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이화여대 강민아 교수
근거 기반한 R&D 지원…"보건의료기술 공공재로"
"한국, 수혜국→공여국 경험, ODA 분야에서 강점"

한국이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질수록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한 국제 보건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 한국은 국제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된 유일한 국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ODA 방식'을 제안하며 변화를 꾀하고 있다.

단순히 자금을 지원했던 기존 ODA 방식에서 벗어나 연구개발(R&D), 기술 이전, 역량 강화, 파트너십 등을 통해 새로운 시너지를 창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다. 이런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앞장선 곳이 국제보건기술연구기금(Research Investment for Global Health Technology Foundation, 이하 ‘라이트재단’)이다. 라이트재단은 지난 2018년 7월 보건복지부,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 국내 생명과학기업 등이 민관협력으로 설립한 비영리 재단법인이다.

라이트재단은 재정 지원과 최첨단 R&D를 결합해 시너지를 극대화한다. 이같은 방식이 성과를 내면서 국제 보건 분야 ODA가 양적인 측면뿐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에 청년의사 자매지 ‘Korea Biomedical Review(KBR)’는 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이화여대 행정학과 강민아 교수와 함께 한국의 ODA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다. 인터뷰는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이 진행했다.

(왼쪽부터)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이화여대 행정학과 강민아 교수는 라이트재단의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KBR).
(왼쪽부터)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이화여대 행정학과 강민아 교수는 라이트재단의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에 대해 설명했다(ⓒ청년의사).

박재영: 라이트재단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된다고 들었다. 라이트재단이 지향하는 ODA 방식은 무엇인가.

김한이: 라이트재단이 설립되기 5년 전 일본 정부가 글로벌헬스기술진흥기금(GHIT)을 운용한 방식을 벤치마킹했다. 바로 정부 ODA 자금을 활용해 세계적인 공중 보건 향상에 기여한다는 목표로 진행하는 연구를 지원하는 것이다. 라이트재단의 목표는 GHIT와 조금 다르다. 특히 한국은 세계 최빈국에서 공여국으로 빠르게 전환한 비교적 '젊은' 공여국인 만큼 이런 경험을 살린 독특한 방식 가능하다.

지난 2018년 라이트재단을 설립했을 때 한국은 ODA에 대한 기여를 꾸준히 늘리겠다는 의지와 함께 R&D 분야에서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 받았다. 이에 재단 설립을 계기로 금전적 지원을 넘어 국가 특성을 활용해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한국은 현재 R&D 역량과 강력한 공중보건체계를 갖췄지만 한때 가난과 식민지배를 경험한 역사도 갖고 있다. 이런 독특한 배경은 한국이 보건의료기술을 시장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닌 '국제적 공공재(Global Public Goods)'로 개발하고 제공하는 데 기여하는 강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공중보건과 건강 형평성의 가치에 기반을 둔 혁신이다.

강민아: R&D에 투자하는 기업이나 기관들은 많다. 그러나 라이트재단은 공익적 목적으로 투자한다는 점에서 다르다. 세계적으로 건강을 증진하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지만 형평성을 목표로 공중보건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곳은 적다.

라이트재단의 또 다른 강점은 근거에 기반해 R&D를 지원하는 것이다. 근거를 바탕으로 어느 지역에 어떤 백신이 필요한지 결정한 후 연구를 진행한다. 현재 R&D는 공급 중심적이다. 그러나 공급자가 원하는 것이 아닌 수요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박재영: 최근 국제사회가 한국 ODA 투자에 거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GDP 대비 ODA 예산은 OECD 국가 중에서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강민아: 한국의 ODA 규모가 크진 않지만 많은 국가가 한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ODA 예산을 줄이는 반면 한국은 최근 들어 관련 예산을 크게 늘리고 있다. 세계적으로 긴축재정을 고수하는 추세에서 한국이 ODA 분야에 막대한 예산을 배정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해외에서 한국을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빠르게 발전한 경험은 한국만이 제공할 수 있다.

박재영: 라이트재단 재원은 대부분 한국 정부와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원금은 어떻게 활용되나.

김한이: 지난 5년 동안 약 726억원(5,489만 달러)를 들여 55개의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그중 가장 큰 분야는 백신과 진단 키트이며 치료제와 디지털헬스 플랫폼 관련 프로젝트도 일부 지원했다. 또한 지난해 아프리카와 아시아 7개국에서 근거 창출을 위한 프로젝트 7건을 선정해 지원하기 시작했다. 올해부터는 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 보조금도 지원했다.

청년의사 자매지 ‘Korea Biomedical Review(KBR)’는 라이트재단의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왼쪽부터) 이화여대 행정학과 강민아 교수, 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KBR)
청년의사 자매지 ‘Korea Biomedical Review(KBR)’는 라이트재단의 공적개발원조(ODA) 방식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왼쪽부터) 이화여대 행정학과 강민아 교수, 라이트재단 김한이 대표,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KBR)

박재영: 라이트재단 지원을 받는 한국 기업도 있나.

