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런던 가신다구요? 피시 앤 칩은 별로 맛없어요. 런던아이(London Eye) 강추합니다. 웨스트엔드 가서 뮤지컬 하나 보세요.”

내가 런던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놓은 답이다. 하지만 나는 웰컴 컬렉션(Wellcome Collection), 헌터 컬렉션(Hunterian Museum), 런던 위생-열대의학원(LSHTM), 세인트바르톨로뮤병원(St. St Bartholomew's Hospital), 옛 세인트토머스병원(St Thomas' Hospital) 수술장, 앨더샷 군의료 박물관(The Museum of Military Medicine) 등을 찾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내 계획을 듣고는 적잖이 놀라는 눈치다. 귀한 시간과 돈을 써가며 런던까지 갔는데 왜 그런 곳을 찾아가느냐는 뜻일 게다. 의사 동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런던 여행이 처음이었지만 그런 곳을 꼭 찾아볼 작정을 하고 런던 행 비행기에 올랐다.

템스 강, 타워브리지, 런던 타워, 세인트폴 성당 등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런던 히드로공항(LHR) 착륙 직전에 볼 수 있다. 박지욱 사진.
템스 강, 타워브리지, 런던 타워, 세인트폴 성당 등이 내려다보이는 풍경. 런던 히드로공항(LHR) 착륙 직전에 볼 수 있다. 박지욱 사진.

2019년 8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 식사할 때만 해도 템스 강 건너 의사당 건물에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었는데 숙소를 나설 때는 비가 내리고 있다. 짓궂은 런던 날씨가 나를 이렇게 환영하는 건가?

이 도시의 명물인 빨간 버스의 2층에 냉큼 올라타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니 수리 중인 빅 벤, 트라팔가 광장, 내셔널 갤러리가 빠른 속도로 차창을 스쳐 간다. 넋을 놓고 있는데 눈앞으로 분명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동상이 휙 지나간다. 크림전쟁(1853. 10. ~ 1856. 2.) 추모비였다. 이 도시에서는 잠시라도 한 눈을 팔면 안 될 모양이다.

오늘 일정이 예정대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브로드윅 가(Broadwick St)의 콜레라 펌프, 런던 의료계의 압구정동 격인 할리 가(Harley St), 조지프 리스터(Joseph Lister) 동상, 국립도서관, 웰컴컬렉션(Wellcome Collection), 런던유니버시티컬리지병원(UCL Hospital), 런던 위생-열대의학원(LSHTM)을 탐방하거나 적어도 스쳐 지나갈 것이다.

리젠트 가에서 버스를 내려 출근 인파들로 북적이는 골목들을 지나 ‘콜레라 펌프’를 찾아 나섰다. 찾아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지도 앱을 켜고 화살표만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이제 번거로운 지도나 안내 책자 없이 낯선 도시를 탐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정말 놀라운 세상이다.

브로드윅 가는 지금 런던에서 가장 활기찬 지역으로 알려진 소호(Soho)에 속한다. 아직 가게들은 문을 열기 전이지만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싣고 내리는 트럭과 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벌써 활기가 느껴진다. 비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서.

내가 찾아가는 콜레라 펌프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학생 때 듣게 된 것은 예방의학 수업 때였다. 자세한 내용은 별로 기억에 없고 존 스노라는 의사가 콜레라 환자들의 집을 지도 위에 표시해 콜레라균을 내뿜는 펌프를 찾아냈고, 이것이 역학(epidemiology) 연구의 시작이라는 내용이었다.

교과서에는 존 스노가 그린 지도가 실려 있었지만 나는 그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게는 외워야 할 기출문제의 답에 불과했다. 사실 지도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물을 길어 올리고 그 물을 사람들이 나누어 마시는 장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아이들도 포함)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걸려 죽는다는 은유였다. 이 그림은 지금도 콜레라 펌프에 대한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그림을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death%E2%80%99s-dispensary-george-j-pinwell/0gEDeJAb1pBf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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