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 토론회서 “적정 근로시간 자료 마련” 한 목소리…“환자 안전 문제로 접근해야”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과 길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연이어 근무 중 사망한 사건 이후 의사의 적정 근로시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의사의 과로사 문제 해결을 위해 정확한 통계자료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대한의사협회 김연희 법제자문위원은 지난 21일 용산 임시회관에서 열린 ‘의사 과로사 해결을 위한 적절한 방안 방안은 무엇인가’ 토론회에서 “우리나라 의사의 연간 평균 진료량이 OECD국가 중 가장 많지만 이러한 결과가 의사의 과로사까지 연결됐는지 입증할 통계자료는 없는 상황”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김 자문위원에 따르면 한국표준직업분류상 의사는 ‘전문가 및 관련종사자’ 중 ‘의료진료 전문가(의사·한의사·치과의사·수의사 포함)’에 해당하며, 고용노동부 한국고용직업분류 2018 개정판에서는 의사를 대분류-보건·의료직, 중분류-보건·의료직, 소분류-301 의사, 한의사 및 치과의사에 포함시켜 놨다. 이로 인해 의사만의 과로사를 별도로 조사한 통계자료가 없는 셈이다.

통계청이 발간한 ‘과로 및 스트레스에 의한 질환사망자 현황’(2004~2006년)에도 의사 직업군에 대한 별도의 조사자료가 없으며 산업중분류별 기준 중 ‘보건 및 사회복지사업 종사자’의 사망자 인원도 없다.

의사들의 스트레스와 관련한 자료는 의협 의료정책연구소가 발간한 ‘2016 전국의사조사’에 포함됐는데 의사들의 스트레스 인지율(96.5%)은 일반 국민(54.7%)보다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 진료의사의 주당 근무시간은 평균 50.0시간(전공의 66.9시간, 상급종합병원 의사 56.7시간)이며, 연간 근무시간은 평균 2,415.7시간, 평균 근무일수는 300.8일에 달한다.

김 자문위원은 장시간 근로 외에도 의사의 업무가 다른 업무에 비해 스트레스가 많을 것으로 추정하며 ▲의료의 공공재적 성격(진료거부권 없음) ▲업무의 응급성과 가변성, 사실상의 휴식 없이 24시간 대기해야 하는 근무형태 ▲업무시간 조절의 상대적 어려움 ▲높은 수준의 주의의무 ▲의료불신 및 의사에 대한 이중 잣대와 혐오감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김 자문위원은 “의사들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근로자는 전반적으로 과로한 상태이고 이는 단순히 근로시간이나 근로내용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전반적인 문제”라며 “이를 단순히 근로의 문제만으로 좁게 보면 근로자의 임금을 비용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 법과 계약을 통해 형성되는 근로조건의 왜곡도 주요한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김 자문위원은 또 “의사의 과로사 문제로 특정한다면 의사는 전문가로서 그 노동의 강도가 높고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며,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윤리수준도 높아 타 직업군에 비해 스트레스가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은 ‘육체적·정신적 과로가 아닌 스트레스가 문제된 사안에서 스트레스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성에 따라, 또 외부적 상황에 따라 사람마다 제각각일 수 있어 인과관계 판단이 쉽지 않다’고 보고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김 자문위원은 의사의 과로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계자료 작성이 선행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김 자문위원은 “다른 직업에 비해 근로시간이 길다고 해서 곧바로 과로재해로 연결되지는 않는다”면서 “정확한 통계자료를 통해 다른 직업군에 비해 유의하게 과로사가 많다고 판단될 때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 일단 응급의료행위와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의사들에 한정해서라도 통계작업을 진행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진 패널토의에서는 환자 안전을 위해 의사들의 적정근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백병원 응급의학과 이경원 교수는 “현재 병원들은 저수가로 인해 최소한의 의사 인력만 유지하고 있다”면서 “의사가 돈을 많이 번다는 사회적 시각이 있는데 돈을 조금 더 번다고 사망에 이르는 과도한 노동까지 해야 하냐”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는 의사들이 감내해 왔지만 이제는 환자 안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면서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지속 가능한 의료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의료계 내부적으로도 의사 근로에 대한 자료를 축적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대한병원협회 김병관 미래정책부위원장도 “과로와 스트레스는 과로사의 주요 원인이 될 뿐 아니라 환자 안전사고 발생 가능성에도 높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면서 “삶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최근 사회 분위기상 근로시간 단축은 세계적인 추세다. 의료인에게 헌신과 의무를 강조해온 인식의 전환과 의사들의 적정 근로시간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의료계가 선제적으로 근거 마련 및 방안 제시에 나서야 한다는 게 김 부위원장의 생각이다.

김 부위원장은 “의료인력의 수급 불균형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지만 우려나 이견이 다양해 합치된 해결 방안을 찾기 어렵고 이로 인해 근로시간 단축이나 환자 수 조정에 대한 협의안을 내놓기 힘든 상황”이라며 “의사의 근로 시간은 국가 관점에서는 보험재정, 국민 관점에서는 보험료 등의 비용과 연계된 문제다. 의료인 적정 근로시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선 의료계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담론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법조계에서도 의사들의 적정 근로에 대한 근거 마련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의료계가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법무법인 세승 조진석 변호사(의사)는 “장기간 근무나 노동시간 배치 등 근무의 정량적 평가 기준 자료는 상당히 확보됐지만 정성적 평가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근무인의 특성, 숙련도 등과 관련해서는 과로사와의 인과관계가 아직은 명확하지 않고 의학적·과학적 근거자료도 제한적”이라며 “과로 관련 법령제정이나 정책 수립, 입법 활동 내지 법원에서 과로와 관련 사안을 판단할 때 자칫 정성적인 평가가 부족한 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조 변호사는 이어 “의사들의 과로에 대한 지속적인 문제제기도 필요하다”면서 “방사선사들도 업무로 인한 산업 재해와 요양급여 신청에 있어 지속적인 문제제기로 제도 개선을 이뤄냈다”고 설명했다.

조 변호사는 의사들의 진료 외 부수적 업무를 줄이는 방안도 필요하다고 했다.

조 변호사는 “진료행위를 축소할 수 없다면 부수적인 행위를 줄여 업무 강도를 낮추는 것도 좋은 방안”이라며 “일선 진료현장에서는 페이퍼 워크에 대한 부담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조 변호사는 이어 “의료 행위가 아닌 서류 업무는 반드시 의사가 할 필요가 없다”면서 “전담 인력이나 제3의 인력을 통한 업무 분산이 필요하다. 의사들의 서류 업무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도 개선과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