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예방의학 수업도 끝나고, 시험도 치르고, 학교도 마치고 나니 존 스노의 콜레라 펌프도 콜레라 지도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이 이야기를 다룬 책 <바이러스 도시(The Ghost Map>를 읽으면서 스노의 콜레라 역학 연구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잊었다.

몇 년이 지나, 마취학의 역사를 뒤척이다가 존 스노를 다시 만났다. 빅토리아 여왕이 왕자를 낳을 때 무통분만 목적으로 여왕을 직접 마취한 이가 바로 존 스노라는 것이 아닌가! 동명이인인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같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스노는 마취 의사이자 역학자, 아니면 세균학자였단 말인가?

감염병 연구과 역학은 연관 학문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술실의 마취와 거리의 역학은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마취의사는 수술실 안에서 한 사람이 환자를 마취해 외과 의사의 수술을 도울 뿐이다. 하지만 역학은 큰 눈으로 세상을 봐야한다. 한 사람이 아닌 집단을 봐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을 한 사람이 했단 말인가? 그래서 존 스노라는 사람을 알고 싶었고, 여기 런던 한 복판 소호의 브로드윅 가를 찾아왔다.

분명 이 근처 어디일 텐데…사람들과 차를 피하고 우산까지 쓰고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펌프를 지나치고 말았다. 되돌아가보니…아, 저기 있네!’

콜레라 펌프가 있던 곳은 브로드 가 40번지 바로 앞이었다. 이 거리는 지금 브로드윅 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지욱 사진.
콜레라 펌프가 있던 곳은 브로드 가 40번지 바로 앞이었다. 이 거리는 지금 브로드윅 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지욱 사진.

특별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유명한 볼거리는 아니었다. 무심히 지나가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거리 모퉁이에 서 있는, 물 길어 올리는 구식 펌프일 따름이다. 울타리가 쳐진 것도 아니고, 요란한 기념비도 없었다. 그 자체로 기념비가 된 펌프 하나만 동그마니 서있었다.

나도 초등학생이었을 때 물 길어본 적이 있는 펌프와 닮았다. 70년대에 우리학교 뒷마당에 물 긷는 수동 펌프가 있었고, 청소 당번들은 걸레를 거기까지 가서 빨아야 했다. 수도 꼭지를 틀면 나오는 물은 귀한 물이라 아껴 써야 했고, 걸레 빠는 허드렛물은 이렇게 펌프로 공짜로 길은 물로 빨아야 했다.

이런 펌프는 먼저 마중물을 넣고 손잡이를 몇 번 아래로 힘차게 눌러주어야 물이 빨려 올라왔다. 여학생들 앞에서 힘센 척하느라 팔을 무리했던 아픈 기억도 난다. 그런데 소호 거리에 서있는 이 펌프는 손잡이가 없다! 주변에 어디 떨어져 나간 것 같지는 않고 아예 손잡이가 없다. 손잡이가 없는 펌프는 물을 길을 수 없는데 어찌된 사연일까? 아무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그 사연을 알 길이 없다.

펌프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바로 그 옆에 있는 건물은 <존 스노(John Snow)>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 반가웠다. 아마 박물관이겠지? 아니었다. 그냥 펍(pub)이었다. 그래도 스노와 무, 스노의 초상화도 깃발처럼 걸려 있다. 존 스노와 무슨 관련이 있겠지?

펍이 자리한 건물 외벽에는 런던의 유적지에만 붙는다는 파란 표찰(blur plaque)이 있다. ‘Chemical Landmark(화학 유적지)’라는 표찰에는 ‘역학(epidemiology)의 아버지인 존 스노가 1854년에 근처의 물 펌프와 관련된 죽음을 연구해 콜레라가 수인성 질병이라고 밝혔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왜 ‘medical’이 아닌 ‘chemical’ 랜드마크일까? 이 역시 궁금하기만 하다.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네. 뭔가 실마리를 찾으려 이번에는 눈을 내려 깔아보니 펌프가 선 바닥에 설명이 붙어있다. 펌프의 연원을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펌프는 소호 콜레라 유행의 진원지로 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2) 이 근처에 살던 저명한 마취의사이자 내과의사인 존 스노는 교구 위원회에 시민들이 펌프의 물을 긷지 못하도록 손잡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3) 1854년 9월 8일에 손잡이를 없앴는데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도 알려진 공중보건의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이역만리에서 찾아오는 것 아닌가!).
4) 복원한 진품 콜레라 펌프는 다른 곳에 보존되어 있고(알고 보니 런던 위생-열대의학원에!), 여기에는 복제품을 세웠다.
5) 복제품이 서기 전에는 그냥 바닥에 분홍색 화강암 연석으로 펌프의 위치만 표시해 두었다.

브로드윅 가의 콜레파 펌프 기념물. 펌프의 원래 위치는 화살표로 표시했다. 박지욱 사진.
브로드윅 가의 콜레파 펌프 기념물. 펌프의 원래 위치는 화살표로 표시했다. 박지욱 사진.

아하, 최근에 새로 펌프 복제품을 세워 둔 것이구나. 그런데 손잡이는 일부러 달지 않았겠지. 손잡이를 없앤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다.

비도 내리고 해서 나와 아내는 펍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라도 한잔하고, 내부 구경도 해보고 싶지만 영업 시간 전이라 문은 잠겨 있었다. 영업 시간에 맞추어 온다면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안에는 뭐가 있을까?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릴없이 2층 벽면에 걸린 존 스노의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를 위로라도 하는듯 그가 그림 속에서 성큼 걸어 나와 내게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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