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경 고신대 복음병원 내분비내과


[청년의사 신문 청년의사]

그 아이의 첫 모습은 그간 내가 보아왔던 적지 않은 환자들의 마지막 모습 꼭 그것이었다. 숨을 거두기 직전이거나 직후이거나. 말 그대로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상태의 그 아이는 주민등록번호조차 없는 세상에서 이미 잊혀진 존재였다. 대체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세상 어느 구석에 숨어 있다가 이지경이 되어서야 병원에 온 것인지 어이가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수술도 로봇으로 하는 시대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 표면의 조그만 단백질을 표적으로 하는 약제들이 있는 시대에, 몇 백만원, 몇 천만원에 달하는 치료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이 시대에, 고작 39원짜리 알약 몇 번이면 조절할 수 있는 ‘갑상선 기능항진증’으로 심정지에 코마상태라니.

도대체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과연 이 아이는 살아날 수 있을까?

20살 그 아이는 119를 통해 응급실로 실려왔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당시 이미 그 아이의 심장은 뛰지 않았다.

“환자 history가 어떻게 되죠?”

“네, 환자는 15년 전 초등학생 때 갑상선 기능항진으로 진단받았지만 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6개월 전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일주일 전부터는 기침과 가래가 있으면서 물밖에 먹지 못했다고 합니다. 환자가 너무 힘들어서 119에 직접 전화를 했다는데, 119에서 이송하던 중 차안에서 cardiac arrest(심정지)가 떠서 cardioversion(제세동)을 하고 내원했습니다. 내원당시 BP, pulse(혈압, 맥박)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뭐 했대요? 가족은 있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가족은 없고, 여관에서 남자친구랑 동거하고 있는데, 주민등록번호가 없습니다.”

“네? 그건 무슨 소리예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접수는 되어 있어요?”

“접수는 임시 이름으로 해두었고, 주민등록번호는 내일 사회사업실 통해서 동사무소에 살릴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기가 막힌 히스토리를 가진 이 아이 덕분에 바쁜 우리 전공의 선생님의 비의학적 임무가 막중해졌다. 우리 내과 전공의 선생님들이 우수했던 것인지, 아이의 끈질긴 생명력 덕이었는지 응급실 도착 직후 20분 동안의 심폐소생술 끝에 이 아이의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 아이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든 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심장만 뛰었지, 다른 모든 장기들은 마치 101살 노인의 그것처럼 일하기를 포기해버렸다. 이미 15년 동안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 갑상선 기능항진증 때문에 모든 장기들은 늙어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20분 이상 지속된 심정지 상태는 모든 장기를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 아이의 뇌는 통증에도 반응이 없는 상태로 깊이 잠들어버렸고, 폐는 이미 폐렴균과 염증이 만들어 낸 분비물로 구석구석 틀어 막혀 있었다. 신장은 소변을 한 방울도 거르지 않아 요독이 오르기 시작했고, 간수치는 끝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그 아이는 ‘다발성 장기부전을 동반한 갑상선 중독 발증의 코마 환자’였다.

그렇지만 거부할 수 없는 생명의 사인이 남아있는 것을 어쪄랴? 어떤 의사가 뛰고 있는 심장을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주민등록번호도 없는 그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24시간 지속 투석기를 달고, 소변줄과 비위관을 꽂아두었다. 항생제와 갑상선 호르몬의 방출을 막는 약제들과 혈압과 맥박을 유지하는 여러 가지 약제들을 처방했고, 몸에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근육과 지방이라고는 한조각도 남아있지 않은 그 아이를 위해 정맥영양 주사를 투여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단 하나,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아무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는 말 한마디와 함께.

‘언제까지….’

하루, 이틀이 지나 곧 한 주, 두 주가 됐다. 그간 그 아이의 가족을 한 명 찾았다.

친 여동생이었는데 동생도 딱하긴 마찬가지였다. 18살의 미혼모인 동생은 대전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병원비는 설명을 했어요?”

“네, 그런데 동생도 insight(인지)가 없어요. 설명을 하면 조금 걱정하는 듯하다 돌아서면 바로 환자 남자친구랑 낄낄대면서 웃고, 좀 이상해요.”

“그래요? 그럼 이 환자는 앞으로 어떻게 한대요? 계속 이렇게 있을 수도 없고.”

“동생이 대전에 인공호흡기가 되는 병원 중에 갈만한 데가 있는지 알아본다고 했는데, 알아보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아이와 그 아이의 남자친구, 그리고 그 아이의 동생에 대해서 나는 썩 좋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책임감이라고는 배워보지도 가져보지도 않은 아이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류의 아이들은 철이 없어 자기 마음대로 살다가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책임지지도 못할 아이를 또 가지게 된다 싶었다. 이 상황도 동사무소나 사회사업실이나 다른 누군가가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아이들이 해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내가 그 아이들에게서 일말의 책임감을 기대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의 의식이 돌아왔다. 눈을 깜빡이기 시작한 것이다.

