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사실 보건복지부 장관을 꼭 의사가 해야 할 이유는 없다. 장관이 직접 환자를 돌보는 것도 아니고, 업무 수행에 의학적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도 없다. 하지만 의사들은 내심 의사 출신 장관이 나왔으면 하고 기대를 하는 편이다. 왜 그럴까? 의사 출신 장관이 백마 탄 초인처럼 나타나 한국의료의 모든 현안들을 일거에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할 순진한 의사는 없다. 의사 출신 장관이 그 막강한(?) 권한을 휘둘러 건강보험 수가를 대폭 올려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1년 남짓 근무하는 장관에게 뭘 그리 대단한 것을 바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 출신 장관을 은근히 희망하는 것은, 그리고 보건부 독립을 통해 의사 출신 장관이 좀 더 늘어나기를 바라는 이유는 딱 한 가지 아닐까. 적어도 다음과 같은 걱정을 하지는 않아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 말이다. 의료 현실을 너무 모르는 누군가가 와서 지금의 의료 왜곡을 더욱 심화시키는 아주 황당무계한 정책을 펼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평소 의사에 대해 이유 없는 반감을 갖고 있었던 누군가가 와서 의사와 국민 사이를 더욱 멀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너무도 정치적인 누군가가 와서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정파의 정략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의료를 악용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
청년의사 박재영 편집주간

그런데 의사가 복지부장관이 된다고 해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 출신이라서 의사에게 유리한 정책을 편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오히려 역차별적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까 하는 소심한 걱정도 하게 되고, 의사 출신 장관이 일을 너무너무 못하거나 여러 종류의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어 (의사들이 대표를 뽑아서 그 자리에 보낸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이 ‘의사들은 다 저 모양이야, 의사들은 역시 안 돼’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의사 출신 복지부장관은 다섯 명 있었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과 1989년에 걸쳐 연이어 장관을 지낸 권이혁·문태준 장관,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초대 장관이었던 박양실·주양자 장관, 그리고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복지부장관인 정진엽 장관이 그들이다. 권이혁 장관은 복지부장관이 되기 전에 이미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상태였고(심지어 나중에 환경처장관도 했다), 문태준 장관은 국회의원을 네 번이나 지낸 이후에 장관이 되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의사 출신’이라기보다는 ‘의사 출신 정치인 출신’ 장관이라고 하겠다. 개원의 출신으로 깜짝 발탁된 박양실 장관은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10일 만에 물러났고, 재선 국회의원을 지낸 후 취임한 주양자 장관 역시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2개월 만에 물러났다. 순수한(?) 의사 출신으로 무난히 장관직을 수행한 사람은 분당서울대병원장 출신의 정진엽 장관이 사실상 유일한 셈이다.

여섯 번째 의사 출신 복지부장관이 이번에 취임할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 하지만 이미 불거진 논란을 지켜보는 의사들의 마음은 씁쓸할 수밖에 없다. 무사히 취임한다 한들, 황당무계한 정책을 펴지 않는 것 말고 다른 어떤 훌륭한 성과를 이루기 어려워 보여서다. 그분이 임상의사로, 혹은 병원 경영자로는 훌륭한 분일지 모르지만, 복잡다기한 보건복지 정책 전반에 걸친 식견이나 능력은 전혀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많은 국민들은 적어도 일부의 의대 교수들이 자녀의 스펙 쌓기나 대학 입시나 병역 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955년에 보건부와 사회부가 통합된 이후 지난 67년간 총 54명의 장관이 재임했다. 평균 재임기간은 15개월이 채 안 된다. 그간 재임한 장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보건이나 복지 분야에 전문성이 있다고 보기는 힘든 정치인들이나 임명권자 혹은 그 배우자의 측근들, ‘여성 안배’가 첫 번째 낙점 이유로 보이는 인사들, 관련 분야 교수(물론 이 분들도 그냥 교수가 아니라 정권과 이래저래 인연이 있었던 분들일 테지만) 출신 몇 명, 그리고 가끔 정통 관료의 이름이 보인다. 아무나 시켜도 되는 자리는 결코 아니겠지만, ‘정말 최고의 능력을 갖춘 적임자’였다거나 ‘그분이 장관이 되어서 참 다행이었다’ 싶은 이름은 거의 안 보이는 걸 보면, 역대 대통령들이 복지부장관 자리를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잘 보여준다.

