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시위 참여 후 독립운동가로 살아간 의사들

3·1운동은 의학도의 삶을 바꿨다. 1991년 3월 1일,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던 한국인 학생들이 독립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그 이후 독립운동가로 살아갔다.

3·1운동 선두에 섰던 경성의전 한국인 학생들 중 32명이 재판에 회부됐으며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경성의전 한국인 학생 208명의 15%다.

이들은 체포돼 신문을 받으면서 독립을 원한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김상태 교수가 지난 25일 서울대병원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경성의전 2학년이었던 이강은 신문을 받으면서 “민족이 스스로 나라를 다스려 가는 것을 희망하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며 독립을 원한다고 말했다.

이강은 “현재 조선의 상황을 보면 조선 사람의 교육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고 산업 방면에서도 그렇다”며 “조선의 좋은 토지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매점을 하고 조선 사람은 눈물을 머금고 만주 등지로 이주를 학 있다. 그런 점 등에 대해 불평이 있으므로 독립을 희망한다”고 했다. 이강은 이후 신간회 북청지회 총무간사를 맡기도 했다.

경성의전 1학년이었던 전진극은 “조선은 수천년 역사를 갖고 있어서 도저히 일본과 동화될 수 없으므로 독립을 희망한다”고 했다.

3·1운동에 참여했지만 체포되지 않은 경성의전 학생들도 있다. 이들 중 일부는 이후에도 항일운동을 이어갔으며 체포돼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경성의전 학생이었던 김상우, 허정묵은 1919년 3월 20일부터 ‘조선은 일본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된다’는 뜻이 기재된 ‘반도의 목탁’을 2차례 배포해 독립운동을 독려했다. 이들은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각각 징역 10월 형을 받았다.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징역 7월 형을 받은 나창헌은 이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26년에는 무장투쟁 비밀 조직 병인의용대를 창설했으며 1933년에는 흥사단 원동반 제5반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3월 1일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식과 시위 행진에 동참하고 3월 5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남대문 앞 만세시위에도 참가했던 김영철. 한국의사100주년기념재단이 발간한 <열사가 된 의사들_의사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김영철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애국단, 조선독립대동단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서울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은 전국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김영철은 항일문건 국내 배포를 담당했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된 김영철은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3·1운동 학생 동원 책임을 맡았던 송춘근은 세브란스의전 스코필드의 도움으로 일제의 한국인 학살 만행이 촤영된 사진을 미국 선교회와 신문사에 보내기도 했다.

대한의사협회와 한국의사100주년기념재단이 지난 2017년 발간한 <열사가 된 의사들_의사 독립운동사>에는 이들 외에도 독립운동에 참가한 의료계 인사 155명의 명단이 공개됐다. 독립운동을 했던 의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적이 출간된 건 처음이다.

이 책은 ‘독립신문’을 발간한 서재필 박사, ‘몽골의 신의(神醫)’로 알려진 이태준, ‘압록강은 흐른다’ 등을 저서로 남긴 이미륵 등 의사 10명에 대한 독립운동사를 이야기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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