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땜장이 의사의 국경 없는 도전> 저자 국경없는의사회 김용민 활동가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충북대병원에서 정형외과 교수로 26년 4개월을 재직해 온 김용민 교수가 퇴직을 6년 앞둔 지난해 조기 퇴직했다. 안정적인 지위와 명예를 내려놓고 그가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택한 것은 바로 ‘국경 없는 의사회’ 구호활동가다.

한센병 환우에게 도움이 되고자 전공도 정형외과를 선택했고, 의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학생 눈높이에 맞는 선생, 환자 입장을 헤아리는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김용민 활동가. 아이티 지진 구호단으로 활동한 이후에는 ‘자신을 더 필요로 하는 곳’에 가겠다고 결심, 6년이나 일찍 퇴직 한 뒤 국경없는의사회 구호활동가가 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와 아프리카 오지 감벨라를 누비고 왔다.

스스로를 ‘땜장이 의사’라고 말하는 그는 구멍 난 냄비를 때우는 땜장이처럼, 아픈 사람들을 고치는 것이 그의 소명이라고 말한다. 특히 최근에는 의대 교수에서 국경없는 의사회 활동가로 변신한 자신의 도전기를 담아 낸 책을 출간했다. ‘땜장이 의사의 국경 없는 도전’이다. 책에는 ‘소록도에서 팔레스타인까지’ 땜장이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 온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우리는 어떤 도전을 앞두었을 때, 가진 것을 잃을까 봐 선뜻 뛰어들지 못하거나, 굳이 귀찮은 수고를 하지 않을 이유를 찾느라 급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 인생을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직접 만든 신조어인 ‘어드벤더링(Advendering)’에 이 모든 의미를 꾹꾹 눌러 담았다. 모험과 도전을 뜻하는 ‘어드벤처(Adventure’와 방황하다의 ‘원더링(Wandering)'을 합쳐 만든 어드벤더링은 삶의 도전정신을 새롭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의사생활 35년을 사진으로 정리한 사진전도 열었다. 직접 도슨트에 나선 그를 만나 ‘어드벤더링’한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구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구호활동가로 전향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1980년 소록도로 한센병 환자들을 보기 위해 갔다. 남들이 꺼려하는 환자를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와서 돌보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도움을 주는 것이 의사구나’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정형외과를 전공한 이유도 소록도에서의 경험 때문이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때 아이티로 구호 활동을 떠나게 된 게 두 번째 계기가 됐다. 의사가 필요한 곳이라면 의사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막연했던 생각을 8년 뒤 실행에 옮기게 된 것. 예전부터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진 않았어도 언젠가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겠다는 말을 종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말이 정작 현실로 다가왔을 때는 놀라거나 걱정도 있었겠지만 고맙게도 담담히 받아들이더라(웃음).

- 국경없는의사회 활동은 어느 지역에서 진행했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파견기간은 2년이다. 다른 활동기회들을 알아보았는데, KOICA처럼 기본 2년으로 활동기간이 너무 길거나, 어떤 곳은 기본 경비조차 자비부담이었기에 포기했다. 반면 국경없는의사회는 국경없는의사회의 경우 교통비와 체제비가 제공된다. 일반 의사 기준으로 보면 턱 없이 낮은 금액이지만 노고에 대한 급여를 지급해준다는 점이 좋았다. 무엇보다 외과계열의 경우 단기로 기간을 선택해 다녀올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었다.

2018년 5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총상환자들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긴급 파견 요청이 들어왔고 사용하지 않았던 연가를 모아 2주간 파견됐다. 그리고 그 해 학교를 퇴직한 후 3개월 간 에티오피아 감벨라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며 남수단 난민과 지역주민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지난 1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2월에는 다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긴급 파견돼 한 달간 머물렀다.

- 현지 의료 환경은 어땠나. 파견돼 나갔을 때 힘들었던 점은 없었나.

치료나 수술을 할 수 있는 여건이 한국에 비해 많이 열악했다. 수술 중 갑자기 정전이 되거나 수술 장갑 위에 파리가 날아와 앉을 때도 있는데 의사로서는 당혹스런 순간이었다. 특히 현대 정형외과는 수술기구나 첨단장비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에서는 최소한만 있다고 보면 된다. 어린 시절 시골생활이 기억날 정도로 정말 아무 것도 없더라. 절망에서 아무 것도 없이 시작했는데 그 환경에 익숙해지며 진짜 정형외과 전문의로서 치료할 수 있었던 경험들이 뿌듯했다. 물론 좌절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지만.

수십 년간 정형외과 전문의로 쌓아온 치료 원칙이 있고 환자에게 그 치료를 해야 한다는 신념이 있는데 주변 여건들이 받쳐주지 않으니 너무 힘들었다. 환자들은 계속 오는데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왜 나를 이곳으로 오라고 했을까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사실 환경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내가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수술 여건이 열악해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 장비만 갖고도 많은 치료를 할 수 있었다. 스스로도 보람이 느껴졌다.

아프리카는 요즘 시대 트레이닝을 받은 정형외과 의사들은 아무것도 못하고 되돌아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들도 그런 환경에 처하면 훨씬 당황하고 힘들 텐데 지금 할 수 있는 게 불가능하다고 해서 포기하지 말고 처해 있는 상황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분명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 예비 의사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의대 교수시절 학생들에게 던지던 질문 중 하나가 ‘Let's be ( ) to our patient'였다. 괄호 안에 뭘 넣을래 질문하면 여러 답들이 돌아온다. 내 환자에게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지 물으면 어떤 학생은 ’친절한‘, 또 어떤 학생은 ’좋은‘이라고 답한다. 의사란 직업은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땐 ’도움이 되는‘ 의사다. 환자뿐 아니라 주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그것을 자기 철학으로 살 수 있다면 훨씬 좋지 않겠나. 이 시대 의사뿐 아니라 모든 시대 의사에게 공통적으로 통하는 문제인 것 같다. 돈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게 사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 줄 수 있다면 좋겠다.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국경없는의사회에서 긴급 요청이 들어온다면 달려갈 생각이다.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을 늘 갖고 있다. 지금 당장은 나의 경험들을 젊은 의사, 의대생 이외에 많은 의료인과 일반인들과 공유하며 인도주의적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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