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이스라엘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동유럽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요르단을 찾았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

와디 무사를 떠난 우리는 1시 무렵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파는 곳에 도착했다. 매표소에서 알카즈네신전까지는 걸어가는 방법과 마차를 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이곳에서 페트라의 알카즈네신전으로 통하는 1.2km 길이의 시크협곡이 시작되는 밥 아스 시크(Bab as-Sī )까지는 800m이다. 걸어가는 것이 최선이었던 것이다.

‘바위’를 의미하는 페트라는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Esau)의 후손인 에돔(Edom)이 거주하던 세일산(Mount Seir) 인근에 있는 산악도시로 아라비아반도에서 이주해온 나바테아인이 세운 왕국의 수도였다. 나바테아사람들은 아라비아 사막을 무대로 한 유목민 종족 가운데 하나였다. 기원전 7세기 무렵 오늘날 예멘에서 출발하여 유프라테스강에서 홍해에 이르는 지역의 오아시스에 흩어져 살았다. 기원전 312년 알렉산드로스대왕 휘하의 안티고노스장군이 원정군을 파견하였지만, 나바테아사람들을 굴복시키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리타트3세(재위 기원전 87년 ~ 기원전 67년)가 부족을 통일하여 왕국을 세웠고, 하리타트4세 시절에 전성기를 누렸다. 로마제국의 초기 무렵 나바테아사람들은 유목생활을 접고 상업 활동을 주로 하게 되었다.(1)

고대 세계에서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나바테아사람들은 건조한 지역에서 살았던 만큼 물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다. 특히 농업부문에서는 많지 않은 빗물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는데, 땅을 야트막한 깔때기 모양으로 파고, 그 가운데 과일 나무를 한 그루 심었다. 비가 내리면 빗물이 나무쪽으로 흘러내려 땅으로 스며드는데, 날이 개면 지표를 덮고 있는 황토층이 건조되면서 스며든 물이 증발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2) 이처럼 물과 돌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났던 나바테아인들은 와디 무사의 바위틈에서 발견한 샘물을 페트라로 끌어들이고, 사막을 건너온 대상들에게 제공하는 한편 통행세를 받아 부를 축적하였다. 페트라 주변 100㎞안에는 물이 없었기 때문에 페트라는 자연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로 떠올랐다.

마차를 타고 가니 금세 밥 아스 시크에 도착한다 (좌) 협곡 안에서 고대 로마병사의 차림을 한 현지인들을 만날 수 있다(중), 처음에는 좌우 절벽 아래에 만든 수로를 바라볼 여유도 있었다(우)

나바테아사람들이 테트라를 수도로 삼은 것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이 오직 시크(The Siq) 협곡을 통해서만 세상과 연결되어 있어 방어에 용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페트라를 감싸는 바위산에 감춰진 시크협곡은 폭이 3~12m에 불과한 길이 1.2km의 좁은 협곡으로 길 양쪽으로는 높이 91~182m에 달하는 깍아 지른 듯한 붉은 사암 절벽이 서 있다. 흐르는 물이 바위를 깍아 만든 협곡과는 달리 시크협곡은 지질학적인 힘에 의하여 만들어진 균열이다. 나바테아사람들은 절벽 아래 바위를 깍아 만든 수로를 통하여 와디 무사에서 이끌어온 물을 페트라 내부로 흐르게 만들었다. 또한 수로 가까운 절벽에 다양한 신상을 조각했다. 우기에는 범람 때문에, 겨울에는 눈으로 막혀 시크협곡을 거쳐 페트라로 들어갈 수 없다.(3) 시크협곡 입구에는 1963년과 1991년 두 차례에 걸쳐 재건된 거대한 댐이 있다. 와디무사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기능과 필요할 때 협곡을 차단하는 방어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것이었다.

