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한림원, 의대 정원 정책 포럼 열고 의견 수렴
"OECD 통계 논쟁 떠나 의료 상황 통합적으로 봐야"
이해당사자 참여한 거버넌스 구축 필요성 제기돼

의대 정원 증원 문제가 '숫자 놀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이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의사 수' 논쟁을 떠나 보건의료체계 발전과 의료서비스 질 향상이라는 통합적 관점에서 적정 의사 인력 문제를 다룰 때라고 했다. 이를 위해 이해당사자가 함께 모여 논의하고 정책을 수립하는 거버넌스 구축 필요성도 제기됐다.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은 지난 8일 고려대 하나스퀘어에서 '의대정원정책에 대한 심층적 분석 연구'를 주제로 제21회 보건의료포럼을 열어 현재 의대 정원 증원 논의의 문제점을 짚고 발전 방향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의대 정원 증원 논의 근거로 쓰이는 OECD 보건의료 데이터부터 재해석했다.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강은교 교수는 'OECD 보건의료 질 평가 자료 팩트체크'에서 OECD 데이터는 "현재의 데이터"라면서 의대 정원 증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의 근거로 쓰이는데 한계가 있다고 했다. 변화하는 의료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래 방향을 설정할 순 없다는 지적이다.

강 교수는 "OECD 데이터는 지금 이 순간의 데이터다. 현재 의사 수가 부족하다고 해서 이것이 미래에 얼마나 부족할지 예측하는 데이터는 아니다. OECD 데이터를 볼 때 역동적인 의료수요 변화와 요인을 모두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OECD 데이터가 의대 정원 증원 반대 근거인 '높은 의료서비스 접근성'을 뒷받침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데이터를 들여다보면 한국은 오히려 의료서비스 접근성에 문제가 많은 나라였다. 강 교수는 "OECD 데이터를 보면서 단순히 의사 인력 증감만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의료서비스 체계가 제대로 된 체계이고 적합한 체계인지 점검해야 한다"며 한국은 지금 의사들의 높은 노동 강도까지 겹쳐 의료서비스 질 저하가 우려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OECD 보건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의사 2.5명이 연간 외래진료 14.7회를 감당하는 구조다. OECD 회원국이 평균적으로 의사 3.7명이 연간 외래진료 5.9회를 맡는 것과 비교하면 의사의 외래진료 부담은 3.7배에 이른다.

지역 격차도 '발등의 불'이다. 한국 모든 지자체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가 OECD 평균인 3.7명을 밑돈다. 서울조차 3.0명에 불과하다. 최하위인 세종시는 0.8명이다. OECD 기준에서 '의료 발전이 필요한 개발도상국' 수준이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은 고령 인구 비중도 높다. 지역 격차가 심화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강은교 교수는 '현재' 의료시스템을 다루는 OECD 데이터가 미래 상황을 상정한 의대 정원 증원 찬성과 반대 논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사진 출처: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포럼 영상 중계 화면 갈무라).
국립암센터 가정의학과 강은교 교수는 '현재' 의료시스템을 다루는 OECD 데이터가 미래 상황을 상정한 의대 정원 증원 찬성과 반대 논의 근거가 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사진 출처: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포럼 영상 중계 화면 갈무라).

따라서 현재 의사 인력이 짊어진 부담을 해소하고 의료서비스 질을 향상시키는 맥락에서 의사 인력(의대 정원 증원)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했다.

강 교수는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위한 보건의료체계 재정비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의사 인력 수급 대책이 함께 가야 한다. 보건의료체계 재정비로 의료서비스 질 향상을 이뤘을 때 필요한 의사 인력 수급과 서비스 개선이 더딜 때 필요한 의사 인력 규모를 각각 고려해 다각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통합적인 관점에서 '적정한' 의료 인력 수준을 논의하고 정책을 수립할 거버넌스 구축도 강조됐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서경화 박사는 "양적인 문제에서 탈피해 보건의료인력계획을 수립하고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적 관리를 해야 한다"면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인적 자원 관리를 위한 거버넌스 구축이 절실하다"고 했다.

서 박사는 "의료 인력 계획이 부재해 구체적인 목표와 전략 설정이 미비하고 결국 정책 수립과 구현에 실패했다"면서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이해하고 상호 연관된 요소를 통합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서경화 박사는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살펴 의료 인력 정책을 수립할 거버넌스 조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모범 사례로 네덜란드를 꼽았다(사진 출처: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포럼 영상 중계 화면 갈무라).
의료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을 지낸 서경화 박사는 보건의료체계 전반을 살펴 의료 인력 정책을 수립할 거버넌스 조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모범 사례로 네덜란드를 꼽았다(사진 출처: 대한민국의학한림원 포럼 영상 중계 화면 갈무라).

