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저녁에는 도나우강에서 유람선을 타는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 시민공원을 나서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저녁은 페스트지역에 있는 헝가리식당에서 현지식으로 먹었다. 점심의 한식과 함께 잘 조화된 식단이다. 굴라쉬가 먼저 나오고 주요리는 닭고기요리였는데, 마침 인솔자가 내놓은 헝가리와인이 저녁식사와 잘 어울렸다.

마가렛섬 부근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식사 후에는 도나우 강 안에 있는 마가렛섬 부근에 있는 부두로 이동해서 유람선을 탔다. 겔레르트 언덕 아래 있는 다리까지 왕복하는데 약 40분이 소요된다. 탑승 후에는 2층으로 올라가 강변에 늘어서 휘황한 조명을 받아 아름다운 모습의 건물들을 구경했다. 유람선이 출발하면 제일 먼저 왼쪽 강변에 서 있는 국회의사당 앞을 지난다. 낮에 강 건너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섭섭했던 것이 조금 위안이 된다. 사실 평일에도 국회의사당을 구경하려면 길게 줄을 서야 입장권을 살 수 있다. 그래서 일정에서 빠졌나 보다.

헝가리 국회의사당은 런던 템즈강변에 있는 영국의 국회의사당 건물을 본떴다. 신고딕양식을 주로 하였지만, 돔은 르네상스양식에 따르는 등 몇 가지 건축양식을 혼합한 절충양식의 건물이다. 지붕에는 1년 365일을 상징하는 365개의 첨탑을 세워 신고딕양식의 전형을 따랐다. 길이 263m에 너비 123m, 최고 높이 96m인 이 건물은 영국의 국회의사당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의사당건물이다. 높이 96m는 헝가리왕국이 성립된 896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만나는 헝가리 국회의사당

헝가리 안에서는 가장 큰 건물이며 부다페스트 안에서는 성 이슈트반대성당과 함께 96m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하다. 역시 896년 헝가리사람들이 판노니아평원에 왕국을 세우고 천 년이 흐른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843년 건축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독립전쟁을 치르느라 착공이 늦어졌다. 국제경쟁을 통하여 임레 스타인들(Imre Steindl)이 설계한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여, 1885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904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의 정면은 도나우강을 향하고 있지만, 공식 출입구는 건물 동쪽에 있는 코슈트 러요시 광장(Kossuth Lajos Square)쪽으로 나있다. 1989년 10월 23일 새로 출범한 헝가리 공화국의 임시대통령 쉬뢰시 마차시(Mátyás Szűrös)는 광장으로 나있는 발코니에서 공화국의 출범을 선언했다. 코슈트광장은 1956년 헝가리 혁명 당시 부다페스트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 소련군의 철수와 헝가리의 민주화를 요구하다가 소련군의 총탄에 스러져간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1)

김춘수 시인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로 그들의 희생을 위로하였다. “다뉴브강(江)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 / 가로수(街路樹)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黃昏) 무렵 / 느닷없이 날아온 수발(數發)의 쏘련제(製) 탄환(彈丸)은 / 땅바닥에 /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 순간(瞬間), /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삼십보(三十步) 상공(上空)으로 튀었다. / 두부(頭部)를 잃은 목통에서는 피가 /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 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 죽어서 한결 가비여운 네 영혼(靈魂)은 / 감시(監視)의 일만(一萬)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 다뉴브강(江) 푸른 물결 위에 와서 /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이 울었다.(…)(2)”

이야기가 나온 김에 헝가리의 역사를 마무리하자. 벨러4세의 치세이던 1241년 쳐들어온 몽골군에 의하여 왕국이 황폐화되었다. 1301년 언드라시3세의 족음으로 아르파드왕가가 단절되면서 왕위계승 분쟁이 이어졌다. 1458년 야노시가문의 마차시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헝가리의 황금시대를 열게 된다. 하지만 황금기는 내분으로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526년에는 슐레이만대제가 이끄는 오스만제국군과 겨룬 모하치 전투에서 러요시2세 왕이 죽는 등 참패하고 말았다. 그 결과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오스만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그 뒤로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왕국이 헝가리에서 충돌하면서 영토는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왕국에 분할되고 말았다. 도나우강 서쪽의 로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광가 직접 통치하고, 부다를 포함한 구 헝가리왕국의 중앙에 해당하는 오스만 헝가리는 오스만제국이 직접 통치하였다. 트란실바니아 지역만 터키의 보호령인 헝가리왕국으로 자치권을 유지하였다. 16세기 들어 오스만제국을 밀어낸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왕국의 트란실바니아 지역마저 지배하고, 17세기에는 헝가리왕국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18세기 초부터 합스부르크왕국의 지배에 반발하여 독립운동이 이어진 끝에 186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치왕국으로 승격하게 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이 종전되기 직전인 1918년 10월 31일 독립을 선언하여 헝가리민주공화국이 성립된다. 1919년에는 루마니아가 침공하여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였으며, 이듬해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에 따른 책임을 지고, 슬로바키아, 보이보디나, 트란실바니아, 루마니아 왕국,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등에 할양하게 되었다. 이런 결과로 인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서 헝가리는 주축국에 가담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트란실바니아의 북서부, 슬로바키와의 국경 지역 일부, 슬로베니아의 일부와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을 합병하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전쟁 후에는 모두 되돌려주고 말았다. 1949년에는 소비에트연방 점령 아래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1956년 10월 23일에는 소비에트 지배에 대하여 자유, 민주주의, 정치 탄압 종식을 요구하는 헝가리혁명을 일으켰지만 붉은 군대가 진주하여 혁명정부의 수상 임레 너지를 사형시키고 혁명지도자들을 죽이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와 함께 한계에 이른 헝가리 공산당의 독재가 무너지고 1989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헝가리 공화국이 성립하였다.(3) 그 역사적인 선언이 코슈트광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좌) 겔레르트언덕에 서있는 자유의 여신상(우)

