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욱의 블루하우스

의료사고 시 사망자 등에 대해 조정절차를 강제 개시하는 의료분쟁조정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상당수의 의사들은 중환자기피법이 될 것이라며 분노하고 있다.


반대로 상당수 환자단체 관계자들은 이를 과도한 선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의사는 환자의 선택권(혹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한다. 임상 현장, 특히 대형병원에서 환자의 선택권이 제대로 존중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최종적으로 평가했을 때 아직 형식적 존중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전부는 아니겠으나 의료윤리연구회 등 일단의 의사단체는 의사가 환자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

최소한 이러한 대의명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의사는 없다.

그렇다면 반대로 환자나 환자단체 관계자가 일부라도 의사의 선택권(혹은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한다는 생각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가? 들어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사실 환자나 환자단체 관계자가 이런 생각을 하기 힘든 이유가 있다. 실제로 임상현장에서 환자의 선택권이 침해되는 경우는 많지만 의사의 선택권이 침해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는 환자의 선택권 침해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제도적 차원에서는 전혀 다르다. 우선 의료법 제15조 제1항에 의하면 의료인은 진료나 조산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못한다.

반면 미국이나 독일 등 외국에서는 일반환자가 아닌 응급환자에 대해서만 진료를 강제하고 있다.

의사나 변호사의 서비스는 민법상 위임에 해당하고 기본적으로 양 당사자가 합의(계약) 후 서비스 제공(진료 혹은 변호)이 시작되는 것이 원래적 모습이다.

국민건강보험법상 강제는 훨씬 더 강도가 세며 매우 포괄적이다. 요양기관 강제지정, 강제수가, 강제심사, 동의비급여(임의비급여) 금지 등 수 많은 강제가 있다.

해마다 진행되는 수가계약도 형식적일 뿐 내용적으로는 강제계약에 해당한다. 헌법재판소는 반복적으로 요양기관 강제지정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미국, 독일은 물론 영국에서도 의사에게 사회보장진료를 강제수가로 강제로 떠맡기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단체계약 혹은 집단계약의 형태이다.

이처럼 진료강제, 요양기관 강제지정, 강제수가, 강제심사, 동의비급여 금지는 다른 나라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보편적인 제도는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 특유의 제도들이다.

이런 강제적 규정의 연속선상에서 의료사고로 환자가 사망한 경우 조정절차를 강제개시하는 또 하나의 강제가 시작된 것이다.

환자나 환자단체 관계자들은 의료관련 법령이 의사에게 부과하는 여러 강제 규정에 대해 별다른 인식이 없다.

오히려 환자의 권리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묵시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조정절차의 강제 개시에서 ‘강제’를 전혀 무겁게 생각하지 않는다.

의사가 조정안에 동의하지 않으면 서명하지 않으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이런 입장이다.

반면 대다수의 의사들은 조정절차를 강제 개시하는 이번 입법을 기존의 수많은 강제적 규정의 연속선상에서 받아들인다.

단체 격투기 경기에서 복부를 맞고 또 맞아 탈진한 선수가 누군가 날린 주먹에 맞았을 때 그동안 맞은 모든 타격이 누적돼 충격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자와 의사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그러나 환자의 임상적 선택권을 지키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의사가 많을수록, 의사의 제도적 선택권을 지키고 보호해 줘야 한다는 환자나 환자단체 관계자가 많을수록 진료현장은 치유라는 본질에 더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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