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겔레르트언덕을 떠나 마차시 성당으로 가는 길에 버스가 잠시 멈춘다. 부다성 가까운 1지구 중심부에 있는 디즈광장(Dísz Square), 혼베드 동상(Honvéd szobor )이 서있는 곳이다. 혼베드 동상은 헝가리 조각가 기요르기 자라(György Zala)가 1893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1848부터 1849년 사이에 벌인 오스트리아와의 독립전쟁에서 싸운 헝가리의 전사들이 얻고자 한 자유로운 조국(Szabad Hazaert)에 바치는 기념탑이니 독립기념탑으로 번역해도 될 것 같다.

디즈광장에 있는 혼베드동상

석회암으로 만든 높이 5.3m의 기단 위에 4.2m 크기의 청동상을 세웠다.

독립전쟁 당시 부다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부상을 입은 장교를 형상화했다. 그는 오른손에는 검을, 왼손에는 깃발을 높이 들고 있고, 천사가 승리의 월계관을 씌우고 있다.

기단의 비문에는 1849년 5월 21일 ‘자유로운 조국(Szabad Hazaert)’, 그 위에 붙인 청동 종려나무를 묶은 리본에는 익명의 영웅들(NEVTELEN HŐSÖKNEK)이라고 새겼으며, 기치에는 ‘자유 또는 죽음(SZABADSÁG VAGY HALARL)’이라는 구절을 적었고, 띠에는 “우리의 투쟁은 의로운 사람들의 싸움이었습니다. 우리의 승리는 국가의 승리입니다.”라고 새겼다.(1)

조국을 위해 희생한 분들을 잊지 않는 헝가리 사람들이 위대해 보인다. 작금의 우리나라 사정과 비교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마차시 성당(좌) 마차시 성당 안에 있는 설교단(중, Wikipedia에서 인용함), 마차시 성당 앞 삼위일체 광장에 있는 상위일체탑(우)

마차시 성당으로 이동했다. 마차시 성당(헝가리어: Mátyás templom)은 도나우강을 굽어보는 어부의 요새 안쪽으로 있다. 12015년 교회의 전통에 따라서 로마네스크양식의 교회를 세웠지만, 1241년 몽고군의 침공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1255년에 벨라4세에 의하여 고딕양식으로 새로 지었다. 그 당시에는 성모 성당이라고 불렀던 것을 1479년 80m 높이의 남쪽 탑을 새로 짓는 등 대대적인 개축을 한 마차시1세의 이름을 따서 마차시성당이라고 부른다. 1916년 합스부르그왕가의 마지막 왕 챨스4세의 대관식을 거행한 것을 비롯하여 역대 헝가리왕의 대관식이 거행되었으며, 마차시1세는 두 번의 결혼식을 이 성당에서 치렀다.

1526년 모하치전투에서 승리한 오스만제국은 15431년 헝가리왕국을 멸하고 145년간 헝가리를 지배했다. 부다성을 함락한 오스만제국은 마차시성당을 모스크로 바꾸었다. 오스만이 침략해올 때 대다수의 성당보물을 브라티슬라바로 옮겼다지만, 성당벽에 그려진 화려한 프레스코화는 석회로 덧칠되어 이슬람 고유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덧입혀졌고, 남아있던 보물들도 약탈당했다. 1686년 오스만제국과의 독립전쟁의 와중에 동맹군의 포격을 받아 성당벽이 무너졌을 때 숨겨졌던 성모상이 드러나면서 오스만군의 사기가 떨어져 부다성이 함락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마차시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있던 장소로 기록된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서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1950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보수하였고, 2006년부터 2013년 사이에 대규모 복원작업이 진행되었다. 사암으로 지은 중세풍의 설교단이 볼만하다. 설교단의 난간에는 아케이드 아래 서 있는 네 명의 복음서 저자와 네 명의 라틴 의사가 조각되어 있다.(2) 7년 전에는 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있어 성당의 우아한 모습을 제대로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아쉬웠었다. 그런데 오늘은 성당 앞마당에서 책전람회가 열리고 있어 분위기가 어수선해서 다시 아쉬웠다. 이슈트반 대제의 기마상 옆에 설치한 특설무대에서는 책전람회행사의 일환인지 헝가리 민속 춤 공연이 열리고 있었다.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는 젊은 남녀의 모습에 활기가 넘친다. 7년 전에 찾았던 부다페스트에서는 느끼지 못한 점이다. 그때만 해도 지하철에서 혹은 거리에서 만난 헝가리사람들은 지쳐보였고, 어둡고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변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요즘에는 10년도 긴 느낌이다.

