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의 진료실의 고고학자


[청년의사 신문 박지욱]

인슐린의 정제

민코프스키와 폰 메링의 실험으로 입증된 사실, 즉 탄수화물 대사 조절에 췌장의 랑게르한스 섬이 아주 중요하다는 믿음이 수용될 무렵인 1891년, 영국의 메레이George Murray(1865~1939) 가 양(羊)의 갑상선 추출물을 주사해 점액부종myxoma 환자를 치료했다. 다른 동물의 장기 추출물로 인간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이 아이디어-이른바 장기 요법(organotherapy)-는 당뇨병의 치료에도 응용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췌장을 대신할 다른 동물의 췌장 추출물만 얻으면 당뇨병 치료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으로 연구의 열의가 드높았다.

1893년에 마샬-존스 R Mansell-Jones는 문제가 되는 췌장의 기능을 대신할 췌장즙(汁)을 투여해보자는 제안을 했고 많은 연구자들이 췌장추출물pancreatic extract를 환자들에게 먹여도 보고 주사도 해보았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자 이제는 ‘당뇨병이 정말 췌장의 내분비 기능 이상으로 생기는 병이 맞아’하는 회의감이 학계 전반에 퍼졌다.

이런 침체된 분위기로 인해 인슐린 연구의 마지막 정점이었던 1910년대 후반에 5~20년 기간 중에 항당뇨병 물질을 찾기 위해 췌장의 섬세포에 매달린 연구자들은 전세계에 네 댓 명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위축됐다. 하지만 그들이 결국 해냈다.

췌장 추출물은 왜 당뇨병 치료에 효과가 없었을까? 그것은 췌장의 두 가지 기능 즉, 외분비 기구와 내분비 기구가 공존하기 때문이다. 부신에서도 기능이 서로 다른 피질과 수질의 존재 때문에 초기 연구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는 것을 앞에서 얘기 했지만-본 연재 <스테로이드 이야기> 참조- 췌장은 그 문제가 조금 달랐다.

췌장의 소화액과 인슐린을 동시에 만드는 기관이다. 췌장을 추출하는 과정에 소화액과 인슐린을 분리하지 않으면 소화액 중 단백질을 분해하는 효소가 인슐린을 분해해버리므로 정작 인슐린이 없는 추출물을 얻게 된다. 그러니 당뇨병 환자에게 복합 소화제(!)에 불과했다. 순수한 인슐린을 단백 분해효소의 간섭 없이 추출해내는 것이 성공의 관건이었다.

자, 어떻게 소화액과 인슐린이 섞이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외분비선(선포세포)의 기능을 아예 못하게 하면 어떨까? 이 아이디어를 제일 먼저 실천한 이는 1908년에 베를린 의사 췰저 Georg Ludwig Zuelzer (1870~1949)였다.

췰저는 췌장에 생긴 결석으로 췌관이 막히면 선포세포들이 망가진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인위적으로 실험동물의 췌관을 결찰해 관을 막았다. 얼마 후 췌장을 떼어내어 확인해 보니 예상대로 선포세포들이 퇴화해 소화효소들을 더 이상 만들지 못하는 것을 확인했다. 반쯤 망가진 췌장을 즙으로 만든 다음 알코올로 침전시켜 단백질 추출물을 얻었다. 이 추출물을 췌장을 떼어내 당뇨병 상태로 만든 개에게 주사해 당뇨병 증상을 완화시켰다!

췰저는 이제 과감하게-FDA 는 없던 시절이다- 당뇨성 혼수에 빠져 소생 가망성이 거의 없는 환자에게 정맥주사를 했다. 환자는 기적처럼 깨어났고, 도합 8명의 환자들이 주사를 맞았고 오줌에서 당분과 케톤체ketone body가 사라졌다. 드디어 기적의 약물이 발견됐고 췰저는 이 약물에 혼수상태(coma)를 없앤다는 의미로 ‘Acomatrol’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하지만 정작 민코프스키 클리닉에서의 임상시험은 부작용으로 실패했다. 조금 더 보완 연구를 진행하면 곧 완전한 약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안타깝게도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췰저는 징집되고, 연구는 중단됐다 (이 물질의 독일의 제약회사가 연구를 지원, 미국에서 Pancreas Preparation Suitable for the Treatment of Diabetes 라는 이름으로 물질특허까지 획득했다.) 불순물 문제가 남아 있긴 했지만 당뇨병 치료에 처음으로 췌장을 이용했고 부분적인 성공을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후속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향도 미쳤고.

