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태 영보의원 원장

“애기 피검사할 때 혈액형 검사도 함께 할까요?”
“혈액형 검사는 뭔디요. 아니 빈혈 검사만 해주셔잉.”
옆에 서있던 애기 할머니가 의사에게 한발 다가서며 급히 제동을 건다.
“왜! 피검사하는 김에 같이 하면 다음에 피 안 빼고 좋을 턴데.”
나는 시큰둥하게 말을 받으며 애기 손가락에서 피 한방을 빈혈 측정 장비에 떨군다.
할머니는 의사가 뭘 더 할까봐 며느리 품에 있던 애기를 빼앗듯이 안아 애기 뺨에 입을 맞추며 진찰실을 나간다.

며느리는 좀 어색한 듯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내 앞에 앉아 검사 결과를 듣고 이유식에 대해 상담을 했다.
“어머니, 하늘이 다 정상이래요.”
할머니는 며느리의 얘기는 듣는 둥 마는 둥 손자만 가슴에 안아 어르며 진귀한 보물을 보는 듯 애기의 얼굴에 눈을 박고 혼잣말인지 며느리 들으라하는 말인지 웅얼거린다.
“야가 우리 전주 이씨 가문에 장손인디. 그럼 다 정상이야지. 안그람 큰일 나지잉.”
“선상님여, 우리 하늘이 애비 기억하시지여 잉. 애비가 국민핵교 댕길 때꺼정 이 병원에서 컷는디.”
“아 그럼 기억만 하겠습니까? 지금도 건강하지요?”
의사는 허허 웃으며 쉽게 대답을 한다.

의사는 문득 20년 전쯤 기억을 꺼내어 펼쳐 본다.
한 곳에서 30여년 개업을 하다 보니 잔잔한 기억은 채로 걸러지듯 솔솔 다 빠져나가고 굵직한 기억만이 자리를 잡고 있다.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가 하늘이 애비 엄마였다.
의사는 그 애기 엄마의 말이 구수하고 유쾌해서 기다리는 환자를 밀어놓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기분으로 맞장구를 쳐가며 말을 주고받았다.

애기 엄마의 말에 의하면 전주 이씨 가문에 시집왔는데 남편이 3대 독자라 애를 많이 낳으려고 낮에는 남편 먹일 보약을 다렸고 밤에는 무심한 남편을 살살 어루만져 기름진 밭에 씨를 뿌린 후 잠을 잤지만 들어서라는 애는 없고 살만 피둥피둥 올랐다.
남편의 기둥은 항상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애써가며 손으로 입으로 기둥을 세워가며 어쩌다 뿌린 씨도 밭에 도달하기 전에 엄한 곳에서 흩어져 이부자리만 얼룩졌다.
외간 남자 경험이 없는 여자가 생각해도 남편의 기둥은 볼품없이 작고 가늘었으며 기둥 아래 달랑거리는 알집도 비었는지 쭈그러져 있었다.
왜 이 가문에 자손이 귀한지 몇 년이 지난 후에 알게 되었지만 애기 엄마는 불공드리는 심정으로 매일매일 밤마다 남편에게 정성을 다해 기둥을 세웠다.

몇 년이 지났고 애가 안 들어서 소박맞을 즈음에 달거리가 없어졌다.
단박에 산부인과를 갔고 임신을 확인했다.
달이 차기도 전에 애기는 일찍 세상에 나왔고 첫 울음은 고고했다.
엄마는 애기를 처음 보는 순간에 얼굴도 안보고 탯줄도 젖히고 고추부터 눈여겨보았다.
아빠 것을 닮았나!
달려있기는 있는데 흔적만 보인다.
그래도 남자 아이라 대를 이을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아픔에 눈을 감았다.

시골에서 애기는 자랐고 학교 갈 나이에 병원 근처로 이사를 와서 내 병원에 다녔다.
바싹 마른 아들의 손을 잡고 별 증상이 없어도 병원을 다녔다.
콧물만 흘려도 왔고, 밥을 잘 안 먹어도 왔고 똥이 딱딱하다고 왔고, 밤에 기침한다고 왔다.
그 때에 퉁퉁히 살찐 애 엄마는 의사 앞에 앉으면 매번 같은 말로 말문을 열었다.
“선상님여. 우리 아 거시기 좀 봐 주시겠스라우!”
“선상님여. 이담에 결혼 할 수 있겠스라우?”
나는 엄마에게 가족 내력을 여러 번 들어 그녀 가슴에 박힌 두려움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고 그러기에 수시로 아들의 성기를 살펴보았다.
고추는 나이에 비해 작았고 방울도 또한 땅콩처럼 작았다.
호르몬 검사와 염색체 검사에 이상 소견은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을 시키지만 나 자신도 확신이 없었다.
.
아들은 커가고 엄마는 늙어가며 병원 오는 횟수는 적어졌다.
대학을 마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아들은 겉으로는 이상이 없었다.
어느 날 아들은 어머니에게 머뭇거리며 말을 끄집어낸다.
“엄니!”
“나 결혼하면 안될까?”
“뭐시라고…야가 뜬금없이 뭔 말이다냐.”
엄마는 놀랬고 당황했으나 반가운 말에 얼굴을 돌려 아들을 빤히 본다.
“엄니, 실은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임신을….”
아들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오매, 참말이다냐.”
엄마는 눈을 크게 뜨고 아들에 입을 보고 또 보며 몇 번을 중얼 거렸다.
“뭔 일이 요로코롬. 우리 아들이 남자 구실을 하는 겨?”
“굴러 들어온 복인디….”
엄마는 세상에 제일 반가운 날이었다.
산 아래 용하다는 사주팔자 집에서 결혼 날짜를 받았고, 신 내린 박수 무당집에 복채를 두둑이 올리고 아들딸 자손이 대추나무에 대추열리 듯 많이많이 주렁주렁 열리게 해달라고 손바닥에 불나도록 빌고 빌었다.

