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오케이의원 채명석 원장

한 통곡이 끝나면 새 울부짖음이 이어지는 정적 같은 시간이었다. 해안가 그물에 칭칭 걸린 채 아무런 미동도 없이 모래 위에 박혀 있는 거북이 사체를 본 순간.

저녁에 집에서 차를 마시다가 뉴스를 보았다.

제주도 비양도 인근 해안가에서 죽은 지 15일 정도 지난 것으로 파악된 푸른 바다거북이 사체가 발견되었다는 거였다. 멸종위기에 처한 바다거북이의 보호가 절실하다는 뉴스였다. 바닷가에 어지럽게 버려진 어획도구들, 여러 가지 덫이나 올가미, 주낙 자망 등에 걸린 거북이들에게 절망적인 장면들이 끊임없이 지나갔다.

알에서 새끼가 깨어나는 모습과 어린 거북이들이 모래사장을 지나 바다로 기어가며 넘어지고 엎어지는 모습과 모래사장에 박힌 거북이 사체 장면이 오버랩 되어 지나갔다.

그 순간 거북이와 죽음 하나로 뭉뚱그려지는 오래된 한 사람.

그를 만난 곳은 범천 4동 안창마을 소위 말하는 산동네 판자촌이었다. 마을이 언제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부산에 신발사업이 호황이던 시절 인근 공장에 다니던 사람들이 집을 지어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연탄리어카가 겨우 들어가던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다 중턱쯤에 그의 집이 있었다. 그의 집 바로 옆에 주말마다 하는 무료진료소가 있었다. 진료소에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의 성은 김가였다. 사십대 중반으로 키는 작았지만 체구가 아주 좋았다. 힘이 장사였다. 온 몸에는 푸른 용 문신이 선명했다. 술을 많이 마셨다. 술을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밥을 먹지 않고 술로 방안에 쓰러질 때까지 마셨다. 술을 마시지 않은 날에는 갑자기 착해진 아이처럼 조용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한 명 있었다. 부인은 아이들이 어릴 적 도망을 가버린 상태였다. 주위사람들은 그를 거북이라고 불렀다. 아마 손발이 엄청 크고 힘이 좋아 무섭기도 하지만 평소에는 늘 온순해 거북이를 닮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의 직업은 노가다 십장이었다. 건물 공사 할 때 작업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비계 작업 일명 아시바 작업을 하는 거였다. 가끔 사람이 떨어져 죽기도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작업을 하지 못하고 쉬어야 했다. 그런 날이면 그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모여서 술판을 벌이곤 했다. 술판의 끝은 항상 싸움이었다. 동네가 다 시끄러웠다. 칼부림이 나지 않고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금이나마 그를 좀 더 알게 된 것도 술 때문이었다. 그가 술을 먹고 방안에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는 거였다. 좁은 방안이 이불이고 옷이고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그를 데리고 근처 병원 응급실로 갔다. 술로 인한 간경화와 구토로 생긴 식도 정맥류 파열 때문이었다. 아주 심한 상태는 아니었지만 병원에 일주일 넘게 입원이 필요했다. 입원해 있는 동안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그의 아이들 뿐 아무도 없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자주 같이 있을 시간이 생겼다. 본인의 어렸을 적 이야기도, 조폭 생활을 했던 이야기도 하고 여러 이야기를 했다.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한 이야기가 있다.

부산 형제복지원 이야기였다. 80년 전두환 정권 시절에 부랑아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선도 계도한다는 목적으로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시설에 감금하고 잔혹한 일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그도 초기에 그곳으로 잡혀갔다고 한다. 그곳은 군대나 똑같은 조직이었다. 힘 좋고 순해 보이는 그는 바로 반장으로 선임되어 간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하는 일은 주로 처음 잡혀 오는 사람들이 말썽을 부리지 못하게 패서 순하게 만드는 일이었다고 한다. 혹여 높은 담을 넘어 도망가려다 잡히기라도 하면 가혹한 징벌이 있었다고 한다. 주로 쇠못이 박힌 각목으로 죽을 때까지 팼다고 한다. 살이 다 찢어지고 피가 튀어 거의 죽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생각조차 못하게 잔인하게 했다고 한다. 형제복지원에서 발표한 사망자만 오백 명이 넘는다고 하니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얼마나 일어났는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보다 더한 일이 있었다. 복지원 안에는 아이들과 여자, 남자를 분리하기 위해 설치된 철조망이 있는데, 어느 날 그 철조망 너머에 딸과 아들이 있는 것을 보았다는 거였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만났다는 것이었다. 그 때 딸은 여덟 살이었고 아들은 다섯 살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잡혀가고 아이들도 그 뒤에 잡혀간 것이었다. 여기서 잡혀갔다는 말은 실은 경찰이 와서 시설에 데려다 준 것이었다. 그때는 경찰들이 부랑아를 잡아서 시설에 넣어주면 상점이 주어져 승진하는데 도움이 되어 서로 혈안이 되어 아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거리를 배회하면 무조건 잡아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그렇게 삼 년이 넘게 잡혀있었다고 한다.