나는 보건복지부든 향후 독립될지 모르는 보건부든, 가끔은 의사 출신 장관이 책임을 맡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지명의 이유가 지금까지와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국회의원을 몇 번 했으니까, 누구의 측근이니까, 누구의 친구이니까, 이런 이유 말고, 의사 면허를 갖고 있는 동시에 보건복지 정책을 총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진짜 전문성까지 함께 갖추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였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잘 찾아보면, 그리고 발상을 좀 전환하면, 결코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50대 이상의 의사들 중에 잘 안 보이면 40대 이하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략 80년대 학번의 의사들까지만 해도 임상의학과 기초의학 이외의 분야로 진출하여 독특한 이력을 쌓아가는 의사들은 극소수였지만, 90년대 학번 이후에는 그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과거에는 의사이면서 ‘다른 일’을 하는 사례가 매우 드물어 흔히 신문의 인터뷰 대상이 되었고, 그 분야도 제약회사, 언론, 법조인 등으로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근래에는 창업, 국제기구, 금융, 벤처캐피탈, IT, 경제경영,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는 젊은 의사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이 의학적 배경 위에 다른 분야의 전문성과 현장 경험까지 갖추고 나면, 복지부장관이든 뭐든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김현철 교수는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콜롬비아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한 이후 코넬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홍콩과기대 경제학과 교수다. 전공은 보건경제학이고, 교육 및 노동 분야의 ‘인적 자본’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한다. 정책을 설계하고 사회실험을 통해 효과를 증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당연히 영어도 유창하다.

박건희 단장도 있다. 그는 서울의대를 졸업한 예방의학 전문의로, 세계보건기구 정직원으로 8년간 여러 나라에서 일했다. 국제기구 경험을 쌓은 이후에는 안산시 상록수보건소장으로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포함해 3년 6개월간 일한 다음 지난해 8월부터 경기도 감염병관리지원단장으로 일하고 있다. 지역 보건행정부터 국제보건 문제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김승섭 교수도 있다. 그는 연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보건학 석사, 하버드에서 보건학 박사를 취득했다. 고려대를 거쳐 지금은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 ‘미래의 피해자들은 이겼다’ 등 여러 훌륭한 저작들을 펴냈다. 성소수자, 해고 노동자, 세월호 피해자, 천안함 생존자, 소방관 등 사람들이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회적 약자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더 젊은 세대 중에는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가천의대 정재훈 교수도 있다. 그는 고려의대를 졸업한 예방의학 전문의로, 코로나 이전부터 의료정책과 역학 두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아 왔고, 코로나 시기에는 정확한 예측력과 걸출한 소통 능력을 보여 왔다.

김현철 교수와 박건희 단장은 77년생, 김승섭 교수는 79년생으로 모두 40대이며, 정재훈 교수는 84년생으로 아직 30대다. 너무 젊은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과거의 복지부 장관 중 유시민, 김종인, 손학규 장관 등이 만 나이 40대 중후반에 장관이 됐었다. 외국에는 40대는 물론 30대 장관이나 총리도 많다. 몇 년 내에, 혹은 지금 당장이라도 못할 이유는 없지 않나.

윤석열 당선인도 후보 시절에 “30대 장관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국무총리 및 장관 후보자 19명의 평균 연령은 60.6세이고, 최연소인 한동훈 후보자가 만 49세다. 복지부장관 후보로 위에서 언급한 분들과 같이 젊은 인재를 지명했더라면 평균 연령도 조금이나마 낮아지고 ‘능력만 보고 뽑겠다’는 말에도 믿음이 갔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

윤 당선인이 이 글을 읽을 리도 없고, 내가 장관 인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도 없다. 하지만 의사들 중에도 높은 분들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연결된 분들이 적지 않을 테니, 기회가 되면 “복지부장관을 맡을 만한 훌륭한 의사 출신 (젊은) 인재들이 많다”는 메시지를 좀 전달해 주시면 좋겠다.

끝으로, 나의 정보력이 부족하여 위에서 네 사람만 언급했지만, 그 외에도 훌륭한 인재들은 더 많을 것이다. 멀지 않은 미래에 의사 출신의 훌륭한 분들이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보고 싶다. 또한, 실명을 거론한 네 분과 나는 특별한 인연이 없음을 밝힌다. 정재훈 교수와는 코로나19 관련 방송 때문에 최근에 여러 번 만났지만, 나머지 분들은 한두 번 보았거나 아예 만난 적이 없다. 허락도 받지 않고 ‘복지부장관 후보’로 내 맘대로 거론한 것에 대해 화내지 마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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