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 충남대병원 호흡기내과

암환자를 치료하면서 가장 당혹스러운 순간은, 환자의 마지막이 떠오를 때가 아닐까, 특히 그 환자에게 남아있는 시간이 나의 머릿속에 계산되는 그 순간, 의사라면 누구나 그런 자신에게 설명하기 힘든 죄책감이 들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신이 아닌데, 내가 무슨 권리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벌써 5~6년 전, 그리고 더 이상 만나지 못한 것은 2년이 좀 더 지난 것 같다. 벌써 꽤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나의 기억도 많이 정리되었고, 손을 잡고 함께 눈물 흘리던 시간, 마음이 아프고 속상했던 그 시간들만이 나의 장기기억에 남아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외래 간호사가 전화기를 들고 입씨름을 하는 모습을 보다가 무슨 내용인지 귀동냥을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대화의 내용은, 항암치료를 하러 와야 하는데 왜 안 오느냐, 일이 바빠서 못 간다, 뭐가 그리 바쁘냐, 애들이 아프다 이러저러한 내용이었다. 폐암, 특히 소세포 폐암에서 항암치료는 유일한 치료이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항암치료를 받지 않으면서 지내기에는 환자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환자가 항암치료를 하던 중에 중단하거나 이유 없이 연기하는 것은, 우리를 참 안타깝게 한다. 그렇게 긴 통화 후에 2주 있다가 오겠다는 말만을 남기고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평소에도 항암치료를 날짜에 맞추어 잘 맞지 않아서 속을 태우는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왔다. 왜 담당 교수님께 가지 않고 나에게 왔는지는 모르나, 1차 치료제를 3회 정도 맞은 상태로 나에게 4회차 항암치료를 위해서 왔다. 외래 진료실에 들어오는 순간, 어떤 상황인지 느껴졌다. 왜 환자가 항암치료를 제대로 맞지 않았는지 말이다. 43세의 조그마한 얼굴에, 머리카락이 없어서 두건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적어도 10년 이상 지난 것 같은 눈썹문신은 화장을 하지 않으니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환자는 의사의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내 등 뒤 창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에는 가시가 돋아서, 나의 질문에 기분이 나쁜 듯 짧게 대답한다. 나의 모든 질문이 자신을 책망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들리는 모양이다. 그렇게 다시 입원 오더를 내고, 환자는 그러고도 몇 일이 지나서 또 항암치료를 받았다. 병원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것 같은 사람이었다.

환자가 의사와 눈을 맞추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담당의사에게 불만이 있더라도, 대부분은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낼 텐데, 의사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다면 눈을 맞추고 더욱 진지한 대화를 할 텐데 말이다. 내가 정신과 의사는 아니지만, 환자가 자신을 혼자만의 방에 가두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을 두드려야지….

“항암치료 받고 힘들지 않았어요?”

“네 힘들었어요.”

“어떤 것이 힘들었어요, 구토가 심했나요? 밥 먹기가 힘들었나요? 기운이 너무 없던가요?”

“주사 맞고 집에 가면, 1주일은 꼼짝도 못해요.”

“누가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해주실 분은 있나요?”

“없어요. 내가 해요. 애가 셋이에요. 먹이고 입히고 다 내가 해야 해요.”

화가 난 목소리로 이야기 한다.

나도 아이가 셋이다. 세 아이를 돌본다는 것이 얼마나 힘에 부치는지 아는 나이기에 셋이나 되는 아이들을 키우면서 항암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에, 그 간의 많은 일들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나는 항암치료 받기 싫어요. 그냥 집에 있다가 죽을 거에요.”

“왜 그러세요…. 많이 힘들어서 그러세요?”

“다 싫어요. 남편도 싫고, 애들도 다 싫어요.”

“........”

“........”

“애들도 엄마를 싫어하나요?”

그러자 눈물을 펑펑 쏟는다. 아이들이 엄마를 싫어할 리가 있는가. 아마도 엄마는 그 생각에 눈물이 난 것 같다.

“막내는 몇 살이에요?”

네다섯 살이라고 한 것 같다.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나이, 엄마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이, 그냥 이런 상황이 나도 속이 상한다. 소세포폐암의 확장성 병기, 최대 1년 남짓한 여명, 그리고 혼자 남겨질 아이들, 비록 아빠가 있다지만 엄마의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을 것이다. 엄마인 나에게,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눈물부터 난다. 환자도 그랬을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어지간한 정보는 다 나오는데,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그리고 자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면,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을까. 항암치료를 하고 오면 힘들어서 아이들에게 짜증을 내게 되는 것도 싫었을 것이다. 자신의 달라지는 외모 또한 너무나 괴로웠을 것이다.

환자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그렇게 함께했다. 엄마의 마음이 같았기에, 아프고,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남편이 좀 더 도와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세 아이와 부인의 치료비까지 감당하느라 밤낮 없이 일하는 아빠에게도 미안한 부탁이었다.

