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식민지 조선의 스코필드

일단 4년 계약을 하고 1916년 가을에 스코필드는 아내와 함께 조선에 입국했다. 27세 꽃다운 청년은 의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 강의를 맡았고 한국말도 부지런히 배우고 선교사 자격도 얻었다. 그리고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이름도 얻었다. '石, 돌처럼 단단하고 虎, 호랑이처럼 무섭지만 弼,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좋은 뜻의 이름이라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의 처지에도 깊이 공감했던 그는 수업 시간에 청년 학생들에게 의학 지식을 전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리고 조선이 나라를 빼앗긴 것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탓이라며 넓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빼먹지 않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의학전문학교에서 알게 된 이갑성(민족대표 33인 중 1인)의 부탁으로 국외 정세를 지도부에 알려주고 3.1운동을 해외에 알리는 역할을 맡기로 한다. 3.1운동이 터지자 이를 사진으로 남기고, 수원 제암리와 수촌리 학살 현장을 취재하여 사진과 문서를 기록으로 남겼다.

서울광장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1919년 3.1운동 현장. 스코필드 사진.
서울광장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민중들. 1919년 3.1운동 현장. 스코필드 사진.

경찰의 검문검색이 삼엄해지고 마구잡이식 연행이 도처에서 벌어지자 스코필드는 거리로 나갔다. 자신이 우방국인 영국(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과 일본은 우방국으로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동맹국에 맞서 싸웠다. 캐나다는 1949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의 선교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연행되는 학생들을 구출하고 서대문형무소를 방문하여 독립운동 지사들을 위로한다. 가혹행위를 확인한 그는 총독부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대담한 행동은 일본에는 눈엣가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방국인 영국인 선교사라는 신분인 만큼 스코필드를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학교를 통해 간접적으로 압력을 넣었다. 각종 인허가권을 가진 총독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던 학교측도 계약 기한인 4년이 끝나자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코필드는 1920년 봄에 조선을 떠나야 했다. 귀국 후에는 몰래 가지고 나온 3.1운동 관련 자료들을 국제 사회에 알렸다.

스코필드와 소의 출혈병

귀국한 후 다시 온타리오 수의과대학에서 병리학과 세균학 교수를 맡았다. 1921년 겨울이 되면서 대학으로 다급한 편지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소들이 피 흘리며 죽는 괴질이 돈다는 것이다.

1921년부터 캐나다와 미국에는 소 출혈병이 유행했다. 건강한 소들이 거세를 하거나 뿔을 자른 후 피가 나면 멎지 않고 죽었다. 스코필드는 이 병을 연구해 소가 먹는 건초로 많이 쓰는 전동싸리 풀(sweet clover; Melilotus suaveolens)이 출혈을 일으킨다고 밝혔다.

전동싸리 풀. 박지욱 사진.
전동싸리 풀. 박지욱 사진.

영양분이 아주 풍부한 전동싸리 풀은 이미 1900년대에 유럽에서 수입해 북미에서 많이 써온 목초였다. 그런데 어느 해부터 이 풀을 먹은 소에게 출혈병을 일으키는 독초가 되었다. 스코필드는 이 풀 속에서 쿠마린(coumarin)이라는 성분을 찾았다. 전동싸리 풀이 향긋한 냄새가 나는 이유도 쿠마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멀쩡했던 풀이 왜 독초가 된 걸까? 곰팡이 때문이다. 전동싸리 풀은 습기에 약한데 어느 해부터 궂은 날씨가 길게 이어져 풀이 잘 마르지 않았고 그 때 곰팡이가 스는 바람에 쿠마린이 독성 성분으로 바뀌어 출혈병(Hemorrhagic sweet Clover Disease of Cattle)을 일으켰다.

10여년이 지난 1933년 위스콘신주립 매디슨대학교(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의 식물화학자 칼 폴 링크(Karl Paul Link; 1901~1978)는 눅눅한 전동싸리 풀에서 자란 곰팡이가 쿠마린을 산화시켜 디쿠마롤(dicumarol;Bishydroxycoumarin)로 만드는데 이 것이 간에서 합성되는 지혈성분의 생산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래서 출혈이 되어도 지혈이 되지 않는 것이다. 1940년이 되면 링크는 디쿠마롤을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피를 멎지 않게 하는 이 성분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해로운 물질일 뿐이었다. 아무도 디쿠마롤에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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