“들려요? 들리면 눈 감아보세요”라고 하면 눈을 깜박여주는 그 아이를 보면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는 듯했다. 생명이란 그 자체가 이렇게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을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그 아이를 살린 것에 대해 회의를 가졌던 것에 미안해하며 중환자실에서 잠시 시간을 지체했다. 그간 수고한 간호사들에게 인사를 전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보호자는 자주 와요?”

“네, 사실 하루 두 번 면회시간 한 번도 안 빠지고 남자친구가 꼬박 꼬박 와요. 사실 그래서 얘네들이 더 불쌍해요. 사실 처음에는 그 남자친구란 아이가 너무했다고 생각했거든요. 여자친구가 이 지경이 되도록 뭐했나 싶어서요. 아마 자기마음대로 놀러 다니면서 방치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 애 하는 걸 보면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보통 저 나이 철없는 애들은 이런 일이 생기면 여자 친구 버리고 도망가 버리잖아요. 며칠 지나고 도망갈 줄 알았는데 매일 찾아오는 게 기특해요.”

담당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책임감 없는 그런 류의 아이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내 마음도 들킨 것 같았다. 그 아이와 남자친구라는 아이의 동거가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를 일상이 흐르고 있었다. 중환자실의 그 아이도 병원에서 늘 겪게 되는 숱한 환자들 중 하나일 뿐 병원의 일상이란 그렇게 바쁘게 흘러가 버린다. 오후 외래를 보러 가는 바쁜 걸음 중에 반가운 얼굴이 있어 인사를 나누었다.

응급실 수간호사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그 환자 괜찮아요? 그 어린애 있잖아요. 갑상선 환자.”

“예, 많이 좋아지긴 했어요. 아직 의식이 거의 없어서 대화는 안 되지만요. 그런데 그 환자 어떻게 아세요?”

“그 애 응급실에 왔을 때 제가 있었잖아요. 그 애들 너무 안됐어요.”

“그죠? 그 애들 참 안됐어요. 왜 이지경이 돼서야 병원에 온 건지…. 하루만 일찍 왔으면 이렇게는 안됐을 텐데요.”

“교수님, 그 애들 전날 병원에 갔었데요. 그 남자애가 처음에 왔을 때 이렇게 된 게 자기 부모 때문이라면서 울더라고요. 여자애가 고아원에서 도망치면서 주민등록번호는 말소시켰고, 그 뒤에 남자애 집에서 시부모님이랑 같이 살았는데, 여자애를 못살게 괴롭혔데요. 그래서 둘이서 도망 나와 살고 있었는데, 이 여자애가 너무 아프니까 남자애가 얘를 업고 병원에 갔었데요. 그런데 병원에 가니까 주민등록번호가 없어서 치료를 못해준다고, 주민등록번호 살려가지고 다시 오라고 했데요. 얘네들이 그렇게 되니까 어떻게 할지 몰라 여관에 다시 돌아가서 누워 있다가 119를 부른 거랍니다.”

그 날 오후, 나는 세상이 그 아이들에게 얼마나 잔인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버렸다.

이렇게 눈부신 오후햇살을 너는 한번 아름답다 생각해 본 적 있었을까? 나는 그 아이들이 지냈다던 어둡고 눅눅했을 여관방을 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 아이는 자신을 찾지 못하도록 주민등록번호까지 없애고 도망쳐야 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너희들은 아무도 찾지 못할 조그만 여관방 구석으로 숨어들어갔을까. 6개월간 먹지도 못하고 말라가는 여자아이를 지켜보던 남자아이, 그 여자아이를 업고 병원을 찾아가던 그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 찾아간 병원에서 도와줄 수 없단 얘기를 들은 그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눅눅한 여관방에서 마지막 죽을 힘을 다해 전화기로 다가가 119를 눌렀을 그 여자아이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어디에 가야 하는지, 누구한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 들어본 적도 없는 그 아이들. 세상에서 거절만 당해온 아이들. 의지할 곳이라고는 서로 밖에 없었을 이 아이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도움의 손길들이 있는데 이 아이들은 왜 한 번도 그런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했을까? 그 날 한 조각 햇살 속에서 거짓말 같은 그 이야기들이 내 마음을 할퀴고 있었다.

한 달이 지나고 그 아이는 동생이 사는 대전에 있는 병원으로 옮겨가기로 했다.

전원을 가기로 된 날 아침, 담당 전공의가 흥분해 있었다.

“교수님, 어제 처음으로 urine이 150cc 나왔습니다.”

