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이하는 존 스노 박사와 가상의 인터뷰다. 대부분 관련 자료를 참고했고 필자의 추측도 일부 들어 있다.

빅토리아 여왕. 런던 국립해양박물관. 박지욱 사진.
빅토리아 여왕. 런던 국립해양박물관. 박지욱 사진.

- 참, 빅토리아여왕 출산 때 박사님께서 직접 마취하신 걸로 유명합니다.

- 영국에서 내가 아니면 누가 여왕 폐하를 마취하겠소?

- 맞습니다. 스노 박사님이 당대 최고의 마취 전문의사시니까요. 그런데 여왕은 어떻게 무통 분만을 하실 생각을 했을까요?

- 남편인 알버트 공 때문이오. 1840년에 결혼한 여왕은 그 해 말부터 1850년 5월까지 9년 반 동안 무려 7번이나 출산하셨소. 16개월 마다 한 번 꼴이오. 엄청나지 않소?

- 빅토리아 여왕은 ‘다산의 여왕’이네요!

- 그렇소. 다행히 출산 과정에서는 별 일이 없었지만 여왕께서는 자신이 꼭 ‘동물이 되는’ 것 같다며 출산 자체를 싫어하셨소. 그리고 출산 때마다 1년씩 산후우울증을 앓으셨소. 그런 여왕께서 1952년에 또 임신하신 거요. 여왕은 벌써부터 출산의 고통을 떠올리며 예민해지셨소. 그래서 알버트 공이 나서신 거요. 알버트 공께선 진작부터 마취에 관심이 많으셨소.

- 여덟 번째 출산 때 불려 가셨네요.

- 1853년 4월이오. 나는 53분 동안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했고 무통 분만으로 레오폴드 왕자께서 태어나셨소. 여왕께서는 무통분만이 좋으셨던지 3년 뒤에 베아트리스 공주를 낳을 때도 나를 부르셨소. 그리고 프러시아 왕비가 된 빅토리아 공주도 무통분만으로 출산하게 하셨소.

- 여왕 폐하를 마취했으니 이제 런던 아니 제국 최고의 의사가 되신 거네요. 이제 부와 명예를 맘껏 누리셨겠습니다. 동네 산과 의사에서 영국 최고의 마취 의사로 깜짝 변신입니다.

- 그렇게 제2의 인생이 시작되는 것 같았소. 그런데 이듬해 여름인 1854년 8월에 소호에서 콜레라가 터진 거요.

- 그렇다면 콜레라 연구는 마취 다음의 일이었군요.

- 그렇소. 우리 동네에서 이런 일이 터졌는데 내가 어찌 잠자코 있기만 하겠소.

- 소문에 박사님은 물에 대한 결벽증이 있다던데 사실입니까?

-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오. 내가 나고 자란 요크의 고향 마을은 종종 홍수가 나면 강물이 범람해 마을이 잠기곤 했소. 그럴 때마다 시궁창 물이 마을을 휩쓰는 거요. 생각해 보시오 당시에는 강이 바로 하수도였소. 상류에서 버린 쓰레기가 강을 타고 내려가는데 홍수가 나면 … 얼마나 끔찍할지 상상에 맡기겠소.

- 저도 어릴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도 강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홍수가 나면 일단 강물보다 먼저 하수가 역류를 했습니다. 제 무릎만큼 물이 찬 기억도 납니다. 저는 신기하다고 좋아했지만 … 지금 생각해보니 범람한 하천은 부산에서도 더럽기로 유명한 오염 하천이었네요…

- 그때 트라우마가 생긴 지는 몰라도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물을 안 믿었소. 런던 시내에는 돈을 받고 물을 대주는 상수도회사도 있고, 깨끗하다고 소문난 우물들도 있었소. 하지만 나는 언제나 증류수만 마셨소. 술은 아예 입에도 안 대고.

- 그런 물에 대한 결벽증 때문에 콜레라가 수인성 질병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신 건가요?

- 그때는 그렇게 생각은 안 했소. 사실 그 결과는 공기를 연구하다 얻어진 거요. 사실은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소.

- 무슨 말씀이신지?

- 1848년에 콜레라가 다시 돌았소. 타워브리지 남쪽 호슬리다운(Horselydown)의 어느 여관에서 함부르크에서 온 선원이 콜레라에 걸렸소, 9월 22일에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몇 시간 만에 죽어버렸소.

- 아침에는 멀쩡했던 사람이지만 오후에는 의사가, 저녁에는 장의사가 찾아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콜레라는 진행이 빠릅니다. 정말 순식간에 목숨을 잃습니다. 치사율로 20~50%니 되구요.

19세기 중반 콜레라 환자의 죽음. Pavel Fedotov 그림.
19세기 중반 콜레라 환자의 죽음. Pavel Fedotov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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