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이하는 존 스노 박사와 가상의 인터뷰다. 대부분 관련 자료를 참고했고 필자의 추측도 일부 들어 있다.

- 1836년에 런던에 왔을 때가 23세였소. 그레이트 윈드밀 가에 있는 헌터의학교(the Hunterian School of Medicine)에 입학했소. 하숙집은 그 북쪽의 소호 지역인 뱃맨스 빌딩스 11번지에 얻었소. 당신이 아는 것처럼 이후로 쭉 소호에서만 살았소.

- 헌터의학교는 유명한 서젼 존 헌터(John Hunter; 1728~1793)와 관련 있는 곳인가요?

- 그렇다고 볼 수도 있소. 존의 형인 윌리엄 헌터가 1769년에 문을 열었으니. 윌리엄은 해부학자 겸 산부인과 의사이고, 동생 존은 잘 아는 것처럼 18세기의 위대한 서젼이 되는데 존도 런던에 올라와서는 여기서 해부학 강사 일을 했소.

- 형은 산부인과, 동생은 외과에서 이름을 날렸죠. 그리고 해부학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 하여간, 내가 런던에 와보니 의학교가 21개 있었는데 고맙게도 여기가 제일 저렴했소. 학비는 모두 34파운드(지금 한화로 670만원)나 들었소. 농부들 1년 수입의 3배나 되는 돈이지. 하지만 여길 나와야 번듯한 서전-약종상 면허를 받을 수 있었소.

윌리엄 헌터의 저서 'Anatomia uteri umani gravidi'의 삽화. 위키백과 자료.
윌리엄 헌터의 저서 'Anatomia uteri umani gravidi'의 삽화. 위키백과 자료.

- 학교는 몇 년 다녔습니까?

- 2년이오. 학교에서는 강의 듣고, 실습을 하고 웨스트민스터 병원에 나가 임상실습도 했소. 좋은 학교였소. 그런데 내가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가 문을 닫아버렸소. 1839년이오. 70년 역사를 지닌 좋은 학교였는데. 지금 그 자리엔 웨스트 엔드의 리릭극장(Lyric Theatre)가 있소. 뮤지컬 좋아하오?

- 아뇨. 남들은 런던 가면 웨스트 엔드에서 뮤지컬 보라고 하던데, 그 시간에 여기 온 겁니다.

- 보기보다 선생도 괴짜인가 보오.

- 하하, 그런 가요? 좋은 듯으로 알고 새기겠습니다!

- 2년 마치고 1838년에 서젼협회(the Royal College of Surgeons; RCS)의 회원이 되고, 같은 해에 약종상협회(the Society of Apothecaries)의 회원 자격을 얻었소. 이제 어엿한 서전, 약종상 면허가 있고 그걸로 런던에서 개업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아쉬웠소. 대학에 가서 학위를 따면 대학교수가 될 수도, 어려운 병을 치료할 기량을 갖출 수도, 상류층 환자의 주치의가 될 수도 있었소 그게 안되면 제대로 된 공부라도 할 수 있을 것 아니겠소. 때마침 신설된(1836년) 런던대학(University of London)에 입학했소. 여기 의대는 기초 의학 과정 이수자만 받아주는데 다행히 헌터의학교를 마친 학생은 통과였소. 1843년에 대학을 졸업했고(M.B.) 이듬해엔 시험도 통과해서 정말 닥터(M.D.)가 되었소. 내 나이 31세 때요. 이제 내가 원하는 진료를 제한 없이 할 수 있게 된 거요.

일종의 약창고인 런던의 옛 세인트토머스병원 Herb Garret(약초 다락방). 약종상의 작업 공간이다. 박지욱 사진.
일종의 약창고인 런던의 옛 세인트토머스병원 Herb Garret(약초 다락방). 약종상의 작업 공간이다. 박지욱 사진.

- 졸업하시곤 뭘 하셨습니까?

- 다른 의학교에서 강사 생활도 좀 하고 프리스 가에 개업도 했고.

- 개업해서 성공은 하신 거죠?

- 헌터의학교의 설립자인 윌리엄 헌터가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였소. 그래서 학교에서 산부인과를 잘 가르쳤지. 덕분에 개업해서 산과나 소아과 환자를 잘 본다는 소문이 나서 큰 도움이 되었소.

- 그 시절에 이미 산부인과 의사로 특화된 진료를 하신 거네요.

분만 의자. 당시에는 앉아서 아기를 낳았다. 런던 웰컴컬렉션. 박지욱 사진.
분만 의자. 당시에는 앉아서 아기를 낳았다. 런던 웰컴컬렉션. 박지욱 사진.

- 그렇소. 환자는 많이 본 편이지만 환자들에게 친근하고 정감 있는 의사는 아니었소. 무뚝뚝한 편이었지. 그래도 30대 초에 이미 꽤 성공한 개원의로 자리를 잡았소. 돈은 벌었지만 잘 쓰진 않았소. 검소한 편이라고 합시다. 결혼도 안 하고. 술도 입에 안 대고, 건강 관리를 열심히 했소. 그러다 보니 사람들하고는 잘 안 어울리고, … 진료 마친 후에는 집에서 혼자 연구를 하는 것이 취미생활이었소. 당신도 무슨 취미가 있소?

- 이렇게 선생님처럼 의학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사실 저도 개원의이지만 개원의가 개인적으로 연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주로 어떤 연구를?

- 당시 의료에는 아직 해결 못한 구멍이 많았소. 그런 걸 파고들었던 게요. 혼자 연구하고 논문도 쓰고 나름 바빴소(10년 동안 논문 50여 편을 발표했다). 그러다가 중요한 일이 생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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