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덕선 전 세계의학교육연합회 부회장
“환자 없는 지역 의사 ‘돌팔이’ 만드는 구조”
“소청과 의사 부족? 나가는 인력부터 잡아야”

‘어떻게’는 빠진 채 숫자만 거론된다. 의과대학 정원만이 아니다. 전공의 정원 배정도 그렇다. 지역의료와 필수의료를 살리기 위해 의사 인력을 늘리고 전공의 정원을 조정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의사’를 어떻게 양성해 그 분야로 가게 하겠다는 것인지는 빠진 채 ‘속도전’을 치르고 있다.

고려의대 안덕선 명예교수는 ‘큰 그림’이 빠진 의료정책이 정치 구호처럼 추진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의대 정원 확대를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다.” 의료 현실이 바뀌지 않는 상황에서 단순히 의사 수만 늘었을 때 나타날 혼란과 부작용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청사진이 없다. 정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의료 환경은 무엇인지, 그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어떤 부분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지가 빠져 있다. 정치권까지 나서서 의사 수만 늘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환상’만 심어주고 있다. 안 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지금 이대로 의대 정원만 늘어나면 “정부와 정치권이 걱정하는 의료 붕괴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세계의학교육연합회(WFME) 부회장을 지냈으며 한국의학교육평가원장과 한국의학교육학회장 등도 역임한 의학교육 분야 전문가다.

안덕선 고려의대 명예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정부 정책이 '숫자'에만 매몰된 채 보여주기식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청년의사).
안덕선 고려의대 명예교수는 청년의사와 인터뷰에서 정부 정책이 '숫자'에만 매몰된 채 보여주기식으로 추진되고 있다고 비판했다(ⓒ청년의사).

-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근거 중 하나가 OECD 보건통계(Health Statistics)다. OECD 평균보다 적기 때문에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OECD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했다(관련 기사: 'OECD 이데올로기'가 좌우하는 한국 의료정책).

산수하듯이 방정식에 의존해서 정책을 세우고 있다. 방정식 입력값이 잘못되면 결과도 잘못 나올 수밖에 없다. OECD 통계를 이용해 우리나라 의사가 제일 많이 번다고 하는데 이 부분도 잘못됐다. 미국 등은 빠져 있고 나라마다 제출하는 기준도 다르다. 특히 의사 인력에 관해서는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다. 산수로 풀 문제가 아니다. 선진국처럼 인구 변화와 구조 등을 꾸준히 모니터링해서 그에 필요한 의료 인력을 논의하는 독립 기구부터 만들어야 한다. 10년 내내 이 분야만 연구해도 부족한데 우리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연구용역을 줘서 일회성으로만 진행한다. 대입하는 숫자에 따라 결과값에 오류도 많지만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

의사 있어도 환자 없으면 소용없다

- 고려해야 할 사항은 무엇을 말하는가.

환자가 의료를 이용하는 방식도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병원 문턱이 낮다. 환자들은 수도권 대형병원에서 진료받길 원한다. 정치인들은 집 근처에서 모든 의료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데 그렇게 될 수 없다. 그런 의료를 만들겠다고 하는 건 사기다. 의료기관이 제대로 운영되려면 적정 볼륨(환자 수)이 유지돼야 한다. 분만을 하려고 해도 산부인과 전문의 외에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간호사, 약사 등 여러 인력이 팀으로 움직인다. 당직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는 인력도 갖춰야 한다. 이런 시스템을 갖췄다고 해도 환자가 없으면 소용없다. 의사 입장에서도 전공 분야 환자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진료하는 환경이면 ‘돌팔이’되기 십상이다.

실제로 지방에서는 경영난으로 문을 닫는 병원이 늘고 있다. 경영난의 가장 큰 원인은 환자 감소다. 지방 병원만의 문제도 아니다. 서울 중심에 있던 서울백병원도 환자가 없어 경영난에 허덕이다 지난 9월 문을 닫았다. 반면 ‘빅5병원’을 필두로 한 대형병원들은 환자가 넘쳐난다. 건강검진마저 대형병원에서 받길 원해 지금 예약해도 내년 4월 이후에야 받을 수 있다.

이는 한국의 의료이용형태를 보여준다.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지고 병원 문턱이 낮다 보니 큰 병원으로 쏠린다. 의사 근무지를 강제하는 방안은 논의하지만 환자들의 의료이용 방식 제한하는 논의는 없다.

안 교수는 이같은 환경에서 “지방에 의사를 배치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느냐”고 반문했다. 더욱이 고속철도인 KTX가 개통된 후 전국은 반나절 생활권이 됐다. 안 교수는 “가까운 대도시로 나가는 김에 KTX 타고 조금만 더 가면 서울이니 한번 올라가서 한꺼번에 진료받자는 환자들이 많다”며 “영토 면적 대비 의사가 얼마나 되는지,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등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10년 뒤 효과도 불확실한 정책으로 갈등 양산

- 환자들이 몰리는 대학병원들은 의사를 구하지 못해 힘들어한다.