Acomatol ; 췌장 추출물로 부분적 성공을 거두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는 1911년, 시카고대학교의 대학원생 스콧 Ernest Scott(1897~1966)도 췰저와 같은 방법을 이용해 추출물을 만들었다. 개에게 주사했더니 네 마리 중 세 마리는 요당이 줄고 대사효율도 정상화됐다. 스콧은 아래의 결론에 도달했다.

1) 췌장의 내분비 물질은 탄수화물 대사를 조절한다

2) 적절히 잘 처리만 한다면 내분비 물질은 활성이 유지된 채로 추출할 수 있다

3) 내분비 물질은 췌장의 소화효소나 산화과정으로 쉽게 파괴된다

4) 내분비물질은 강한 알코올에는 거의 녹지 않지만 산성인 물에는 잘 녹는다

5) 이전의 연구자들이 실패한 이유는 소화효소의 작용을 막아내지 못했든지 산화작용을 방지하지 못한 탓이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지적이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로 그의 연구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했다.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갔다면 스콧이 바로 인슐린의 발견자가 됐을 텐데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반 발짝 더 나아간 사람이 루마니아에 있었다.

1916년에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의 생리학자이자 의사인 파울레스코 Nicolas Paulesco(1869~1931)는 췰저의 방식으로 만든 수용성 추출물을 개에 주사해 효과를 확인했지만 그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연구를 중단했다. 전후에 재개한 연구에서 개의 외경정맥에 주사해 저혈당 쇼크로 개가 죽어버릴 만큼 효과가 확실한(!) 추출물을 만들었다. 하지만 피하 주사했을 때는 주사 부위에 부작용이 생겨 사람에게 당장 사용하기는 어려웠다. 이때가 바로 1921년이었고, 불순물을 없애고 대량 생산 단계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 전에 대서양 건너 캐나다에서 그 일을 먼저 해내고 말았다.

1920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정형외과 의사 일을 하며 인근 대학에 시간 강사도 나가던,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훈장까지 받았던 밴팅 Frederick Banting(1891년 11월 14일 ~ 1941)은 1920년 10월 30일에 ‘췌관 결찰로 선포세포를 인위적으로 망가뜨릴 수 있다’는 미국 병리학자의 논문 < Moses Baron ;Relation of the islets of langerhans to Diabetes with Special Reference to Cases of Pancreatic Lithiasis. Surgery, Gynecology and Obstetrics, Nov. 1920> 에 마음을 빼앗겼다. 밴팅은 그 자신도 췰저, 스콧, 파울레스코의 뒤를 이어 췌관 결찰을 이용한 추출물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밴팅은 11월 6일에 포도당 대사와 당뇨병에 대한 연구를 해오던 토론토대학교의 생리학자 매클라우드John Macleod(1876~1935)교수를 찾아가 자신의 연구 계획을 밝혔다. 교수는 밴팅의 아이디어를 추진할 실험실을 마련하고 의과대학생이던 조수를 붙여주었다. 이 사람이 바로 이름도 멋진 베스트Charles Best(1899~1978)!

1921년 4월 14일에, 토론토대학의 생리학 연구소에서 개들의 췌관을 묶는 수술을 했다. 7주가 지나 췌장의 선포세포가 망가진 것을 확인하고 생리식염수로 추출물을 만들었다. 7월 30일에 당뇨병 개에게 주사해 혈당 개선과 생존 연장의 효과를 확인했다. 8월 4일에 처음으로 새로운 물질에 ‘아일레틴isletin ‘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isletin ; 랑게르한스 섬(islet)에서 온 물질


▲ 베스트, 개, 그리고 밴팅. 췌장을 떼어낸 개는 당뇨병에 걸려 2주를 못 넘기고 죽었다. 이런 개에게 아일레틴을 주사해 10주 동안 살게 했다. 김민아 기자

11월 17일에는 상대적으로 선포세포가 미성숙한 자궁 속의 송아지cattle foetal의 췌장 역시 효과가 좋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일반 소들의 췌장에도 단백분해 효소의 방해 없이 추출해내는 방법을 개발했다. 이제부터는 도살장에 널려 있는 소-나중에는 돼지까지-의 부산물인 췌장을 이용해 마음껏 추출물을 만들게 됐다.

