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쿠바 아바나

본지는 앞으로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번 여행지는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에 이은 우리나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라틴아메리카로,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콜롬비아의 보고타에서 쿠바의 아바나로 가는 비행기는 아침 8시 42에 출발한다. 그래서 어제보다도 더 이른 4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5시 50분에 숙소를 나섰다. 여행 막바지에 연일 강행군이다. 하늘에는 먹장구름이 몰려들고 간혹 빗방울까지 떨어지는 가운데 공항에 도착한 것은 출발 2시간20분전, 출국수속을 마치는데 1간정도 걸렸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콜롬비아 현지 가이드가 일행들에게 후안 발데스 커피(Juan Valdez Cafe)를 한 잔씩 돌려 맛있게 마셨다. 후안 발데스 커피는 1927년에 발족한 콜롬비아커피생산자협회(Federacin Nacional de cafeteros; FNC)가 만든 상표다. FNC는 정부가 전혀 간여하지 않고 커피재배농가들이 자생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따라서 정부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커피재배농가의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나라에도 2014년에 후안 발데스 커피가 도입되었다.

마침 남미에서 돌아와 읽은 책에서 읽은 “50만 명이 넘는 콜롬비아커피농부들이 뜻을 모아 전국커피기금을 조성하고 6천개가 넘는 학교를 지었습니다. 36만 명의 아이들이 산악지대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는 글을 보면(1), 생산자의 수익을 보장하고 복지를 챙겨주는 공정무역의 대표적인 상표가 아닌가 싶다. 콜롬비아의 대표적인 커피생산지는 나리뇨이다. 콜롬비아 사람들은 나리뇨의 화산토는 커피나무에 특별한 성질이 더해주기 때문에 커피의 품질이 좋아진다고 믿는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조성된 콜롬비아의 커피농장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릴 정도라고 한다. 특히 반군들이 커피농장지역을 장악하고 있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다.

커피를 마시고는 출국장으로 들어간다. 탑승을 앞두고 새해인사를 나누었다. 콜롬비아 시간으로 새해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탑승구를 배정받지 못했는지 버스를 타고 계류장으로 나가 트랩에 오른다. 트랩에 막 오르는데 빗방울이 굵어진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보고타를 탈출할 수 있어 다행이다. 그런데 승객들이 모두 탑승했는데도 비행기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무려 55분이나 지난 다음에 계류장을 빠져나갔다. 늦게 출발하는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도 않는다. 옆에 앉은 라틴계 할머니가 ‘아비앙카 항공은 늘 이 모양이야’라고 투덜거린다. 리마에서 보고타로 올 때도 꼭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때도 아비앙카 항공이었던 것을 보면 그런 불평이 나올 법도 하다.


보고타에서 아바나까지는 3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아바나공항에 가까워졌다는 기장의 안내에 차창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파란 카리브의 바다가 매혹적이다. 비행기가 운항 중이라는 것을 잊고 뛰어내리고 싶어진다. 비행기가 늦게 출발했지만 운항 중에 조금 성의를 보였는지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15분 정도 일찍 아바나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신고대는 많이 열려있었지만 처리속도가 떨어지는 탓인지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입국신고 뒤에 수하물검사를

다시 하고, 작은 가방이 또 정밀검사를 받는 등 우여곡절 끝에 출국장을 빠져나와 버스에 올라타고 보니 오후 2시 45분이다. 아바나의 날씨는 높은 구름이 깔렸지만, 비가 올 기미는 없었다. 고산지대에 있는 보고타에서 낮은 지대인 아바나로 내려온 탓인지 불편하던 뱃속도 당기던 뒷골도 말끔해진다.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받은 첫 인상은 주변 환경이 잘 정리되었다는 느낌이다. 느낌은 언제나 변하는 것이지만.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공식 이름은 산 크리스토발 데 라 아바나(San Cristbal de La Habana)로 210만명이 살고 있다. 악어모양의 쿠바섬에서 눈에 해당하는 부분에 위치한 아바나는 1519년 스페인 정복자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세웠다. 1553년에는 산티아고 데 쿠바를 대신하여 쿠바 총독령의 수도가 되었다. 아바나는 스페인의 신대륙 식민경영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당연히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의 해적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이를 막기 위하여 후에루사 요새, 푼타 요새, 모로 요새 등이 만들어지는 등 요새도시가 되었다.(2)

쿠바는 지리적으로는 북아메리카에 더 가깝지만, 유카탄반도에서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여 넓게 보면 중앙아메리카에도 포함된다. 악어 모양으로 생긴 쿠바는 110.860㎢의 면적에 1,121만명이 살고 있다. 일인당 GDP는 19800달러(2013년 어림값)이며 명목당 GDP는 6,536달러라고는 하지만, 느낌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사탕수수 재배면적이 경작지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수출총액의 80~85%를 차지할 정도로 사탕수수는 쿠바경제의 바탕이다.

