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향대부천병원 소화기내과 유정주 교수

물에 물감을 떨어뜨려 본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알고 계실 거예요. 단 한 방울의 물감만으로도 한 컵의 물을 온통 물들일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소개할 환자분께서 저에게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저는 대학병원에서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고 있는 주니어 스텝입니다. 그분을 만나기 전까지 저는, 스스로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일한다고 늘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게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요.

대학병원 진료는 3분 진료가 기본입니다. 한 세션에 50-60명씩 환자분들을 진료하고 있으면, 환자에 대한 진정한 공감은 사치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일단 빠르고 정확하게 진료를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제가 살아남으니까요.

주말을 앞둔 어느 금요일 오후 외래였습니다. 금요일은 의사들도 다들 일찍 집에 가고 싶어 하기 때문에, 금요일 오후 외래는 전통적으로 주니어 스텝이 병원을 지킵니다. 언제나처럼 진료는 정신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어느덧 저녁 6시, 마지막 당일 외래 접수를 하신 환자 차례가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당일 접수는 곧 불안함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몇 시간씩 기나긴 대기를 기다려야만 진료를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웬만큼 절박한 상황이 아닌 이상, 환자들께서는 이 방법을 잘 선택하시지 않습니다. 미리 예약을 하고 오시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금요일 오후, 그것도 당일 외래라면, 뭔가 사연이 있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날, 문을 열고 노년의 부부께서 들어오시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잔뜩 긴장하신 듯한 두 분의 모습과 아내분의 울 것 같은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왠지 저까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습니다.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가져오신 의뢰서를 먼저 읽어 보았어요. 환자는 아내분이셨습니다. 그동안 만성 B형 간염과 간경변증으로 인해 다른 병원에서 진료받고 계셨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간세포암 진단을 받아, 허겁지겁 저희 병원으로 오신 겁니다. 아내분은 물론 남편분 또한 큰 충격을 받으신 것 같았습니다. 순서를 오랫동안 기다리며 두 분이 느끼셨을 공포와 절망적인 마음이 제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자신이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도 괜찮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노부부의 반응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암은 크기가 작기도 하고, 1기 단계였기 때문에 완치를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은 환자분께 이런 말은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당장은 그리 와닿지 않는 이야기니까요. 내가 암이라는데 크기가 작다는 말 하나로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했습니다. 저의 진심과 희망이 환자분과 보호자분께 닿기를 바랄 뿐입니다.

“환자분, 많이 속상하시죠? 기다리시느라 많이 무서우셨을 것 같아요.”

그러자 환자의 어깨가 조금 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저 또한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설득을 이어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환자분께서는 꾸준히 검진을 잘 받고 계셨고, 덕분에 이번 암도 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얼마든지 완치가 가능하신 상태로 보입니다. 그러니 아직은 좌절하지 말고 같이 치료해 봅시다.”

안심시켜 드리고자 말한 건 맞았지만, 그렇다고 지어낸 말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리 막막한 상황일지라도 의료진이라면 언제나 진실에 근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고 선서한 만큼 늘 그 생각에 충실하고 싶었습니다. 가만가만 저의 말을 경청하시던 환자분은 결국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아마 그 눈물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본인 외에는 헤아릴 수 없을 공포, 숨통이 트이는 듯한 안도감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을 거예요. 그때 새삼스레 다시 실감했습니다. 의료진의 말 한마디 때문에 환자가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할 수 있구나. 시달리던 외래 진료에 몇 년간 제가 잊고 있었던, 사명감 같은 게 느껴지는 기분마저 들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울 것 같은 때에도 난관은 있습니다. 금요일 저녁 시간이라서 환자분께서 입원하실 병실이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다정한 외래 직원분께서 내 일처럼 원무과에 거듭 부탁을 해 주셨습니다. “원무과 최 선생님, 오늘 암을 처음 진단받으신 분이라서, 많이 도와드리고 싶어요. 혹시 추가 병실이 생기거든 꼭 그 환자분께 배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 마음 또한 직원분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여차저차 모든 진료가 끝이 났습니다. 슬프게도 그게 퇴근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대학병원이나 그렇듯이 주니어 스텝은 외래 진료 이후에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 일을 해야만, 논문 실적도 낼 수 있고, 학회 활동도 할 수 있습니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 밤늦게까지 저는 밀린 일을 하며 야근을 했습니다.

