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욱의 블루하우스

의료정책에는 환자보호의 이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여기서 ‘환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념이 ‘의사는 보호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의사도 대한민국 헌법이 보호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환자의 이익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료정책에서 환자보호 정책은 그 한계에도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환자를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되 그것이 지나쳐 의사의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균형적 의료정책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서 환자를 보호해야 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의료정책에서 환자보호 이념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소위 정보의 격차다. 보건경제학에서 유래된 이 개념은 의사는 전문지식으로 무장되어 있고 환자는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 둘의 관계는 형식적으로는 평등하게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불평등한 관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추정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국가가 환자를 도와 주어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료분쟁 관련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환자의 정보 부족을 보완해 환자와 의사가 대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공정한 분쟁 해결의 구조 자체를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

재판은 가장 중요하고 공정한 분쟁해결절차이다. 재판의 신속성에는 의문이 있을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해 불만도 있을 수 있지만 재판 절차는 가장 공정하게 구성되어 있다.

의료소송에서 재판장은 통상 의료감정을 시행한다. 전문가가 전문가 편을 들어 줄 우려가 있다고 재판장이 비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의료 소송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전문적 영역의 재판이 마찬가지다.

대신 재판장은 전문성과 공정성을 겸비한 감정인 목록을 관리하고 양 당사자의 합의라는 절차를 거쳐 감정인을 선정함으로써 감정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보장한다. 더 나아가 재판장은 전문가의 감정 결과에 기속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의료분쟁조정법은 조정이 아닌 감정마저 비전문가가 다수를 차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동법 제26조 제7항은 5명의 감정부 구성원 중 의료전문가(의사, 치과의사, 한의사)는 1명 내지 2명이며 판검사, 대학교수, 소비자단체에서 추천하는 사람이 3명내지 4명을 차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판에서는 결코 비전문가에게 감정을 맡기지 않는데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감정부는 비전문가가 참여하는 것을 넘어서 비전문가가 다수를 차지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는 환자 보호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

따라서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감정부는 전적으로 의료전문가로 구성하되 환자단체나 소비자단체가 추천하는 의료전문가가 참여하는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 요컨대 감정은 의료전문가에게 맡기되 그 추천을 환자단체나 소비자단체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대표인 안기종님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안기종의 Listen to patients)를 보면 안 대표는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비상임 감정위원임을 약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회장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의 감정위원을 맡는 것이 객관성과 공정성의 입장에서 합당할 리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회장이 감정위원을 맡는 것도 합당한 것일 수 없다. 더군다나 안 대표는 의사나 치과의사인 의료전문가도 아니다.

의료분쟁조정의 강제개시 도입에 대한 의사들의 광범위한 반발에는 보건복지부와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만들고 조장해 온 이러한 불합리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정책이 바뀔 수 있다면, 환자를 보호하되 그 한계를 지켜준다면 오히려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이 그 본연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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