1922년 1월 11일에 아일레틴이 처음으로 당뇨병을 앓는 14세 소년에게 주사됐다. 혈당은 내렸지만 주사 부위에 염증이 생겨 환자의 상태는 더 나빠지고 말았다. 대서양 건너 췰저나 파울레스코도 여기까지는 도달했었지만 그 이상은 나아가지 못했다.

매클라우드 교수는 불순물이 염증의 원인이라 판단해 알버타 대학교의 생화학자 콜립James Bertram Collip(1892~1956)을 불러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합류 시기는 자료마다 조금씩 달라 12~1월, 하여간 그 해 겨울). 콜립은 생리식염수 대신 알코올을 이용해 추출물을 얻어 순도 높은 아일레틴을 만들었다.

6주 만에 다시 주사를 맞은 소년의 혈당은 하루 만에 520 mg/dl → 120 mg/dl 로 떨어졌고 기력도 회복했다. 소년은 이후로 27세에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13년을 더 살았다. 발병 1~2년 만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비교해 보면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콜립의 방식은 대량 생산에는 맞지 않았다. 봄이 되자 아일레틴 재고는 바닥나고 말았다. 이번에는 베스트가 코노트 연구소Connaught Laboratories의 도움을 얻어 다량생산의 길을 텄다. 5월 3일에는 처음으로 아일레틴 대신에 e 없는 ‘인슐린’이란 이름이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5월에는 대규모 임상 시험이 준비됐고, 5월 30일에는 미국 제약사 일라이-릴리Eli Lilly & Co가 연구 지원을 대가로 미주 지역 독점 생산권을 토론토대학교로부터 얻었다(연구 팀은 인슐린에 대한 특허권을 이미 토론토 대학에 0.5달러에 양도했었다). 이제 상업적인 생산의 길도 열렸다.

유럽 대륙의 불운한 경쟁자들과 달리 밴팅은 3개월 만에 추출물을 얻었고 임상에서 효과와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923년 스톡홀름에서 밴팅과 매클라우드에게 노벨상 공동 수상이라는 초청장을 보내 왔다.

인슐린이 이토록 단기간에 노벨상을 안겨다 준 것은 당시 당뇨병 치료법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슐린은 곧바로 환자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는 기적의 약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췌장이 당뇨병의 원인이며 췌장에 답이 있다던 메링과 민코프스키의 실험에서 시작해 개의 췌장 추출에서 더 나아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소와 돼지의 췌장 추출물로 나아갔다. 그들은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순도 높은 인슐린을 생산해내어 마침내 당뇨병을 완치시킬 수는 없지만 환자의 건강 상태를 호전시키는 약물을 췌장에서 얻은 것이다. 폰 메링과 민코프스키의 연구로부터 딱 33년이 걸렸다.

다양한 인슐린; 진화하는 인슐린

[Regular Insulin]

최초의 인슐린 즉, 밴팅 팀이 소의 췌장에서 추출해낸 아일레틴은 신속하면서 단기간 작용(quick- and short-acting) 하는 인슐린으로 soluble insulin, regular insulin, 혹은 R 이나 Actrapid(act-rapid; 속효성)로 불렸다.

심한 당뇨병환자에게 하루 2~4회, 식전 30~45분/취침 전에 피하주사 했다.

식전에 주사한 이유는 뭘까? 식후에 생기는 고혈당 상태를 인슐린으로 인한 저혈당 상태로 ‘덮어 씌우기’하기 위해서였다. 취침 전에도 추가로 소량 주사하면 야간에 생기는 혈당 상승을 조절할 수도 있었다. 가벼운 경우에는 아침 식전에 한번 혹은 아침 저녁 식전에 추가해 하루 두 번도 주사했다.

주사 용량을 결정하기 위해 24시간 오줌에서 당이 검출되지 않을 때까지 서서히 용량을 올렸다. 만약 오줌에서 당이 검출되면 일중 어느 시기의 것인지 확인해 해당 시기의 인슐린 용량만 올렸다(1925년 9월에 있었던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밴팅이 밝혔다.).

[Protaimine-zinc-NPH Insulin]

RI는 환자들의 생리적 요구에 미치지는 못했다. 약효는 2~4시간에 최고조에 달해 8시간 정도 지속됐으니 이론적으로 하루에 3번은 맞아야 했다. 아침 일찍 혈당이 오르는 것을 막아주려면 환자들을 한밤중에 깨어 주사를 맞도록 해야 했다. 귀찮아서 자기 전에 주사했다가는 자다가 저혈당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약효가 좀 늦게 나타나서 오래 지속되는 인슐린이라면 자기 전에 부담 없이 맞고 잘 텐데.