밤 열한 시, 마침내 퇴근을 했습니다. 이 정도 시간이 되면,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습니다. 그저 어서 집에 가서 누워야겠다, 내 생활은 왜 이러한가 등 한탄을 하며 퇴근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불 꺼진 병원 1층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껌껌한 복도 저 너머로 부부 한 쌍이 서로 부축하며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스쳐 지나갈 때, 자세히 보았더니 아까 마지막으로 진료를 보셨던 노부부였습니다. 외래 진료 때와 마찬가지로 두 분은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환자분께서는 기운이 없이 터덜터덜 걷고 계셨고, 남편분께서는 어깨동무로 그런 아내분을 부축 중이셨습니다. 늦게나마 병실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짐을 챙겨 입원하러 오신 듯했습니다.

오후 때와 달리 편한 복장을 한 저를 노부부는 알아보지 못하셨습니다. 묵묵히 불 꺼진 복도를 서로 스쳐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갑자기 울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코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늦게 퇴근한다고 내가 투덜댈 때가 아니구나. 나로 인해 누군가는 안도할 수도, 굉장히 실망할 수도, 어쩌면 울 수도 있는 거다. 내가 정말 중요한 일을 하고 있구나.’ 그걸 자각하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피곤했던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의사에겐 별문제 없어 보이는 경우라도 환자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환자분들께서는 늘 끝까지 저를 바라봐 주시고, 믿어 주시고, 따라와 주십니다. 그날 불 꺼진 복도 가운데서 저는 다짐했습니다. 환자들께 더 잘해야겠다고, 잘하고 싶다고. 일에 치여서 감정을 잊고 지낸 조교수 생활 6년 차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습니다.

의사 일은 하면 할수록 어려운 일 같습니다. 지식적으로 어렵기도 하고, ‘사람’을 진료하기 때문에, 수많은 감정적인 부분까지 고려를 해야 합니다. 처음 의사면허 땄을 때는 좀 더 순수했던 것 같은데,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서, 매 순간의 즐거움이나 보람은 포기한지 오래입니다. 하지만 이번 일처럼 뜻하지 않게 한 번씩, 내가 왜 의사를 하고 있는지, 어떤 영향을 환자에게 주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은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을 잘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런 긍정적이나 찡한 경험이 자꾸 쌓이면, 나중에 제가 정말 의사를 그만두고 싶은 순간에, 저를 잡아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슬슬 그 환자분의 경과가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다행히 환자분께서는 고주파 열치료술로 간세포암이 완치되었습니다. 요새는 편안하게 농담도 건네시면서 외래에서 진료를 받고 계십니다. 몹시 불안해하셨던 처음 모습이 가물가물할 만큼 항상 밝은 얼굴로 저를 만나러 오십니다. 그렇게 환자분께서는 존재만으로 저에게 희망이 되었습니다. 아주 어둡고 막막한 밤도 결국 지날 거라는 믿음을 주셨으니까요. 그분과 저는 서로에게 기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상소감 - 순천향대부천병원 유정주〉

안녕하세요. 순천향대부천병원 소화기내과 유정주입니다. 먼저 저의 부족한 글에 이런 큰 상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로 상 타본 적은 처음이라서,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주니어 스텝 생활을 하면서, 초심을 잃고 기계적으로 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어떤 날은 일의 의미도 찾지 못하고 허덕이는 때도 있었는데, 에피소드에 나온 환자분 덕분에 오히려 제가 더 큰 삶의 의미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쑥스러워서 환자분께는 다음 주쯤에 글 이야기를 전달할까 합니다. 아마 저보다 더 반가워하실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우리 순천향대부천병원, 화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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