어부의 요새 앞에 서 있는 성 이슈트반 대제의 기마상(좌) 특설무대에서 헝가리민속춤을 추고 있는 젊은이들.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다(우)

말 위에 높다랗게 앉아 밝게 변한 헝가리 젊은이들을 내려다보는 성 이슈트반 대제 역시 기쁜 마음일 듯하다. 성 이슈트반 1세(Szent István)는 헝가리의 대공이자 헝가리왕국을 연 인물로 본명은 버이크(Vajk)다. 전설에 의하면 프라하의 아델베르트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기독교 초기의 성인 스테파노(헝가리어로는 이슈트반이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았다. 헝가리왕국의 영역을 판노니아평원 전체로 확대하였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파하는데 힘쓴 공으로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헝가리의 사도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83년 교황은 그의 사후, 먼저 죽은 이슈트반1세의 아들 에머릭과 함께 시성하였다.(3)

어부의 요새와 2층으로 오르는 입구(좌) 어부의 요새에 서면 도나우강과 건너편의 국회의사당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중) 어부의 요새의 출입구(우)

이슈트만 1세의 기마상 옆으로는 어부의 요새이다. 헝가리어로는 할라스바스티아(Halászbástya)라고 하는 어부의 요새는 왕궁의 끝에 있는 마차시성당 옆 도나우강변으로 나있는 일종의 테라스이다. 어부의 요새에 올라서면 도도하게 흐르는 도나우강과 강건너 페스트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바로 건너편에 에 있는 화려한 모습의 국회의사당건물이 눈길을 끈다. 건축가 프리게스 슐레크(Frigyes Schelek)의 설계로 1895년에서 1902년 사이에 신 고딕양식과 신로마네스크양식을 절충하여 지은 어부의 요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프리게스의 아들 야노스 슐레크(János Schulek)가 복원하였다. 오래된 성벽 부지에 포탑, 전망대, 난간 및 계단 등을 설치하였다. 요새에 세워진 7개의 탑은 896년 카르파티아평원에 정착한 7개의 마자르부족을 상징한다.

어부의 요새는 최근에 지어졌지만, 이 요새의 역사는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와 10세기 헝가리공국을 거쳐 1000년부터 1301년까지 이어진 헝가리왕국의 알프레드 왕조 시절 왕궁이 있던 언덕을 방어하는데 언덕 아래 살던 어부들이 한 몫을 했다는 것이다. 알프레드왕조는 훈족의 아틸라왕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4) 평상시에 도나우강에서 잡은 물고기를 마차시성당 옆 광장에서 팔던 어부들은 비상시에는 요새의 수비수로 봉사했다.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은 단지 요새 아래 마을에 어부들이 살았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부터, 그 어부들이 오래 전부터 성벽을 방어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 혹은 마차시성당 앞 광장의 수산시장에서 어부들이 생선을 팔던데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5) 어떻든 요새 아래 살던 어부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어부의 요새에서 어부들에 관한 전설을 되새기다 보니, 기다림과 보상의 미학에 관한 윌리엄 이안 밀러의 말을 생각해보자. “진정한 어부는 참을성이 강하다 여름철의 벌레나 겨울의 추위와 술기운 앉거나 가끔은 서서 기다리는 과정 자체를 즐길 줄 아는 것이다. 어부는 어떻게 그토록 고요하게 세상과 일체감을 이룰 수 있는걸까? 나는 어부가 경험하는 일체감이 진정으로 내면을 텅 비우는 것과 같으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상태일 거라고 추측한다. 내게 있어 어부는 얼음 위의 불자와도 같은 존재이다.(6)” 기다림의 미학에 통한 어부를 배울만하다는 생각이다.

