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2007년 3월, 아직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날, 동작동의 늦은 오후는 한강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으로 살이 에이는 듯하다. 전철역에서 현충원까지 걸어가는 길은 왜 그리도 먼지. 따뜻한 남쪽 섬 제주에서 나고 자란 아들과 딸은 발을 동동 구르며 모진 아빠의 뒤를 따라 걷는다. 아이들의 볼은 금세 새빨개졌고, 그 볼만큼 빨간 해가 좀 있으면 서산에 걸린 참이다.

“애국지사 96”입니다.

민원안내실의 근무자가 내게 알려준 묘역 위치다. 나이가 지긋한 그는 친절하게 그 위치를 알려주며 내게 묻는다.

"이분 묘 찾아오는 사람 거의 없는데…어떤 관계이신지?"
"무슨 사이랄 것은 없습니다. 그냥…유명하신 분이잖아요."

국내에서는 ‘3.1 독립 운동의 제34인’으로, 캐나다에서는 ‘한국의 노먼 베순(Norman Bethoon; 중국혁명 중에 활동한 캐나다 의사로 중국에는 그를 기념하는 의과대학도 있다)’으로 통한다. 현재 그가 도움을 주었던 학생들 중에는 장관도 국무총리도 나왔다. 학생들은 자라서 그를 기념하는 사업도 한다. 2008년에 주한 캐나다 대사관이 ‘스코필드 홀’로 명명되어 한국과 캐나다를 잇는 우정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그의 모교에서도 그를 기념하는 스코필드 기념 강연이 매년 열린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청 시티갤러리에서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이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 당연히 스코필드와 그가 찍은 3.1운동 현장 사진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에 가보았지만 관람객은 나 혼자 뿐이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청 시티갤러리에서 열린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시청 시티갤러리에서 열린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

필자는 2015년에 낸 책을 통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스코필드에 대해 알리는 노력을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미드 <프.브.>가 끝난 지 언제인데 지금도 석호필=프리즌 브레이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석호필은 우리에겐 독립운동을 도와주고 독재정부를 꾸짖은 이방인 교수로 여겨질지는 몰라도 다른 면으로는 세계적인 수의학자이기도 하다. 환자에게 와파린을 처방한 의사라면 이 약을 발명하게 만든 근원을 찾아준 과학자로 그의 이름을 기억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한국인이 사랑했던 이름 석호필을 이제라도 그에게 돌려주자. 철석 같은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했고, 제국주의나 독재 권력 앞에서도 호랑이처럼 욤감했고, 어려운 한국인들을 도와준 사람 석호필이 아닌가?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스코필드의 묘. 사진 박지욱.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스코필드의 묘. 사진 박지욱.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만이라도 석호필=동작동 스코필드로 기억해주면 좋겠다. 그리고 동작동에 갈 기회가 있으면 그의 묘지에도 참배하면 좋겠다. 자신이 태어난 영국, 수의학자로 자란 캐나다도 버리고 우리나라를 새로운 조국으로 삼은 사람이 아닌가? 안내인의 말대로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는 쓸쓸한 묘소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작은 힘과 성의를 보태면 어떨까?

내가 죽거든 韓國 땅에 묻어주시오.
내가 도와주던 少年少女들아 불쌍한 사람을 맡아주세요.
『유언』 중에서

- 스코틀랜드의 묘비명 .

주요 자료 출처

1.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민족 대표 34인/이장락 지음/바람/2007년
2. 역사책에는 없는 20가지 의학이야기/박지욱 지음/시공사/2015년
3. 사진과 함께 보는 한국 근현대 의료문화사/서울대학교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지음/웅진 지식하우스/2009년
4. 3.1운동 100주면 기념 전시 팜플렛. <한국의 독립운동과 캐나다인>/2019년
5. 캐나다 온타리오 수의과대학 홈페이지 (https://bulletin.ovc.uoguelph.ca/post/180282823585/2018-schofield-memorial-lecturer-focuses-on-joint>
6. The evolution of anticoagulant therapy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4781787/)
7. Canada digital collection(http://collection.ic.gc.ca)
8.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2249727/
9. 서울대 홈페이지; 스코필드박사 사이버 추모관
10. 주한 캐나다대사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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