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기의 좌충우돌

[청년의사 신문 이형기] “월급을 너무 많이 주는 것 아냐?” 회사 외부인이 사장에게 충고랍시고 이렇게 말했다. 귀가 얇은 사장이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 우리 회사가 월급이 많긴 해.’ 그리고는 갑자기 다음 달 월급을 삭감했다. 그것도 15%나.


필경 이런 회사는 오래 버티지 못 한다. 좋은 인재들이 금방이라도 떠나 버릴 게 뻔하니까. 무엇보다 이 회사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림을 꾸려야 할 주부들의 원망이 녹록하지 않을 터. 당장 아이들 학원비를 줄여야 할 판이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일이 국가 연구비 지원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됐다. 아직 최종 결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글로벌선도 임상시험센터의 지원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통보한 상태.

사연은 이렇다. 어떤 전문위원이 글로벌선도 임상시험센터 지원액이 크지 않냐는 개인의견을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 예산으로 병원 지원하는 것을 마뜩찮게 여기던 공무원의 귀가 솔깃해졌다. 마침 세금도 안 걷혀 고민이었는데 잘 됐다고 생각한 이 공무원은 단박에 15%나 예산을 삭감했다.

돈 주는 사람 마음 아니냐고 되물으면 사실 할 말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의 일방적인 연구비 삭감은 곤란하다. 엄연히 모든 기관과 조직에 예산이라는 게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고 없이 갑자기 예산을 삭감해 버리면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인’ 연구비 운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들쑥날쑥한 연구비 지원 시스템 하에서 누가 중장기 계획을 세우려 할까. 그리고 중장기 계획을 세우지 못 한다면 연구 목표의 달성 가능성은 당연히 떨어진다.

더군다나 예고 없는 연구비 삭감은 인력 운영의 파행으로 이어질 게 불 보듯 뻔하다. 결국 심각한 고용 불안이 야기될 것인데, 노동시장 안정화가 현 정부의 최우선 시책 중 하나라는 점을 떠 올리면 어이가 없다.

사실 글로벌선도 임상시험센터 지원 사업을 통해 과거 병원에서 드물게 보던 다문화·다언어·다인종 우수 인력의 유치가 가능했다. 서울대병원만 하더라도 이러한 인력이 있었기에 글로벌제약기업이 후원하는 환자 대상 최초인체임상시험(First-In-Human clinical trial)을 국내는 물론,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2건이나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고 없는 연구비 삭감 해프닝의 가장 큰 문제는 병원을 바라 보는 공무원, 더 나아가 일반 대중의 편향된 시각이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왜 민간병원을 국가 연구비로 지원해야 하는가 묻는다.

국가의 예산으로 병원, 특히 임상시험센터에 연구비를 지원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수도·전기·철도·항만·공항처럼 한 국가의 사회간접자본이면서 동시에 유료인 클럽재(club goods)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이들 클럽재의 이용자들이 돈을 내고 서비스를 사용하는 것처럼, 임상시험센터 역시 사용자인 제약기업들이 유료로 서비스를 구매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제수익은 결국 한 국가의 재화를 증대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국가의 구성원인 국민들에게 고용창출·산업발전·건강증진 등의 다양한 혜택이 돌아 간다. 마치 공항 건설을 통해 건축 산업이 발전하고, 공항이 건설된 다음에는 여행객의 증가로 관광 수입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래서 병원의 임상시험센터는 국가가 클럽재의 자산을 확보할 때처럼 예산(연구비)으로 지원하는 게 당연하고 마땅하다. 더군다나 임상시험은 한국의 의과학계가 글로벌 리더십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분야다. 며칠 전 사우디 아라비아 보건성의 고위 공무원과 회합을 가졌다. 그는 한국 임상시험센터의 시스템을 아예 턴키(turn-key)로 수입해가고 싶다며 고가의 비용에도 개의치 않았다. 최근 중동 여러 나라에 한국의 병원 시스템이 수출된 것과 연관이 있다. 의과학 분야에서 이처럼 한국의 위상이 높았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당연히 없었다. 이치가 이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의 임상시험센터를 국가가 연구비로 지원하는 것이 여전히 못마땅한 일부 공무원에게 말 해주고 싶다. “거, 줬다 뺐었다 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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