마차시 성당 앞 삼위일체 광장(Trinity square)에는 삼위일체 동상(Trinity column)이 서 있다. 1691년과 1709년 두 차례에 걸쳐 유럽을 휩쓸며 엄청난 희생자를 낸 흑사병의 희생자를 기리고 재발을 막아줄 것을 기원하는 탑이다. 흑사병을 어쩔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는 그저 탑이라도 세워 전염병이 물러가기를 희망했던 모양이다. 건축가 세레솔라 베레이오(Ceresola Vereio)가 1700년에 기단을 세우고 베르나트 페레티(Bernat Ferretti)가 1706년에 동상을 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사병이 재발하자 1709년에는 조각가 풀로프 웅그레이크(Fulop Ungleich)로 하여금 더 크고 장식적인 탑을 제작하게 되었다. 탑의 상단의 조각은 삼위일체를 나타내고, 아래로 천사와 성도를 묘사하는 작은 조각상으로 장식하였다. 중앙에는 다윗왕이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희생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표현하였다.(7)

부다왕궁으로 들어가는 오네이트문(좌)오네이트문 옆의 횃대에 앉아 있는 전설의 새 튜랄. 헝가리왕국의 상징이었다(우)

마차시성당에서 부다왕궁으로 이동한다. 그리 멀지 않으니 걸어서 간다. 왕궁으로 가는 길에 보니 대통령궁 옆에 있는 건물은 지붕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궁을 지키는 수비대는 시간이 되면 근무조가 서로 교대하는 장면이 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대통령 궁을 지나면 옛 부다 왕궁의 폐허가 나오고 이어서 근세에 재건한 부다왕궁을 볼 수 있다. 화려한 조각을 한 오네이트문(Ornate Gate)이 왕궁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오네이트문의 남쪽 횃대 위에 앉은 커다란 새는 신화적 존재인 죽음의 새 튜랄(Tural)로서 헝가리왕국의 상징이었다. 문을 지나면 합스부르크 계단을 따라 왕궁의 뜰로 내려간다. 맨 먼저 커다란 고기를 잡고 있는 어린이의 모습을 조각한 ‘고기 잡는 어린이 분수’를 만난다. 카롤리 세니예이(Károly Senyey)가 1912년에 제작한 것이다. 왕궁의 뜰에 서면 남쪽으로 흐르는 도나우강과 페스트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왕궁앞 마당에 서 있는 사보이의 외젠왕자의 기마상(좌)과 고기잡는 어린이 분수(우)

왕궁의 본관 앞에 서 있는 기마상은 사보이의 외젠(Eugene)왕자이다. 1900년에 조제프 로나(József Róna)가 제작한 청동기마상은 오토만군을 격파하고 부다페스트를 투르크로부터 해방시킨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유진왕자의 기마상 뒤로 부다왕궁의 주출입구가 있다. 지금은 부다왕궁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헝가리 국립미술관의 입구이다. 헝가리 국립미술관에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다. 마침 몬드리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단체여행을 하면서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구경하는 경우가 드문 것은 입장료 혹은 표를 사는데 줄을 길게 서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도 그 나라의 대표적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그 나라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은 중요할 것 같다.

부다왕궁의 마당에서 굽어본 도나우강과 페스트시의 파노라마뷰

참고자료:

(1) 부다페스트시 홈페이지. Honvéd-szobor.

(2) Wikipedia. Mattias church.

(3) 위키백과. 이슈트반1세.

(4) Wikipedia. Árpád dynasty.

(5) Homepage of Fisherman’s bastion.

(6) 윌리엄 이안 밀러 지음. 잃어가는 것들에 대하여 62쪽, 레디셋고 펴냄, 2013년.

(7) A view on cities. Budapest. Trinity square.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