있는 힘을 다해 살려는 사람처럼 그는 병원을 퇴원하면서 한참 지나도록 그칠 줄 모르는 울음을 쏟아내며 중대 결심을 했다고 말했다. 술을 끊기로 했다는 거였다. 그 다짐으로 머리도 삭발을 하고 술은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일도 열심히 나가고 아이들에게 잘 해 주려고 애도 썼다. 아이들에게도 그에게도 정말 평온한 날들이었다. 그의 모습은 찻잔에 고인 물처럼 고요하고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삶의 무게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느 날 그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일하는 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임금 체불로 건설업자와 불화가 계속 되다 결국 폭력을 행사한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술로 인해 그는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다. 몇 달이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로부터는 술을 먹고 나면 무척 괴로워하고 자책하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술을 다시 마시기 시작한 후부터는 폭력이 더 심해졌다. 폭력성이 심해져 아이들도 무서워 도망가기 일쑤였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다급한 연락이 왔다. 그가 죽었다는 거였다. 그가 집 입구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는 거였다. 그의 집은 판자문을 열면 작은 부엌이 있고 그 안에 작은 방이 있는 쪽방의 전형적인 집이었다. 부엌 입구 낮은 처마에 목을 매고 자살을 했다는 거였다. 그의 죽음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있는 힘을 다해 종종거려도 도저히 벗어나지지 않는 제 삶. 팽팽하게 끌리어 가던 목줄을 그만 자신이 당겨버렸는지도 모른다.

연탄재와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얹어진 달동네 추운 맨땅위에 그렇게 드러누워 있었다. 하나의 생에 그토록 단단하게 결박되었던 몸 위를 햇빛과 바람만 한가롭게 어정거리고 있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안 판잣집 양철지붕 아래 세상을 향해 사납게 짖던 그의 울음이 둥글게 뭉쳐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던 현실과 마주한 거북이처럼 죽음으로 밖에 벗어날 수 없었던 그의 울음이 고인 자리가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장례식이 끝나고 나니 아이들이 문제였다. 보호자가 없었다. 어릴 적 도망갔던 엄마를 어렵게 수소문해서 부산 근교 김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에게 가는 아이들을 보니 오랫동안 떨다가 깨어져 버린 유리창처럼 툭 건드려주기만 해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넘어지고 뒤집어 지더라도 거북이 새끼들이 그러했듯이 바다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길, 아버지와 거북이가 헤엄치며 눈물 훔쳤던 바다가 아니라 자유롭고 잔잔한 바다 속에서 늘 평안하기를 기원해본다.

<수상소감- 부산오케이의원 채명석 원장>

하루 중 낮이라는 시간이 사라지고 또 다른 밤이라는 시간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겨울 해가 강물을 붉게 물들이며 집으로 돌아가듯 강둑을 넘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길가에 나무는 말이 없이 서 있다. 늘 사라지는 저물녘은 부드러운 침묵이었다. 침묵 속에서 긴 장대를 쥔 낚시꾼처럼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다.

내일은 또 오늘처럼 지나갈 것을 생각하며 저물녘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다. 지나간 시간은 물속에 잠겨 있는 파도처럼 소리 없이 솟구쳐 눈물과 안타까움을 주고 사라져 간다.

그를 생각하며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볼 수 있어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화상으로 많은 아픔을 겪었던 그도 지금은 아무런 아픔 없이 웃는 모습으로 잘 지내고 있길 바래봅니다.

마지막으로 이 상을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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