▲ 사진1.무지개 송어. 프로타민은 이 동물에서 얻는다.사진2.크로 August Krogh 사진3.하게도른 Hans Christian Hagedorn 사진4.쇼팽 연습곡 작품 10의 3, 일명 <이별의 노래>. 악상 기호 lento ma non troppo 의 뜻은 ‘너무 느리지 않게’ 김민아 기자

민물 송어 river trout에서 해답이 나왔다. 송어의 정액에서 얻은 염기성 저분자량의 단백질 프로타민protamine을 결정형crystalline 인슐린에 첨가하자 원하던 대로 작용이 느리고 오래가게 됐다. 이것이 바로 1936년에 도입된 프로타민 인슐린protamine insulin (PI)이다.

2년 후 캐나다의 코놋연구소는 PI 에 아연zinc을 첨가해 작용 시간을 훨씬 더 늘린 프로타민 아연 인슐린 현탁액 protamine zinc insulin suspension (PZI)을 선보였다.

1946년에 덴마크 노르디스크 제약사의 하게도른Hans Christian Hagedorn 은 작용시간이 길어진 아이소페인 인슐린isophane insulin 을 개발했는데 유명한 NPH Neutral Protamine Hagedorn다. 작용 시간이 늦고 오래 가기에 actrapid 의 반대말이라 할 수 있는 insulatard 라고도 불렸다.

NPH의 가장 큰 장점은 속효성 인슐린(RI)과 혼합 주사도 가능해(PI 는 불가능했다) 아침과 저녁 식전 하루 2회만 주사해도 인체의 생리적 기전과 유사하게 혈당을 조절할 수 있었다.

Actrapid; rapid action ; RI 속효성 인슐린

NPH; insulatard; tard insulin; tard 느린, 지체된

미국에 체류하던 노벨상 수상자인 덴마크 생리학자 크로그August Krogh(사진21874~1949)는 인슐린이 개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토론토로 달려갔다. 밴팅과 베스트로부터 인슐린 제조권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가 1922년 10월에 덴마크에서 처음으로 인슐린 생산 관한 실험을 시작했다. 1923년에 하게도론 Hans Christian Hagedorn(사진31888~1971)과 공동으로 비영리적 제조회사인 노르디스크(北유럽) 인슐린연구소 Nordisk Insulinlaboratorium를 세웠다. 2년 뒤에 세워진 Novo Terapeutisk Laboratorium 와 더불어 덴마크는 미국 다음가는 인슐린 생산국이 됐다. 나중에 이 두 회사가 1989년에 합병해 세계 최대의 인슐린 메이커인 Novo Nordisk 로 등극했다(자료 출처; 노보 노르디스크 홈페이지;www.novonordisk.com)

[Lente Insulins]

1953년에 완충액을 바꾸고 과량의 아연 함량이 조절돼 작용시간이 더욱 길어진 렌테 인슐린 Lente insulin (느리게 연주하라는 lento 에서?사진4) 시리즈 즉, 울트라렌테Ultralente, 렌테Lente, 세미렌테Semilente 가 등장했다. 이들은 몇 년 사이에 세계 인슐린 시장의 1/3을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

작용을 지연시키는 성분은 단백질이 아닌 금속 아연이므로 알러지 반응도 줄었다. 하지만 NPH 와 달리 RI 와 혼합해 사용할 수는 없었다. 렌테가 PI 나 NPH 와 유사한 작용 곡선을 가지는 반면, 세미렌테는 RI 와 NPH 의 중간 정도 작용을, 울트라렌테는 훨씬 더 길어진 작용시간을 보이는 것이 강점이다. 점점 더 인슐린의 선택 폭이 넓어져 갔다.

[Pre-mixed insulin]

많은 의사들이 정해진 용량의 인슐린을 처방하므로 아예 미리 혼합된 인슐린이 시장에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가장 흔한 것은 단기작용 50% + 장기작용 50% 로 혼합된 것과 단기작용 30%+ 장기작용 70%이다.