이후 환자는 1차 항암치료는 마쳤고 줄어들었던 종양은 다시 커졌다. 다음 2차 치료제를 시작해야 했다. 나는 속으로 환자분이 거절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어떻게든 환자의 어린 아이들에게, 엄마와 함께할 시간을 최대한 만들어야 하고, 환자는 어떻게든 덜 힘들게 아이들과 함께 해야 했다. 두 번째부터는 더욱 힘이 들고, 약제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차선책이 없었다. 그렇게 당연한 듯 시작한 2차 치료제에는 반응이 전혀 없었다. 환자는 설사가 나면서 매우 힘들어했고, 약제를 2회차까지 맞은 후 약을 바꾸어야 하는 시점에, 나는 환자에게 종양의 진행에 대한 불길함보다는, 부작용이 심한 것이 더욱 문제라는 희망(?)을 남겨둔 설명을 하고자 했다. 그렇게 3차 치료제로 진행했다.

그래도, 그 사이에 환자는 이전보다 훨씬 씩씩해졌고,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며, 자신의 일상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막내가 커가는 모습에 대한 이야기, 큰 아이들이 사춘기 증상을 보여서 힘들다는 이야기, 그녀의 일상도 나와 다르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엄마였다. 때로는 애들에게 고함도 치고, 남편에게 투정도 하는 그냥 엄마였다.

3차 치료제를 시작하였다. 고된 시간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녀의 표정은 매우 밝았고 약제에 대한 반응은 매우 좋았다. 약제를 투여하는 동안 종양이 거의 완치 상태에 이를 정도로 사라졌다. 날짜를 지켜가며, 외래를 꼬박꼬박 방문하던 어느 날이었다.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왔다. 표정이 처음 만났을 때와 똑 같았다. 눈 꼬리가 올라가고, 창밖을 응시하며, 말이 퉁명스러워졌다. 평소의 천진난만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요.”

“주사 맞고 많이 힘들었어요?”

“아니요.”

“집에 무슨 일이 있어요?”

“......”

“누가 속상하게 한 거예요?”

“다들, 내 아픈 것은 안중에도 없어요, 지들하고 싶은 대로만 해요, 엄마가 힘들다고 해도 들은 체 만 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조금 눈빛이 누그러든다. 자신이 속상한 것을 풀어내고 조금은 편안해진 모양이다.

“저도 그래요, 애들이 알 리가 있나요, 엄마가 힘들다고 해도, 너희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해도.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도 그래요, 친정 엄마가 힘든 줄 알면서도 애들 맡겨놓고, 고생만 시켜드려요. 어릴 때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

환자도 눈물이 난다. 편찮으신 친정엄마 얘기를 왜 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도 눈물이 난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위로받고 싶은데, 아무도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없다. 엄마들은 다 그렇다.

환자와 이야기를 이어가며 왜 그렇게 속상했는지 알게 되었다. 둘째가 사춘기인데, 싸우고 말도 안하고, 엄마에게 화를 내기만 하고, 서로 간에 마음이 상하는 대화가 오간 모양이다.

“제가 딸내미한테 전화를 좀 해볼까요? 엄마가 얼마나 힘든지 정말 모르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해주실래요?”

딸과의 대화가 단절된 지 며칠, 엄마는 그것이 속상했던 것이다. 내 몸이 힘들고 괴로운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딸과 담을 쌓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딸의 전화번호를 받고, 다음날 딸과 통화를 했다. 사춘기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세상의 중심에는 나 밖에 없고, 나만 슬프고 힘들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엄마지만, 그것을 이해해 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사고뭉치 딸에게 나는 환자의 예후를 가능한 정확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엄마가 받고 있는 항암치료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치료를 받는지 말이다. 항암치료를 하고 나면 속이 울렁거려서 밥 냄새를 맡고 싶지도 않은데,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 꾹 참고 밥을 하고, 온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며, 피곤함에 눕고만 싶지만, 아이들 하나하나 살피며, 너희들이 잠든 후에 잠이 든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딸의 목소리는 여전히 10대의 어린 아이였다. 엄마의 상황을 듣고 난후 조금은 미안해진 목소리로, 엄마와 다시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다. 딸에게 상처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별로 없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며 보낼 시간은 더욱이 없다.

종양은 결국 약제에 다시 내성을 보인다. 또 다음 약을 찾아야 한다. 소세포폐암에서는 쓸 수 있는 약제가 많지 않다. 하지만 보존적 치료만으로 보내기에는 환자의 전신상태도 너무 좋고, 우리에게 필요한 시간은 아직도 너무 많다. 임상시험도 거의 없기 때문에, 신약을 써 볼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다. 결국은 문헌을 검색하고, 소세포폐암의 초창기에 썼던 치료제 조합의 용량과 용법을 다소 변형시켜, 독성을 최소화해서 4차 치료제로 시작하였다. 다행히 4차 치료제도 반응이 좋았다. 그녀의 경우처럼 3차 및 4차 치료제에 반응이 좋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적어도 문헌상에서도 증례로 보고될 정도이며, 그녀의 경우도 증례로 보고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치료를 이어가던 중 종양은 거의 다 사라졌고, 어느 날부터 그녀가 오지 않았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핸드폰으로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9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환자는 응급실로 들어왔다. 흉곽을 거의 다 채울 정도로 종양이 커져있다.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부었고, 숨 쉬는 것도 너무 힘들어 보인다. 그대로 보고 있기가 어렵다. 그 상태로, 반갑게 내 손을 잡으며, 잘 지냈냐고 물어보는 환자를 보며 그간 그녀가 왜 오지 않았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잘 지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환자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의사로서는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완치가 가능한 환자라면, 금방 치료가 끝나는 환자라면, 환자와 일상의 삶을 나누는 것은 즐거운 기억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삶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는 행복한 결말이라는 것이 어려운 이상, 우리들의 교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함께 고통이 되어간다.

