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故정훈이 작가를 추모하며

지난 주말, 정훈이 작가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이려나 했지만, 모바일 부고였습니다. 운전 중이었던 저는 잠시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장 수리중’이라는 그의 프로필은 여전했지만, 그에게 생긴 고장은 현대의학이 고칠 수 없는 종류였던 것입니다.

정훈이 작가와 저는 1999년 한 TV프로그램에 같이 출연하면서 처음 만났습니다. 이것만으론 특별할 것이 없는 인연이었지만, 당시 두 사람은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기에, 엘리베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동네 주민이 되었습니다.

정훈이 작가가 그린 '쇼피알' 주인공 '남기남' 
정훈이 작가가 그린 '쇼피알' 주인공 '남기남'

2001년 말, 청년의사가 의료전문지 최초로 전면 만화를 기획하면서 정훈이 작가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정 작가는 당시 ‘씨네21’에 만화를 연재하고 있었던 유명 만화가였고, 그는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만화가이기도 했습니다. 만화의 기초가 되는 대본을 줄 터이니, 그것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려 달라는 저의 제안을 정 작가가 흔쾌히 수락한 이유는 정확히 모릅니다. 동네 주민의 부탁이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것인지, 새로운 방식의 작업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 그저 안정적인 수입원을 하나 더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그도 이렇게 오랫동안 연재를 지속할 줄은 몰랐을 겁니다. 저도 그랬고, 아마도 ‘쇼피알’ 독자들도 그랬을 겁니다. 10년간은 주웅 교수의 대본으로, 그 다음 거의 10년간은 서민 교수와 김응수 원장의 대본으로 그려진 만화 ‘쇼피알’은 975회까지 이어졌으니까요.

서울 상암동 한국영화박물관에서 ‘정훈이 만화, 영화와 뒹굴뒹굴 25년’이라는 이름의 특별 전시회가 개막한 것은 2021년 9월 14일이었습니다. 정 작가는 이 전시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정훈이 만화 때문에 ‘씨네21’을 구입한다는 사람이 무척 많을 정도로, 영화 혹은 드라마를 소재로 그려진 그의 만화는 무려 25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영화박물관이 특정 만화가의 특별 전시회를 마련한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많지 않을 겁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정훈이 작가는 ‘만화를 통해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공인된 셈이기도 합니다.

'정훈이 만화, 영화와 뒹굴뒹굴 25' 전시회는 지난 2021년 9월 14일부터 2022년 3월 30ㅇ리까지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정훈이 만화, 영화와 뒹굴뒹굴 25' 전시회는 지난 2021년 9월 14일부터 2022년 3월 30일까지 한국영화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사진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다른 일정 때문에 전시회 개막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여 미안해했던 저에게 정훈이 작가는 ‘(전시회 기간 중에) 자주 서울에 올라올 것이니 그때 만나자’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전시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연말, 정훈이 작가가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쇼피알’ 연재는 975회에서 멈췄습니다. 전시회는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은 채 끝이 났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부산에서도 전시회가 열렸지만, 작가는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발병 이후 연락은 가끔 주고받았습니다. 너무 잘 지내고 있다고, 자신이 병원 체질인 듯하다고, 병원에서 밥 제일 많이 먹는 환자라고, 약도 잘 받는다고, 희망적으로 말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지난 6월말에는 ‘슬기로운 환자생활’ 시리즈를 만화로 그려 보겠다는 말도 했었습니다. 20년 가까이 의료 만화를 그려 왔지만 환자가 되기 전에는 미처 몰랐던 병원과 환자와 의사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었습니다. 8편에서 10편이라는 말도 했고, 8월 중순 경에는 가능할 것 같다는 말까지 했던 걸 보면, 제법 구체적인 구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훈이 작가가 처음으로 ‘대본 없이’ 혼자서 그려내는 병원 만화를 간절히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재발 소식을 전했습니다. 7월말이었습니다. 가장 슬기로운 환자는 병을 이겨내는 환자인데, 정훈이 작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만화가 ‘정훈이’(본명 정훈) 작가가 급성 백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 5일,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만화가 ‘정훈이’(본명 정훈) 작가가 급성 백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지난 5일,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계명대 동산병원에 차려진 빈소에서 유족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훈이 작가는 청년의사 독자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두 권의 만화책을 만들고, 후원금까지 보내준 것에 대해 매우 고마워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줬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거창한 전시회를 열어 주지도 못했고, 특별한 문서나 징표로 확인해 주지는 못했지만, 정훈이 작가가 ‘쇼피알’ 연재를 통해서 대한민국의 많은 의사들에게 웃음과 감동과 위로를 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만화를 통해서 한국의료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라고, 독자 여러분과 함께 공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청년의사 홈페이지에는 ‘쇼피알’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매주 썸네일이 바뀌던 그 자리는 지난 11개월 동안 변화가 없었습니다.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와 976번째 만화를 그려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쇼피알’은 연재 중단이 아니라 연재 종료를 선언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의 흔적을 없애버리기는 너무 아쉬워서, 한동안은 그대로 둘까 합니다. 그가 남긴 975편의 ‘쇼피알’ 중에서 일부라도 다시 꺼내어보며 그를 추모하는 시간을 가질까 싶기도 합니다. 고 정훈이 작가(1972~2022)의 명복을 빕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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