[Monocompoment Insulins]

밴팅과 베스트가 만든 아일레틴은 개의 췌장에서 만든 인슐린이었지만 상업용으로 생산된 인슐린들은 소(미국과 영국)나 돼지(덴마크)의 췌장을 이용했다. 이런 동물성 인슐린에는 섞인 미량의 불순물들이 알러지 반응이나 지방위축lipatrophy 변성 같은 과민반응 부작용을 일으키곤 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단일성분 인슐린(MC)mococomponent insulin 이 1973년에 나왔다.

1982년부터는 돼지porcine 인슐린을 효소 처리하여 인간 인슐린과 구조가 똑같은 인간 단일성분 인슐린human MC insulin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합성된 인간 인슐린 ]

1982년에 노보가 돼지 인슐린으로부터 만든 인간 MC 인슐린을 미국에서 시판하자 인슐린 제조의 원조라 할 일라이-릴리는 아예 사람의 인슐린을 합성해 최초의 합성synthetic 인간 인슐린인 휴물린Humulin®을 내놓아 대응했다.

잠깐, 사람의 인슐린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제일 좋은 방법은 건강한 사람의 췌장에서 얻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 차선책으로 이제껏 소나 돼지의 췌장에서 인슐린을 얻은 것 아닌가? 그나마 동물성도 잘 처리해 이제 인간 인슐린과 똑 같은 수준까지 왔는데, 새삼 인간의 인슐린을 합성한다니, 어떻게?

바이러스에게서 한 수 배웠을 것이다. 바이러스란 녀석은 유전자만 달랑 들고 세균의 몸 속에 들어가 세균의 단백 합성기구를 이용해 바이러스가 원하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기막힌 재주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인간 인슐린에 대한 DNA를 박테리아 유전자에 심어서 인슐린을 만들라고 하는 것이 유전자 재조합 방식이다. 박테리아는 자신의 단백질 합성 기구를 이용해 인간의 인슐린을 아주 착실하게 잘 만들어낸다. 미국 애플사에서 설계한 아이폰을 중국 공장에서 만드는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방식처럼 인슐린을 만드는 셈이다.

물론 어느 순간에 갑자기 가능해진 일이 아니다. 인슐린 같은 단백질을 합성하기 위해서는 단백질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아이폰 같은 스마트폰을 만들기 위해서 아이폰을 일단 분해해서 구조를 알아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국 생화학자 생어 Frederick Sanger (1918~ )는 1953년에 소의 인슐린 아미노산 배열을 알아냈다. 인슐린은 인간에게 그 구조가 알려진 최초의 단백질이 됐고 생어는 그 공로를 인정 받아 1958년에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 생어와 그가 밝혀낸 소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 김민아 기자

1969년에는 호지킨Dorothy Hodgkin(1910~1994) 이 X-선 회절법으로 인슐린의 입체 구조를 알아냈다. 1972년에 폴 버그 Paul Berg 등이 유전자 재조합 기술에 성공하자 이 분야가 많은 연구들이 집중됐다. 1977년에 굿먼Russell P Goodman 과 러터 William J Rutter는 흰 쥐의 인슐린 DNA 를 대장균의 DNA 에 심어 넣어 대장균이 쥐의 인슐린을 생산하게 했다. DNA 재조합 기술이 성공한 것이다.

1978년에 일라이-릴리와 지넨텍 Genentech은 사람 인슐린 DNA를 대장균의 DNA에 심어 넣어 대장균이 사람의 인슐린을 생산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1980년에 유전자 재조합 기술로 만들어진 인슐린 즉 휴물린을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사했다.

동물성 인슐린은 사람의 인슐린과 아미노산은 조금 다르다. 소는 3개 다르고 돼지는 1개 다르다. 그래서 돼지 인슐린이 사람 인슐린과 더 가깝다. 과민 반응도 좀 더 덜하고. 하지만 이제 사람 인슐린이 나온 이상 의사들은 이왕이면 동물보다는 인간 인슐린이 좋다고 권장했고, 동물성 인슐린은 1980년대 이후로는 인간 인슐린으로 거의 다 대체됐다.

[인간 인슐린 유사품 human insulin analog(ue)]

insulin aspart (NovoLog®/NovoRapid®;노보-노르디스크)

insulin lyspro/lispro (Hulalog®;릴리).

insulin glargine (Lantus®;사노피-아벤티스)

insulin glulisine (Apidra®;사노피-아벤티스)

insulin detemir (Levemir®;노보-노르디스크)

대장균 대신에 효모yeast 를 이용한 유전자 재조합 인슐린 유사체인 insulin aspart 가 1987년부터 생산됐고, 1989년에는 덴마크의 노보와 노르디스크가 합병해 일라이-릴리를 앞서는 세계 최대의 인슐린의 생산자로 등극했다.