그녀는 병원에 왔고, 뭔가 해결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곧, 그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리라 생각지 않는 눈치이다. 이 때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녀의 아버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녀의 남편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녀는 숨쉬기가 힘들어 계속 앉아 있었다. 반응이 좋았던 마지막 항암치료, 그나마 부작용이 거의 없었던 마지막 항암치료를 해보기로 했다. 항암치료를 받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나는, 숨쉬기 힘들어하는 고통을 조금은 덜어주자, 그리고 그녀에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려줄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어보자, 하지만 위험하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항암제가 들어가고, 환자의 숨결은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얼굴에 부기도 빠졌다. 얼굴은 예전대로 돌아왔다. 그렇게 2회차의 시간이 다가왔고 환자는 선택했다. 다음 항암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병원에서지만, 아이들과 엄마가 없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남편과 아버지, 그리고 그녀를 아끼던 주변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 시간을 한 달 남짓 보낸 후 환자는 그렇게 우리가 피하고 싶었던 그곳을 선택했다. 피하기 어려웠지만, 최선을 다해서 피했고, 이제는 받아들인다. 나는 그녀가 그랬다고 생각한다.

자식에 대한 사랑, 그래서 더 살고 싶은 엄마의 의지 또한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녀와 함께했던 3년여의 시간이 되돌아보니, 아주 짧은 시간이다. 그렇게 노력했으나.

오늘도 어느 순간, 내 앞의 환자에게 남은 시간이 천천히 떠오른다. 하지만 그것보다 오래 사실 것이라 믿는다.

저는 매일 혹은 매주 만나던 환자들을 가끔 혹은 자주 떠나보내야 합니다. 환자분이 저를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보호자분들은 아픈 기억과 함께 하는 저를 기억하고 싶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저는 그 분들을 제 오랜 기억에 꼭 남겨놓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 제 어린 시절 기억이 잊혀지듯 그냥 그렇게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제가 한미수필문학상에 공모한 이유입니다.

수년전부터 ‘이번에는 꼭 써야지’ 하다가 물끄러미 공모 마감일을 흘려보내기를 몇 번입니다. 그 사이에 무의식의 세계로 갔는지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그 기억도 쉽사리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야기 속의 환자분도 그렇습니다. 많이 잊혀졌습니다. 그래도 아직 눈에 선한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웃음이 남아있기에 글을 쓸 수 있었습니다.

아픈 엄마의 이야기는 TV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저도 매번 눈물 지으며 TV를 시청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제 눈 앞에 있는 그녀는 TV 속의 아픈 엄마와는 다를 것이라, 그렇게 믿고 싶은 제 환자입니다. 그 아픈 엄마보다는 철이 조금 덜 든 것처럼 투정도 많이 하고, 남은 삶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체념한 듯, 항상 포기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입원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는 시간에, 아이들이 밥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딸과의 소소한 싸움으로 잠을 못 자고 눈물을 흘리는 그 순간은, 분명 우리 곁에 살아있는 엄마라서, 그녀의 이야기는 그래서 TV 속의 이야기와 달랐습니다.

세 딸의 엄마이고 1남 3녀의 장녀인 저에게도, 힘든 시간을 무릅쓰고 제 곁에 계신 어머니가 계십니다. 몇 년 전 진단받으신 희귀병으로 제 스승님이신 우리 병원의 교수님께 다니시며, 저의 세 딸들을 봐주시느라 너무나 고마운, 그 고생을 해주십니다. 딸들이 엄마 닮아서 별나다는 소리를 연거푸 하시며 제가 없는 시간에 엄마가 되어 주고 계십니다. 저의 상황이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 엄마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엄마가 사라졌을 때 아이들이 얼마나 슬퍼할 것인지를 그 환자를 보는 내내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렇게 하기를 3년이 넘어섰습니다. 증례보고를 하려하면 ‘그래도 긴 시간이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녀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저에게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신문사에 글을 보내고 난 후에 저는 가장 행복했습니다. 비록, 남편에게 보여주고 오타가 몇 개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가슴에 뭔가가 가득하게 들어찬 좋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제 환자분들과 저의 가족들에게, 가깝고 따뜻한 말을 건네고자 한번 더 노력할 것입니다. 새해와 함께 찾아온 좋은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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