국회의사당을 지나면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려 마차시성당과 어부의 요새가 어둠 속에 떠올라 있는 모습을 감상한다. 7년 전에는 학회에서 제공하는 선상파티에 참석하면서 유람선을 탔는데, 그때보다도 강변의 건물을 밝히는 조명들의 더 밝아진 듯하다. 그때 찍은 사진과 이번에 찍은 사진을 비교해보면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때는 똑딱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고 이번에는 그래도 삼성전자가 만든 안드로이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라는 차이도 감안해야 한다. 배를 타고 사진을 찍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지만, 밤인데다가 강물의 흐름이 나름 거칠고, 피사체가 먼 탓인지 선명한 사진이 별로 없다.

부다페스트에서 도나우강의 야간 유람선을 타게 되면 당연히 한강 유람선과 비교가 된다. 한강 유람선이 도나우강 유람선보다 몇 가지 불리한 점이 있다. 우선 넓어서 탁 트인 맛은 있는데, 덕분에 아기자기한 맛이 없다. 그리고 도나우강의 경우 강변도로가 없는 것은 아니나 폭이 좁아서 강변의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한데 한강의 경우 강변도로도 넓은데다가 넓은 둔치 때문에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있다는 점도 불리하다. 뿐만 아니라 한강의 경우 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아파트가 천편일률적인 모양이라서 사는 사람들은 강을 굽어보는 맛이 좋을지는 모르나, 강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을 주지 못한다. 최근 들어 한강에 있는 다리에 조명을 새롭게 하는 등, 한강의 야경도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다른 나라의 강변야경과 비교해서 시선을 끌만한 대표적인 건축물이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약점일 듯하다.

7년전 선상파티를 되돌아보자면, 그때 탑승한 유람선 유로파호는 꽤나 컸다. 선실에는 열 명씩 앉을 수 있는 식탁이 수십 개가 놓였고, 중앙에 있는 무대에는 밴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침 식탁에서는 학회를 주최한 헝가리학회의 회장의 옆자리였기 때문에 학회준비가 잘되어 좋은 발표내용으로 성황을 이룬 것을 축하하고, 좋은 음식, 특히 헝가리 와인을 칭찬했다. 저녁을 먹고 몇 잔 마신 헝가리와인으로 오른 취기를 달랠 겸해서 위층으로 올라가 도나우강의 야경을 즐겼다. 강바람이 차가워 다시 선실로 내려갔을 때는 밴드 앞 무대는 춤추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주최측의 강권(?)을 못 이겨 무대로 나섰다가 같이 춤을 춘 유럽처녀가 얼마나 몸이 빠른지 한곡을 추고는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열리는 학회는 주로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점잖은 분위기의 파티인데, 유럽에서 열리는 학회는 댄스파티가 열리는 경우가 많다.

세체니 다리.(김일환님 제공)

이윽고 유람선은 세체니다리 아래로 부다 왕궁을 지난다. 사슬교(chain bridge)라는 별칭이 더 익숙한 이 현수교는 1849년에 완공되어 부다페스트의 서쪽 부다시와 동쪽 페스트 시를 연결하여 처음 놓인 다리이다. 헝가리의 국민영웅 세체니 이슈트반(István Széchenyi) 백작의 후원으로 영국의 윌리엄 티어니 클라크(William Tierney Clark)의 설계로 스코틀랜드의 건축가 애덤 클라크(Adam Clark)가 제작하였다. 이 다리의 건설로 말미암아 도나우강으로 분리되어 있던 부다와 페스트를 하나의 경제권역으로 묶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정체성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연히 도나우강의 풍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양쪽에 세운 탑 사이의 거리 202m로서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것으로 기록되었다. 밤에는 308m에 달하란 케이블로 연결된 수천 개의 전등이 도나우 강물 위에 비쳐 황홀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4)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부다왕궁의 황홀한 모습(좌) 7년 전에는 조명이 약했기 때문에 공중에 떠 이S는 느낌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카메라가 문제.(우)

세체니다리를 지나면 부다왕궁을 바로 볼 수 있고 이어서 겔레르트 언덕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과 성겔레르트 기념탑이 나타나면서 유람선은 되돌아선다. 같은 풍경 같지만 올 때와 갈 때 다소 다른 느낌이 든다. 도나우 강변의 아름다운 밤풍경을 되새기면서 숙소로 향했는데, 무언가 착오가 생겼던 모양이다. 버스를 내려 무거운 짐을 끌고 숙소로 이동하다가 오늘 묵을 숙소가 아니라고 해서 다시 버스를 타는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9시가 넘어 숙소에 들었다. (2017년 11월 5일)

배가 정박하기 전에 아쉬운 마음에 국회의사당과 세체니 다리 그리고 부다왕궁을 한 장면에 담았다.

참고자료:

(1) Wikipedia. Hungarian Parliament Building.

(2) 김영환. 오마이뉴스 2003년 1월 7일자 기사. “민족의 명시 90 - 김춘수의 <부다페스트의 소녀의 죽음>”

(3) 위키백과. 헝가리의 역사.

(4) Wikipedia. Chain Bridge (Budap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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