손자 하늘이는 예정일에 매끄럽게 자연 분만을 했고 우렁찬 첫 울음을 하늘에 토해냈다.
하늘이 내려준 사내 아이였다.
하늘이 점지 했기에 이름도 ‘하늘’이라 지었다.
이제부터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고 할머니는 하늘이를 처음 안았다.
그리고 하늘이의 얼굴도 보기 전에 배냇저고리를 벗기고 하늘이의 고추를 보았다.
“오매. 하늘이 꼬추가 내 엄지손가락 만하네. 그라고 방울은 대추알만하고 잉.”
할머니의 큰 소리에 며느리는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린다.
할머니는 박수무당에게 빌듯이 혼잣말로 한없이 중얼거리며 흐르는 눈물을 몰래 훔쳤다.

아들이 커서 지 애비처럼 성기가 작아 아기를 잘 못 낳으면 어쩔까, 여태껏 마음에 감추고 살아왔는데. 그런데 손자 하늘이는 달랐다.
그 동안 옆집 앞집 동네 백일잔치에서 보아온 고추처럼 잘 생겼지 않았는가!
할머니는 손자 하늘이를 보는 순간에 박수무당의 은덕이라 생각했다.
전주 이씨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도록 박수무당이 씨를 바꿔서라도 점지해준 것이라 믿었다.

아들이 중학교 다닐 때에 고추가 크는데 도움이 된다고 포경 수술을 하며 비뇨기과 의사에게 의논 후 정액 검사를 했다.
비뇨기과 의사는 확신 없이 말했다.
“글쎄요. 정자 운동과 양이 적어서 임신은 안 될 것 같은데. 성인이 돼서 다시 한 번 더 검사를 하죠.”
그 후 엄마는 더 이상 검사를 포기했다.

그런데 손자 하늘이가 태어났고 고추가 왕고추이고 방울이 대추방울이니 나만 입 꾹 닫고 있으면 앞으로 자손이 번성하여 대대손손이 이어지는 가문이 될 터니….
“괴안타, 괴안타. 며늘애가 결혼 전에 다른 남자 씨를 갖고 왔어도 이제 와 어찔 건데, 어찔 건데….”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피검사 후 몇일 지나 할머니가 혼자 병원에 왔다.
“저가 선상님 찾아온 거는…. 앞으로도 하늘이가 계속 병원에 다니며 예방 주사도하고 아프면 약도 받아야 하는데, 다른 병원에 가면 혹시 피검사하며 혈액형 검사도 하게 되어 애비랑 다른 혈액형이 나와 혹시 친 손자가 아닌 것이 밝혀진다면….”
할머니는 목이 타는지 잠시 말을 쉬었다.

“만약에 며느리가 결혼 전 다른 남자의 애를 갖은 후 우리 아들이랑 결혼해 낳은 아이로 밝혀진다면 집안에 풍파가 일 것이기에.”
“지는요 임신했다기에 진즉에 알았스라. 애비가 무정자증이라 애가 없다고 오래전 비뇨기과 의사가 알려줬는지라. 그런데 씨 다른 자식이라도 없는 것보다 나을 것이고.”

“선상님... 요즘 유전자 검사로 쉽게 친자 확인이 된다지만….”
“지는요 안하겠쓰라.”
“하늘이가 내 친 손주라 생각하며 그냥 내 복이려니 생각하고 살 것스라우.”
“선상님, 부탁합니다.”
“앞으로도 하늘이 혈액형 검사 얘기는 하지 말아주시여잉.”

할머니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찍으며 일어섰다.
나도 혼자 중얼거렸다.
“자식은 가슴으로도 낳을 수 있지.”

나이 들어가니 할 일은 줄고 생각은 늘고
남은 세월은 짧은데 하루 시간은 길어지니
자연스레 마루에 앉아 방 안을 들여다보고 밖을 내다봅니다.
이 방에서 애들을 키웠구나.
저 밖에서 세상을 살았구나.

하나둘 지난 추억이 쌓이니 가슴에 얼음이 얼고 새싹이 돋고
미소가 피고 눈물이 흐릅니다.
마루에 작은 소반 무릎에 올려놓고 한 줄 두 줄 써내려갑니다.
아이들은 나무가 되었고
세상일은 구름이 되었네.

소반 위에 써놓은 글
남이 볼까 부끄러워 무릎 아래 저만치 미뤄놨는데
가을바람이 불어 글을 날려버렸네.
부끄러워 어쩌나
고마워서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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