서기 363년 갈릴리 대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면서 페트라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이 폐허가 된 뒤 언제부터인가 베두인족들이 양떼를 몰고 이곳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1985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이후로는 유적을 보호가기 위하여 페트라 안에서 거주하던 베두인족들도 공원 밖으로 주거를 옮겼다. 페트라를 다시 인간세계로 소환한 사람은 스위스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이다. 1812년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 여행하던 그는 엄청난 유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아랍인으로 변장하고 이곳을 찾아 나섰고, 결국 사라진 도시 페트라를 발견해냈다. 페트라는 그의 여행기를 통해 유럽에 알려졌고, 1958년 발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페트라가 널리 알려지게 되는 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십자군>이 기여한 바가 크다.(4)

지나는 사람이 없으면 속도를 높이는 바람에 바람처럼 흘러가는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좌) 걸어간 분들은 협곡 사이를 부는 시원한 바람도 맞고, 특이한 모습의 바위에 대한 설명도 듣고, 덤으로 우아한 포즈로 사진도 찍었다는데(우; 모호곤사장님 제공)

1시경 페트라로 들어가는 마차를 타는 곳에 도착했으나 일행 34명에 마차는 5대 밖에 내줄 수 없다고 했다. 협상 끝에 10대로 늘이고 일부는 걸어가기로 했다. 한낮임을 고려하여 마차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좋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가이드와 함께 걸어간 일행들은 협곡의 곳곳에 대한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차를 탄 우리는 쏜살같이 달리는 마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잔뜩 긴장해야 했고, 마부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바람에 아름다운 협곡을 그저 공간이동하듯 지나쳐야 했다. 게다가 들어갈 때나 돌아올 때 모두 한참을 기다려서야 마차를 탈 수 있었기 때문에 걸어서 간 사람들과 거의 비슷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알카즈네신전은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해질 무렵에는 창백한 모습인데(좌) 맞은편 절벽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은 조금은 왜소해보인다(우)

시크협곡을 빠져나가면 바로 알카즈네(Al-Khazneh) 신전이다. ‘보물창고’라는 의미의 알카즈네라는 이름은 훗날 베두인족이 붙인 이름이다. 알카즈네는 1세기 초에 하리타트4세 시절에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깍아지른 사암절벽을 깍아 폭 24.9m 높이 38.77m 규모의 사원을 조각했다. 파사드의 아랫단은 코린트식으로 주두를 장식한 6개의 기둥을 만들었다. 알카즈네의 건축양식은 그리스양식과 근동 건축양식이 융합된 방식이다. 당시 나바테아사람들은 무역은 물론 요즘으로 치면 국제결혼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실례로 하이타트4세의 딸은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안타파스(Herod Antipas)와 결혼했다.(5)

알카즈네의 파사드에는 2,000년의 세월을 건너오면서 많이 마모되기는 했지만, 내세와 관련된 다양한 신화를 새겼다. 맨 위에는 영혼을 실어간다는 4마리의 독수리를 조각했고, 윗단에는 두 개의 도끼를 맨 아마존의 여신과 날개가 달린 승리의 여신이 춤추는 모습을 새겼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의 풍요의 대모신 이시스(Isis)와 그리스의 운명의 여신 티케(Tyche)의 모습을 섞은 조각을 가운데의 측면에 세웠다. 입구 양편으로는 올림포스와 지하세계를 오가며 산다는 카스토르(Castor)와 폴룩스(Pollux)의 조각을 세웠다. 이들은 제우스(Zeus)와 레다(Leda) 사이에서 난 쌍둥이 아들로 뱃사람의 수호신이다.(6)

관광객들이 늘면서 유적이 훼손이 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인 듯, 알카즈네의 파사드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1989년에 개봉된 영화 <인디아나 존스; 최후의 십자군>에서는 파사드 안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한 성배가 보관된 장소가 있다고 설정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파사드 안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는 소박한 방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물론 방에는 어떤 비밀장치도 없이 파사드에 있는 입구가 유일하게 외부로 통하는 문이라는 것이다.

알카즈네신전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바위를 깍아 만든 로마식 원형극장을 볼 수 있고(좌) 더 들어가면 열주의 거리를 만난다(우)

그동안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알카즈네가 나바테아왕국의 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나바테아사람들은 묘지에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별도 장식도 하지 않아 부장품만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페트라하면 알카즈네 신전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페트라 국립공원의 경내에는 대규모의 무덤과 사원 등의 건축물을 비롯하여, 고지대에 있는 종교유적, 수로 등 물관리 체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알카즈네신전 북쪽으로는 우른 무덤, 비단무덤, 코린트식 무덤 등 3기의 왕들의 무덤이 조성된 제벨 쿱타(Jebel Khubtha)라는 단층 지괴가 있다. 알카즈네신전을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바위를 깍아 만든 로마식 원형극장을 볼 수 있는데, 8천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더 가면 열주의 거리가 나온다. 페트라 계곡을 내려보는 서쪽의 벼랑에 800개의 바위계단을 오르면 알 데이르(al-Dayr) 수도원이 있는데, 노새를 타고 왕복하더라도 일정을 맞추기가 어렵다하여 가보지는 못했다. 그밖에도 기원전 4세기에 구리를 채굴하던 움알아마드(Umm al Amad) 구리 광산과 지하 갱도는 기원전 4세기 광산 건축물의 탁월한 본보기다.(7)