쿠바 섬에는 수천 년 전에 들어온 타이노족 등 원주민이 농경사회를 이루고 있었는데, 15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상륙한 뒤로 19세기까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 초부터는 원주민의 수가 격감하면서 농장을 일구기 위하여 아프리카에서 끌어온 흑인 노예가 1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카를로스 마누엘 데 세스페데스와 호세 마르티가 독립전쟁을 이끌었지만, 스페인의 군사 통치자 발레리아노 웨일러가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1898년 벌어진 미서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독립이 승인된 것은 1902년이지만 미국의 군정이 실시되었다. 1930년 마차도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10여년간 군사정권이 들어섰다가, 1940년 시행된 선거에서 쿠바 자유당의 바티스타가 승리하였다. 바티스타는 군부의 지지를 얻어 1952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다시 잡았다.

1959년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쿠바 혁명 이후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었으며, 특히 1962년 미사일 위기 때는 미국이 쿠바를 침공하기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봉쇄조치를 강화해왔고, 쿠바는 소련과 밀착하면서 버텼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 심각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2008년 건강문제로 피델 카스트로가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뒤를 이은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을 꾀하였고, 2014년 12월 18일 미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기에 이르렀다. 피델 카스트로는 얼마 전인 11월 28일 죽음을 맞았다. 카스트로식 사회주의 혁명이 남긴 성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시작되지 않을까?


첫 번째 방문지는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n)이다. 관광산업 역시 정부 주도로 이루어지는 까닭인지 외국의 단체관광객들은 먼저 이곳을 방문하도록 하는 모양이다. 바티스타 대통령시절 시민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착공한 광장이 준공된 것은 1959년 쿠바혁명이 성공한 다음이다. 완공된 후 혁명광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72,000㎡면적의 혁명광장은 세계에서 31번째로 큰 광장이다.(3) 5월 1일이나 7월 26일과 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는 1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모인다는 광장은 끝이 가물거릴 지경이다. 도로 건너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높이 109m의 기념탑은 아바나 뿐 아니라 쿠바 전체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다. 기념탑 뒤로는 혁명궁전과 쿠바정부청사 및 공산당청사가 있다. 기념탑 아래에는 18m 높이의 호세 마르티(Jos Julin Mart Prez) 조각상이 서 있다. 시인이자 혁명철학가였던 호세 마르티는 쿠바의 독립영웅이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래 「관타나 메라」의 노랫말을 쓴 시인이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라는 후렴구를 제외한 노랫말은 호세 마르티의 시집 『소박한 노래(Versos sencillos)』에 실린 여러 편의 시에서 한 연씩 따온 것이다. “나는 진실한 사람 /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 죽기 전에 /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 이 한 몸 바치리라 /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노랫말에는 조국 쿠바와 쿠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가수는 때로 자신의 노래에 담긴 운명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마르티는 1895년 4월 11일 열 명도 안되는 동지들과 관타나모 부근에 상륙하여 스페인 식민군대와 전투를 시작했고, 5월 19일 도스 리오스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는 생각의 열매를 시로 맺는데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한 시인이었던 것이다.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Guantaamo) 지방 출신 여자’를, ‘과히라’는 ‘여자 농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과히라 관타나메라’는 ‘관타나모 지방의 여자농사꾼’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나메라”는 1940년대 쿠바의 유명한 대중가수 호세이토 페르난데스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낳은 유행어였다. 스페인 출신의 작곡가 훌리안 오르본이 호세 마르티의 시와 당시 유행어를 버무려 사람들이 쉽게 부르고 공감할 수 있는 노래를 만든 것이다. 우리에게 아리랑이 있다면 쿠바사람들에게는 관타나메라가 있는 셈이다.(4)

참고자료

(1) 켈리 티머먼 지음. 식탁 위의 세상 25쪽, 부키 펴냄, 2016년

(2) 위키백과. 아바나.

(3) Wikipedia. Plaza de la Revolucin.

(4) 박병규 지음. 관타나메라와 관타나모. 트랜스라틴 6호, 97-105쪽,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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