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영의 모노태스킹

[청년의사 신문 박재영] 미국의 의료비 지출이 살인적 수준인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의료비 통제를 위한 미국 정부의 갖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2009년에 GDP의 17.3% 수준이었던 미국의 의료비는 오는 2019년이면 19.3%에 달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의료기관의 행정직원의 수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최근 40년 동안 미국에서 의사의 수는 세 배가 됐는데, 행정직원은 무려 서른 배가 됐다. 미국의 보건의료 종사자 수는 1990년부터 2012년까지 75%나 늘었는데, 증가한 일자리 중에서 단 5%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행정직원이었다. 그리하여, 현재 미국에서 의사 : 진료보조인력 : 행정직원의 비율은 1 : 6 : 10이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공공과 민간 영역에서 다수의 의료보험이 존재하는 미국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보험회사에 따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진료비 청구, 환자의 자격 확인, 의료행위에 대한 사전 허가, 각종 자료 제출 등의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2010년에 코넬 의대 로렌스 카살리노 연구팀이 전국의 의사와 행정직원들을 대상으로 행정업무에 쓰는 시간과 비용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의 의사 1인당 연간 행정비용은 평균 6만8,274 달러였다. 여기에 의사 수를 곱하면 무려 310억 달러에 달한다. 게다가 이는 관련 장비의 구입, 공간, 간호사나 보조인력의 비용은 제외한 보수적인 추산이다. 또한 75%의 응답자는 지난 2년 사이에 부담이 크게 혹은 조금 증가했다고 답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최근 늘어나는 행정비용이 대체로 ‘의료비 절감’을 목적으로 하는 정부의 규제성 조치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줄이기 위해서는 부정 수급자를 차단하고 진료비 심사와 평가를 강화하고 질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들 규제조치들이 한결같이 의료기관의 행정비용 증가를 유발하는 것이다. 의료비 통제를 위한 미국 정부의 노력이 의료기관들의 행정비용을 더욱 늘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컬하다.

우리는 어떤가? 전국민의료보험과 단일 보험자 시스템으로 인해 행정비용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하지만 의료비 증가율 세계 1위, 고령화 속도 세계 1위인 나라이다 보니, 의료비 통제를 위한 정부의 개입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고, 그에 따라 행정비용도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그 비용을 누가 지불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공단이나 심평원 등이 점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사회적 이익을 위해 사회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개별 의료기관들의 행정부담 증가는 어쩔 건가? 의료비 절감이라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모든 의료기관들은 군소리 없이 모든 잡무를 무료로 떠맡아야 하는가? 정확한 국내 통계는 없지만, 많은 병의원들은 점차 늘어나는 행정비용 때문에 골치를 썩으면서도 억울하다는 말 한마디 못하고 있다. 정부의 지시에 비협조적으로 나갔다가는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를 위해서 네 돈을 써라. 이건 ‘빵 셔틀’에서나 쓰는 수법이다.

큰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아직 이 문제의 심각성을 잘 모른다. 하지만 개원의들이나 병원의 경영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생기는 각종 서류를 준비하느라 죽을 맛이다. 사전 예고도 없고 이유에 대한 설명도 없으니 더욱 불쾌하다.

쓸데없는 규제는 없애야 한다. 꼭 필요한 규제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집행해야 한다. 그리고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라, 의료비 절감과 관련이 있는 규제에 따른 행정처리 비용에 대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있어야 한다. 산술적으로 계산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댈지 모르겠지만, 환자 1인당 얼마든, 보험진료비의 몇 퍼센트든,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액수가 적어도 좋다. 상징적인 액수라도 수가가 책정된다면, 서류작업에 시달리다 악에 받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조금은 수그러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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