서 박사는 네덜란드를 모범 사례로 꼽았다. 네덜란드는 보건의료서비스연구소(NIVEL)를 세우고 의사와 수련기관, 보험자가 참여하는 의료 인력 거버넌스를 운영하고 있다. 이해관계자 단체가 의견을 수렴하고 의논한 내용을 토대로 정책 권고안을 제출하면 정부는 이에 따라 실제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한다. 권고안은 미래 필요한 의료 인력 범위와 수를 제시한다. 정책 실행에 따라 5년부터 25년에 이르기까지 예상 결과를 검토해 도출한다.

서 박사는 "이런 구조에서 정부는 의료 인력 계획에 관여하고 규제와 감독을 담당하지만 보건의료 인력 수급과 조정 자체에는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면서 "대신 정부와 이해관계자, NIVEL이라는 담당 기구가 공동으로 정책에 대한 책임을 진다. 이처럼 의료 인력 정책은 모두가 책임감 있게 접근해야 하는 문제"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지속가능한 의료 시스템 구축 과정에서 의료 인력 정책도 논의돼야 한다며 이를 위한 거버넌스를 강조했다(ⓒ청년의사).

패널 토론에서 참석자들 역시 의대 정원 논의가 산수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속가능한 의료 시스템 구축을 위한 거버넌스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서울의대 의료관리학과 김윤 교수는 "의사를 늘리느냐 마느냐는 질문은 우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보건의료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정책이 무엇이고 그 정책 성공을 위한 적정 의사 인력을 산출하는 '정책 패키지' 방식으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의사 부족 사태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 의료 시스템 자체가 의사를 많이 필요로 한다. 좋은 의료 접근성도 대도시 이야기다. 5~10년 안에 의료 시스템에 엄청난 압박이 가해진다.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문제해결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10년 후 의사 부족하지만 20년 후 과잉…"정원 조정 유연성 있어야"

이에 대해 보건사회연구원 신영석 선임연구위원은 2030년대는 의사 인력 부족에 부딪힐 거라고 예측했다. 의사 부족은 인구가 감소하는 2050년대에 해소될 거라고 내다봤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의대 정원을 고정하는 방식 대신 탄력적으로 조정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신 위원은 "현재 시점에서 10년 후(2030년대)는 의사가 부족할 것으로 판단되면 지금 정원을 좀 늘리고 20년 후(2050년대)에는 적정 인력이 유지되도록 다시 줄이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필요하다"고 했다.

메커니즘을 만들고 방향성을 결정할 거버넌스 구축도 강조했다. 신 위원은 "여러 이해당사자가 모여 결정해야 한다"면서 "인력 정책 하나만 보지 말고 병상을 비롯해 의료 자원과 관련 정책을 전부 살펴 지속가능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연세의대 의학교육학교실 양은배 교수 역시 "정원을 유연성 있게 조율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한 사회적 거버넌스로서 민관합동기구 수립을 강조했다. 양 교수는 "민관합동기구가 보건의료인력 실태조사나 수요·공급 조사를 진행하고 정부도 거버넌스 측면에서 전문가단체에 부분적으로 권한을 위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양 교수는 "의대 정원 증원 또는 감축 효과는 빨라야 10년이 지나야 드러난다. 우리가 현재 느끼는 의료 문제가 그 시점에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면서 "현재의 문제는 지금 해결하자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했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형준 정책위원장 또한 현재 의대 정원 증원 논의 구조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격"이라면서 "지금 현재 드러난 의료 이용 불평등 문제 해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역별 필수의료 자원 배분 관점에서 현재 인원을 어떻게 선발하고 배치할지부터 제시하지 않으면 정책의 일관성이나 진정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정부는 의료 인력 거버넌스를 활성화하고 의료 인력 규모는 물론 의료 인력 양성 질 관리 방안도 마련하겠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장재원 의료인력정책과장은 "의사 수가 부족하냐 많냐는 생각이나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본다. 의대 정원만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필요한 수단이지만 충분한 수단은 아니다"라면서 "의료 인력 증원 문제에 덧붙여서 의과대학 교육과정부터 전문의 면허 교육 전반과 전문의 자격에 대한 질 관리도 고민하겠다"고 했다.

의료계와 소통도 강화하겠다고 했다. 장 과장은 "지난 2020년 의료인 파업 사태로 불필요한 사회적 혼란과 갈등이라는 비용을 치뤘다. 실패를 함께 경험했기 때문에 더 자주 소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국민에게 질 좋은 의료서비스 제공이야말로 모든 정책 목적이다. 이런 공감대 속에서 의료계와 대화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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