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일차의료는 건강을 위해 가장 먼저 대하는 의료 제공자가 일정할 때 성립하는 용어이다. 일차의료 의사는 특정 ‘질병’이 아니라 포괄적인 ‘건강’에 초점을 두는 전문가로서, 개인이나 인구집단의 건강관리를 담당한다. 아울러 자원의 효율적인 활용을 위한 지휘자로서 조정기능을 수행한다.

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이와 같이 최초접촉, 포괄성, 조정기능이 이루어지면, 전인적 건강 돌봄을 바탕으로 하는 환자-의사 신뢰관계 즉, 지속성을 지니게 된다. 선진국 국민의 대부분은 주치의를 보유하는데, 이는 일차의료의 첫 번째 핵심속성인 최초접촉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주치의는 대체로 일차의료 전문의(GP/가정의)이지만,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 내과나 소아청소년과 의사를 포함하기도 한다. 장차 주치의가 될 일차의료 전문의를 양성하기 위해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1960년대 이후 의과대학에 가정의학과(department of general practice or family medicine)를 설치하고 학부생 임상실습과 전공의 수련기관으로 병원뿐만 아니라 일차의료 기관을 포함시켜 왔다.

국내에서도 가정의학과를 설치하고 가정의 배출을 시작(1986년)한 지 35년이나 지났다. 그렇지만 그 동안 정부는 국민에게 주치의를 보유하도록 홍보하거나 권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최초접촉’ 제공자가 없는 일차의료 부재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의료서비스는 지역사회에서조차 단과 전문의 1차 진료를 통해서 분절화 되어 있으며, 행위별수가제에 의해 분절화가 더욱 심해져 포괄적인 서비스 제공이 사실상 불가하다.

동네의원 의사는 주치의가 아니어서 조정기능이 어렵고, 환자-의사 사이의 신뢰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 게다가 정부는 일차의료 관련법과 제도를 정비하지 않아 왔으며, 일차의료 전문의 양성을 시장수요에 맡겨왔다.

의과대학은 학부생이나 전공의의 일차의료 실습과 수련을 위한 시설(표준 일차의료기관)을 설치하거나 운영할 법적인 의무가 없으며, 일차의료가 아니라 병원에 필요한 의료인 양성에 치중해왔다. 일차의료 교육수련을 담당해야 하는 의과대학 가정의학과는 그 교육수련 시설로서의 일차의료기관을 갖지 못하여 대학병원 가정의학과에서 일차의료 교육수련 기능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국내 상황이 이러함에도 그 동안 정부는 일차의료와 관련하여 헛다리 짚는 정책들만 지속해왔다. 예를 들면, 고혈압-당뇨 만성질환관리 사업은 ‘최초접촉’ 규정이 없는 질병 중심정책이어서 일차의료 정책으로 볼 수 없다.

의뢰-회송 시범사업은 병원에서 치료를 마친 환자가 지역사회로 돌아갈 때 주치의가 없어 회송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에 성공할 수 없다. 정부가 추진해온 처방건당 약품목수를 줄이려는 정책은, 일차의료의 포괄성을 고려하지 않는 1차 진료 활성화 또는 서비스 분절화 정책에 불과하다.

경증환자가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면, 병원과 환자 모두에게 불이익을 주는 정책은 얼핏 바람직하게 보이지만, 경증환자를 주치의도 없는 지역사회로 밀어내는 무책임한 정책이다. 교육수련기관인 대학병원에서 일차의료를 담당해왔던 가정의학과가 경증질환을 진료하지 못하게 한다면, 가정의학과를 폐지하겠다는 정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정부가 진정으로 일차의료 강화 정책을 시행하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치의 보유의 필요성에 대해서 대국민 홍보를 하고 주치의 보유를 권장하는 일이다.

그 다음 단계로 지역사회에 다학제 일차보건의료 팀이 활동하는 표준 일차의료기관을 설치하고 확대하는 일이다. 교육수련 기능을 맡는 의과대학 부속의료기관으로 ‘병원’만이 아니라 ‘일차의료기관’을 설치하도록 해야 한다.

지역사회 표준 일차의료기관을 의과대학 가정의학교실이 맡아 일차의료 교육수련 기능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산 탁상행정용어인 ‘의료전달체계’ 확립을 명목으로 대학병원 내 가정의학과의 일차의료 기능을 인정하지 않겠다면, 일차의료 교육수련을 포기하겠다는 정책이다.

정부는 보건의료정책을 입안할 때 병원과 질병 중심이 아니라 일차의료와 건강 중심에서 입안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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