숨이 턱에 닿아 도착한 정상에는 희생제를 올리던 장소가 있고(좌) 페트라계곡에 흩어져 있는 바위 무덤들을 볼 수 있다(우)

일행들은 로마의 원형경기장 앞에서 해산해서 자유시간을 가졌다. 아내와 나는 가이드를 따라 페트라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바위산에 오르기로 했다. 휘적휘적 걷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은 거의 죽음이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숨은 턱에 닿고 입은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내가 왜 이 고생인가 싶었다. 허덕이며 정상에 올라보니 희생제례를 올린 장소로 보이는 유적이 있었는데, 정작 먼저 간 일행의 흔적이 묘연하였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결국 페트라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의 끝에 가서야 일행을 찾을 수 있었다. 절벽 끝에 서서 귀족들의 무덤, 로마유적 등을 한 눈에 조망하면서 배두인 위스키ㅡ뜨거운 홍차ㅡ를 한 잔 마시자 쌓인 피로가 금세 가신다.

날렵한 모습의 베두인 소녀 뒤로 벼랑 사이에 걸려 있는 좁은 나무다리를 볼 수 있다. 사자의 머리에서 뛰는 심정으로 뛰어내렸던 바로 그 다리이다

여기서 바로 하산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가이드가 알카즈네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장소에 가보자면서 일행을 유혹한다. 본인도 가본 적은 없다면서 말이다. 노새를 타지 않겠느냐면서 일행 주변을 맴돌던 현지인 꼬마여자 아이들을 앞장 세워 길을 나섰는데 이건 거의 암벽타기 수준이다. 현지인 꼬마들은 다람쥐처럼 오르내리는 바위벽을 손바닥만한 발자리에 의지해서 내려가거나 다시 올라야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두 절벽 사이를 연결하는 작은 나무다리를 만났다.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성배가 있는 장소로 가는 길에 만난 절벽을 건너가야 하는 인디에게 주어진 힌트는 “사자의 머리에서 뛰는 자 만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라는 구절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숨어있던 다리가 나타난다는 설정은 신념이 있는 자만이 길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절벽에 걸려있는 좁은 나무다리는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들었지만, 건너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기 때문에 결국 뛰어내릴 수 있었다.

다리에 오기전에도 발디딜 여유가 없어보이는 가파른 길을 내려와야 했고(좌) 알카즈네신전으로 내려갈 때도 바위 사이의 좁은 틈새를 어찌어찌해서 내려와야 했다(우)

나무다리를 건너 알카에즈신전을 굽어보는 포인트에 이르렀는데 이곳 역시 굽어보는 게 아슬아슬할 정도다. 물론 철난간과 같은 보호시설은 없다. 알카즈네 신전 왼편 절벽 틈새를 따라 내려왔다. 역시 암벽등반에 가까운 묘기를 보여야 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는 가이드지만 사실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여행객을 이끌고 간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고의 책임이 뒤따르는 문제이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확인되지 않은 곳에는 가지 않는다는 이 업계의 관행을 깬 것이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절벽의 바위틈으로 난 길을 따라 알카에즈 신전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리려니 먼저 내려간 모사장님과 쉬고 계시던 강회장님이 반겨준다. 페트라로 들어올 때 타고온 마차가 시간을 지키지 않는 바람에 우리는 거의 꼴찌로 입구로 돌아 나왔다. 어떻든 가이드가 내미는 아이스콘 하나가 어찌나 달콤하고 시원하던지 모른다.

참고자료:

(1) 위키백과. 나바테아왕국.

(2) Wipipedia. Nabataeans.

(3) Wikipedia. Siq.

(4) Wikipedia. Petra.

(5) Khan Academy. Petra: Rock-cut façades (article)

(6) Wikipedia. Al-Khazneh.

(7) 유네스코와 유산. 세계유산. 페트라(Pet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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