인슐린 탄생의 역사와 궤를 같이 했던 릴리는 전세를 만회할 야심작을 insulin lyspro(lispro)를 개발해 1996년에 영국에서 먼저 승인을 얻었다.

2002년에는 insulin glargine가 영국에서 승인을 받았다. 이런 인슐린 유사품들은 이름들이 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사람 인슐린 베타 체인(B)의 끝에서 세 번째-두 번째 즉 B 28,-B29의 아미노산이 Pro-Lys 인데 Lys-Pro로 뒤집은 것이 insulin lys-pro다. 이렇게 하면 흡수가 빨라진다.

insulin aspart 는 B28 의 proline 자리에 aspartic acid를 넣은 것으로 이러면 작용이 빨라진다.

insulin glu-sine 은 B3 의 asparagine 대신 lysine , B29의 lysine 대신 glutamic acid 로 교체한 것이다.

insulin gl-argine 은 알파 체인의 21번 째 위치 즉 A21 의 alanine 대신 glycine , B말단에 arginine 을 2개 연속 첨가했다.

insulin detemir 는 B29 lysine 에 지방산인 myristic acid 결합 시켜 흡수는 빠르게 하고 알부민과의 결합성을 높여 작용은 늦게 만들었다.

이렇게 아미노산을 살짝 바꾼 이유는 흡수의 속도나 작용 속도를 “내맘대로 ”하여 저혈당의 위험을 없애고 좀더 진짜 인슐린처럼 작용하게 만들기 위해서다.

인슐린들의 발전사를 정리해 보면 시대에 따른 유행이 보인다. 1920년대에 처음 등장한-1940년대에 등장한 페니실린보다 더 빨리 태어난-인슐린 즉 RI 는 동물에서 얻은 인슐린이었고 불순물과 짧은 약효가 문제였다. 곧 프로타민이나 아연을 첨가한 인슐린이 개발돼 작용 시간을 늘려 쓰게 되었고 단일 성분 인슐린이 등장해 고순도의 (동물)인슐린을 쓸 수 있었다.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인슐린 유전정보를 세균이나 곰팡이 유전자에 삽입해 일종의 OEM으로 생산한 합성 (인간)인슐린의 시대가 와서 과민반응이나 지방위축이 사라졌다. 더 나아가 인슐린의 분자구조를 변경해 (인간 인슐린보다) 좀 더 효과가 좋고 안전한 인슐린 유사품의 시대가 도래했다.


식이요법의 발견

식이 요법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나 인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가 깊다. 1798년에 당뇨환자에게서 요당(療糖)과 혈당(血糖)이 모두 높은 것을 확인했던 롤로John Rollo는 한 해 전에 육식(肉食)으로 하는 식이요법이 가장 좋다고 주장했다.

1871년에 부샤댜 Apollinaire Bouchardat 는 프러시아-프랑스 전쟁Prussia-French War 중 적군에 포위돼 본의 아니게 식이요법을 해야 했던 파리의 당뇨병 환자들의 오줌에서 당분이 사라진 점에 착안해 글루텐 밀이나 보리 안에 든 단백질 성분으로 만든 빵과 채식을 권장하고 술을 끊는 식이요법을 주장했다.

인슐린이 발견되기 직전인 1919년, 록펠러 연구소의 저명한 당뇨병학자인 앨런 Frederick Madison Allen(1879~1964)이 이른바 기아요법飢餓療法;starvation therapy을 내놓았다. 그는 어차피 몸에서 이용을 할 수 없는 영양분이므로 섭취를 줄여 케토 산증diabetic ketoacidosis에 빠져 죽는 것을 방지하자는 취지였다. 효과가 있는 환자도 있었지만 부작용으로 굶어 죽는 환자도 있었다. 그의 치료법으로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게 된 사람은 얼마 후 인슐린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앨런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슐린이 등장해서 사용 중이던 1926년에 보스턴의 죠슬린 Elliot Joslin 은 금식과 규칙적인 운동으로 당뇨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지금은 앨런이나 죠슬린의 방식보다는 훨씬 더 순화된 식이요법을 사용한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