있던 교수들도 개원 시장으로 내모는 환경이다. ‘문재인 케어’로 불리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정책이 시행될 때 의료계는 부작용을 우려했다. 의료이용은 늘었고 대학병원들은 환자들이 몰리면서 ‘일감’이 늘었지만 오히려 의사들은 이탈하기 시작했다. 소비를 조절할 능력도 없고, 인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능력도 없이 의사 수만 늘리겠다고 한다. 예약하지 않아도 바로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10~15년 후에나 효과가 나타나는 정책으로 갈등만 양산하고 있다. 그 효과라는 것도 불확실하다.

- ‘소아청소년과 오픈런’ 현상이 의사 부족을 방증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캐나다는 한국보다 인구 대비 소청과 전문의 수가 적다. 그런데도 한국과 같은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중증 질환에 걸린 아이만 소청과 전문의를 만난다. 감기 등 경증 질환으로 소청과 전문의에게 진료를 받는 일은 없다. 이미 배출된 전문 인력만 제대로 배치돼도 지금과 같은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다른 분야로 새 나가는 전문의들을 어떻게 돌려세울 것인가부터 고민해야 한다.

의사가 부족할 때보다 너무 많을 때 더 큰 부작용이 생긴다. 먹고 살기 위해 경쟁이 심해져 프로페셔널리즘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리스 사례만 봐도 의대 정원 확대는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관련 기사: 의사 수 늘린 그리스는 왜 공공병원에 의사가 없나).

전공의도 마찬가지다. 현재 전공의 정원은 사회적 수요와 관계없이 책정되고 배정된다. 사회에서 필요한 만큼 전문의를 양성하기 위해 전공의 정원을 책정하는 게 아니라 병원 운영을 위해 배정된다. 전공의를 인력으로 보기 때문이다. 정부 정책 방향도 그렇다.

정원 주면 알아서 하겠다? 어떤 의사 어떻게 교육할지 계획 있어야

- 정부가 의대 정원을 늘리기로 하고 대학별 수요 조사도 실시했다. ‘미니 의대’를 비롯해 대부분이 증원을 늘려달라고 하면서 그 수가 4,000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 기회에 밥숟가락 하나 더 얹겠다는 식으로 가서는 안된다. 의사 수를 늘려는 목적이 있다면 그에 맞는 교육을 표방해야 한다. 공공의료 분야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검증해야 한다. 일단 정원을 더 주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하는 식이면 곤란하다.

- 오는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늘리겠다는 게 정부 계획이다. 대학별로 별도 계획을 세우고 검증할 만한 시간이 있겠는가.

그러기에는 너무 촉박하다. 의대 정원을 1~2년 늦게 늘린다고 해서 무슨 큰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출생률 저하로 인구가 감소하고 있어서 인구 10만명당 의사 수는 더 증가한다.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해 노인들의 의료이용이 늘 것이라고 하는데 의사 수만 늘리면 해결되는가. 의사를 어떻게 배치해 노인들을 위한 의료를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도 전혀 없다.

곳곳에서 파열음이 생기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의료접근성이 높은 나라다. 이는 의사 수와 수입에 초점이 맞춰져 인용되는 OECD 보건통계에도 나타난다. 한국은 국민 1인당 의사 외래 진료 횟수가 OECD 회원국 중 가장 많고 환자 1인당 평균 재원일수는 일본 다음으로 길다. 허혈성 뇌졸중 입원 환자의 병원 내 30일 치명률은 일본 다음으로 낮고 순환기계질환에 의한 연령표준화 사망률은 가장 낮다. 영아사망률, 암·당뇨병·치매에 의한 연령표준화 사망률은 물론 예방가능 사망률과 치료가능 사망률을 합한 회피가능 사망률도 OECD 평균보다 훨씬 낮다. 반면 국민 1인당 경상의료비 지출은 OECD 평균보다 적다. 상대적으로 싼 비용에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게 한국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안 교수는 “값싸고 빠른 의료가 지금까지는 통했지만 이제는 한계”라고 했다. 장기 계획 없이 문제가 생기면 땜질식으로 처방하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공공의료’와 ‘필수의료’라는 말이 정부가 표방하는 의료라면 그 모습이 어떤지 구체화해서 제시해야 한다는 게 안 교수의 지적이다.

“지금이라도 기초를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10년 사이 한국 의료는 더 망가지고 몰락할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의사를 늘려봐야 무엇하겠는가. 잘못된 정책으로 만들어진 큰 배는 브레이크를 밟아도 몇 km는 더 가야 멈춘다. 여기에 기존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까지 겹치면 우려했던 의료붕괴가 현실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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