그것은 정말 예상치 못한 기적이었고, 그동안 고생한 담당의사에겐 뜻밖의 선물이었다. 어린 아이가 첫 걸음마를 뗄 때를 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렇지만 그 아이의 신장에서 소변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아기가 걸음마를 하는 것처럼 당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쁨이 큰 만큼 기대와 염려가 찾아왔다.

“여기서 제가 조금만 더 보면 투석기도 뗄 수 있을 것 같고, 인공호흡기도 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이제 어떤 병원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고 괜히 보냈다가 다시 안 좋아질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그 고생을 하고도 끝까지 살리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우리 전공의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웠다.그렇지만 같은 불안함을 가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마지막 기도뿐이었다.

‘OO야, 살아줘서 고마워. 그래, 이제 와서야 세상이 너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 고작 하루하루 중환자실비 밖에 되지 않네. 하루 인공호흡기 값, 하루 투석 값, 하루 항생제 값, 하루 항갑상선제 값 밖에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렇지만 너는 이제 너에게 그것 밖에 주지 못한 세상에 오히려 기적을 선물해 줄래? 꼭 살아나서 주렁주렁 달린 이 기계들 모두 떼어내고 말이야, 너의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도 낳고 함께 따뜻한 방에 누워 오손도손 살아줄래? 원래 세상이 너에게 주어야만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거든.’

지금쯤 그 아이는 어디에서 얼마쯤의 기적을 더 보여주었을까? 나는 믿고 싶다.

[수상 소감] 김부경 고신대 복음병원 내분비내과

함께 누리는 행복,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


2013년은 조교수로 발령 받아 모교에 돌아온 첫해입니다. 20살부터 30대 중반까지 배우고 사랑하고 웃고 울었던 곳, 모교로 돌아와 10여년 전 나의 모습을 닮은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얼마나 설레고 감사한 일인지요. 그렇지만 아주 익숙한 곳에서조차 역할이 달라지면 다시 적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교수라 불린 후 여태껏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막중한 책임감을 경험했습니다. 환자에 대해 최종 결정을 하고, 그것에 완전히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의대를 졸업하고 전임의 시절까지 한번도 환자가 온전히 제 환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고작 십분 정도 나열할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학생들이 졸아주지도 않고 저에게 집중해주면 고마우면서도 이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이 혹 저의 부족함에 제한되지는 않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미수필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는 몸이 많이 아플 때였습니다. 병가를 내고 이불 속에 누워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어물쩍 넘어갔던 사실들을 하나씩 꺼내어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일을 어디까지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것인가, 세상의 문제를 어디까지 나의 문제로 인식할 것인가에 대해 입장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의사로서 엄마로서의 역할만으로도 이렇게 힘에 부쳐 전전긍긍하면서, 지난 한해 동안 이 사회의 곳곳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는 소식들이 들릴 때마다 마음까지 아팠습니다. 감당도 못할 거면서 고민은 왜 하는지 그냥 눈감으면 그만인 것을. 이 글은 지난 시간 동안 그런 제 고민에 대한 한 조각 흔적입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주말에는 잘 하지도 못하는 서툰 솜씨로 엄마 역할을 하며, 몸은 현실에서 제자리걸음하면서 머릿속에서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저만치 달려 나간 피곤한 대한민국의 의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저 생각을 따라 글을 쓰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세상이 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었던 것이 그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내가 더 잘나간다는 것을 입증해야만 하는 악착같은 그 무엇이 아니라 함께 누리는 행복이었으면 했습니다. 만약 이 아이들이 아기를 가질 기회가 있었다면, 그 아기는 우리 딸 정도는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했습니다. 수상 소식은 힘들었던 지난 1년에 대한 위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누군가 제 글에 공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힘이 됩니다. 글은 언제나 내면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통로입니다. 말로는 하기 힘든 이야기들도 글을 통해 할 수 있습니다. 늘 감사하면서도 그 마음을 전하기 힘든 여러분들께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 글의 주인공 아이의 담당의사로 고생한 양정욱 선생님을 비롯하여 밤낮없이 고생하는 우리 내과 전공의들 모두, 날카로운 지성과 따뜻한 마음을 가지신 권수경 교수님과 저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최영식 교수님, 박요한 교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지원군이 되어주시는 저희 시부모님, 저를 이렇게 키워주신 아버지, 유난히 별난 딸 덕에 애를 많이 태우시는 나의 어머니, 무뚝뚝한 매력의 남편과 애교쟁이 우리 딸, 모두 다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시고, 서툰 글 솜씨에 과분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해마다 글을 쓸 수 있는 기회의 장을 열어주시는 한미약품과 청년의사에 감사인사를 전합니다. 새해에는 더 건강하고, 더 많이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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