연 이번 생에는 치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살짝 된다.

나에게는 이제 아흔에 가까운 스승님이 계시다. P와의 끝이 보이지 않는 치료 때문에 헤매고 있을 때마다 스승님은 내게 소중한 지혜를 전해주신다.

“닥터 김, 정신과 의사에게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불확실성을 오랫동안 견디어내는 것일세. 우리를 찾아오는 환자들은 정확한 진단과 약물 처방으로 빠르게 해결될 수 있는 증상만을 갖고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네. 오히려 결론을 쉽게 낼 수 없는, 어찌 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치료를 찾아오지. 정신과 의사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러한 문제들의 불확실성을 그들과 함께 견디어내는 것이라네.”

아무래도 한참 동안 더, P와 함께 불확실성을 견뎌야 할 것 같다.

* 이것으로 제21회 한미수필문학상 수상작 게재를 마칩니다.

<수상소감 - 김준기 원장>

저는 정신과 의사가 되고 난 뒤, ‘식이장애’라고 하는 한 우물을 약 30년간 파헤쳤습니다. 그런데 파면 팔수록 명확해지고 수월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불확실하고 난이하게 느껴집니다. 환자를 만나야 하는 임상에서 어느 과라고 더 명확하고 수월하겠냐만서도,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 정신, 감정을 다루는 정신의학의 임상은 안개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듯한 불확실성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오랜 시간 함께 한 환자분과의 경험을 정리하면서, 불확실성 속에서 견디어내기 위해 정신과 의사로서 무엇이 필요한지 새삼 정리가 되었습니다. 환자분들의 증상을 호전시키기 위해 전문가로서의 스킬풀한 가이드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동시에 여전히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삶의 아픔과 상실감을 끝까지 옆에서 바라보고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시고 선택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어린 시절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줄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도 좋다고 허락해준 P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노스승님이 올해도 정말 건강하게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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