김한이: 제품개발연구비를 지원받기 위한 조건 중 하나가 프로젝트 팀에 한국 기업 혹은 한국 단체 등이 하나 이상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빌앤멜린다게이츠재단이 국제 보건 R&D에 더 많은 한국인을 참여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한국인이 적기에 그 수가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라이트재단이 기업의 사업을 돕는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대답은 '아니오'다. 라이트재단의 기금을 지원 받으려면 해당 연구가 세계 공중보건에 기여하기 위해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해야 한다.

기금 지원과 관련한 제안서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부분은 자원이 한정된 지역에서 필요한 사항을 충족할 수 있는지다. 예를 들어 백신, 치료제의 경우 효과성·안전성을 담보하는 동시에 고온 환경에서도 안정적으로 활용 가능한지, 중저소득 국가에서 적절한 비용으로 조달 가능한지, 쉽게 투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등을 본다. 또한 기금을 지원해 개발한 제품이 지역 공중보건체계를 통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 국제 공공재로서 필수 보건 기술을 개발하는 곳에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개발된 제품이 고소득 국가에 공급될 경우에는 기업의 가격 정책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중저소득 국가의 경우 현지 정부가 공공 조달을 통해 유통할 수 있는 가격으로 공급해야 한다. 미충족 수요가 있는 국가에 공급하지 않으면 다른 제조업체에 해당 제품의 라이센스를 부여하는 계약 등을 포함해 ‘글로벌 액세스(Global Access)’에 대한 동의를 미리 얻는다.

박재영: 라이트재단이 제품 개발 후 현지 조달까지 지원한다는 뜻인가.

김한이: 조달 과정에 직접 도움을 주진 않는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가 권장하는 사례나 제품 특성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성공적인 조달을 위해서는 WHO와 기타 국제기구 또는 지원하는 국가의 정부 지침을 준수해야 한다. 앞서 언급한 효과성, 안전성, 온도에 대한 안정성, 작동과 구현의 용이성은 국제 공중 보건을 위한 제품 개발에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항으로 초기에 주요 이해관계자와의 조율이 필요하다. 라이트재단은 이해관계자를 위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박재영: 한국이 공여국이 된 지 10년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현금, 물품, R&D 등 다양한 지원을 시도했을 텐데 어떤 방식이 가장 가장 좋다고 보는가.

강민아: 지원 목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좋고 나쁨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앞서 말한 것 처럼 R&D에 지원하는 것은 한국 ODA만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또한 특정 국가를 직접 지원하는 '양자 원조'와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는 '다자 원조'가 있다. 다자 원조는 자원을 효율적·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지원을 하면서 배울 점이 없다는 게 단점이다. 반면 양자 원조는 지원 이후 어떤 결과가 도출되는지 직접 보고 배우며 경험을 쌓을 수 있다. 다자 원조를 통해서는 데이터나 경험을 축적할 수 없다. 국제기구와의 협력에 대한 평가를 통해 다자 원조의 단점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또한 단순히 한국의 이름을 알리는 것뿐 아니라 어떤 방식의 ODA가 효과적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박재영: 연구 개발 성과를 어떻게 측정하는가.

김한이: 재단이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원한 R&D 성과를 소개하기는 좀 이르다. 그러나 R&D 결과를 판단하는 방법과 해당 연구가 공중보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재단은 기금 지원을 통해 개발된 제품이 WHO '사전적격인증(Prequalification, PQ)'을 받거나 규제당국 승인을 통과할 수 있을지 추정한다. WHO PQ는 국제 수준의 공공 조달을 위한 중요한 단계이기에 의미가 크다. 지원한 제품 중 WHO PQ를 획득한 것은 없지만 오는 2028년까지 4개의 진단 키트와 백신에서 PQ 인증을 받는 것이 목표다. 이를 통해 말라리아, 뇌수막염, 콜레라, 결핵, 장티푸스 등을 예방하거나 확산을 막는 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질병은 중저소득 국가의 국민에게 영향을 미치며 전세계적으로도 건강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

강력한 보건체계를 통해 공평하게 배포되지 않는 한 아무리 좋은 도구여도 의미가 없다. 비록 현재 기금 규모로는 공중보건체계 강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는 어렵지만 인력 양성에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지원하고 싶다.

박재영: 라이트재단 상임이사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나.

김한이: 나중에 되돌아봤을 때 라이트재단이 소수 특권층이 아닌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백신, 의약품, 진단 키트 등을 개발하고 공급하는 R&D 지원에 대한 핵심 원칙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길 바란다.

핵심 원칙 중 하나는 겸손과 연대에 기반한 협업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강점을 인식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강점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중저소득 국가 파트너들은 문제와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에 한국도 현지 관계자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로부터 배워야 한다.

한국 파트너들이 세계 여러 지역에 도움이 된다면 매우 기쁠 것이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역사를 가진 부유한 국가라는 한국만의 독특한 경험이 다른 나라를 지원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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