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일방적인 의대정원 확대 추진으로 인한 대형병원의 기능 마비가 한달째 지속되고 있다.

전공의에 이어 전임의마저 떠나버린 진료 현장을 메우기 위해 전문의와 교수들이 밤낮 없이 일하고 있는지 벌써 한달이 넘었다는 의미다.

대형병원이 한순간에 기능을 잃어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국민들은 한국의 의료 체계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정부는 아마 전문의와 교수진을 갈아넣어 겨우 유지하고 있는 현 대형병원의 진료 현장을 지켜보며 속으로 안도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부가 크게 간과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대형병원은 단순히 중증·응급 환자들을 진료하는 역할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의료를 이끌어갈 미래의 인재를 양성하고, 의학 발전을 위한 연구를 수행하는 일도 대형병원의 중요한 역할이다.

정부가 매해 자랑스럽게 성과를 발표하며 한국의 미래 먹거리 산업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로 내세우고 있는 임상시험 수행 능력도, 그 동안 연구 기관으로서 대형병원이 제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현재의 대형병원은 환자 진료를 제외한 교육과 연구의 기능이 완전히 멈춘 상태다. 지금 이 상황에 전문의와 교수들이 연구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겠나.

기자는 최근 한 대형병원의 임상시험센터장을 만나 그 현실을 들었다. 암담한 현실이었다. 진료에만 매달린 지난 몇 주 동안 환자 등록은 물론이고 업데이트할 새로운 데이터가 없어 기관에 포함된 연구 인력은 손을 놓고 있고, 연구자들 간 의견 교류를 멈춘 지 오래라고 했다.

그는 글로벌 임상연구의 경우 환자 등록이 각국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사태가 장기화 될수록 그 안에서 한국의 역할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임상연구의 글로벌 메카로서 지난 수십년간 한국이 쌓아온 신뢰와 역량이 한순간에 후퇴할 수 있다는 얘기다.

불과 한달 전 기자는 한국을 찾은 모 글로벌 제약기업의 연구개발 수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연구 역량에 대한 찬사를 들었다. 자사의 임상시험 개발에 있어 한국과 한국의 연구진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를 말이다.

한달 뒤 그의 찬사를 받은 우리나라 임상시험 주인공들은 모두 사직서를 내기로 결의했다.

그간 한국의 연구자들이 이뤄낸 의학의 발전과 연구 역량, 신뢰를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있는 건 누군가. 제약바이오산업이 미래 먹거리 산업이라며 한국의 연구 인프라가 이를 이뤄낼 핵심 요소라고 자찬하면서도, 연구 개발 예산을 줄이고 지금까지 쌓아온 성과들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버리는 주체는 누군가.

얼마 전 전국의대교수협의회는 의료개혁 문제를 방관만 하고 미뤄왔던 자신들도 현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개선을 위한 논의에 적극 참여하겠다 밝힌 바 있다.

정부는 하루빨리 대형병원이 본연의 역할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의학과 산업이 더 후퇴하기 전에 말이다.

저작권자 © 청년의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