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욱 신경과전문의/메디컬티스트

1996년 공중보건의사로 제주도에서 근무하게 된 인연으로 그 이후 제주섬에 정착한 신경과 의사 박지욱(박지욱신경과) 원장. 그리스신화에서 기원한 의학용어를 탐사한 ‘메디컬 오디세이’를 썼다. 박 원장은 고고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의료환경을 구성하는 많은 요소의 역사적 맥락을 알게 되면 병원이라는 딱딱한 일상도 흥미로운 고고학적 유물이 가득한 곳으로 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의학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단절된 끈을 찾는 작업을 위해 글을 쓰고 있다. 신문 청년의사의 '진료실의 고고학자'라는 코너를 통해 독자들을 만났던 박지욱 원장이 드디어 진료실을 나서서 의학문화유산의 현장을 답사한다.

박지욱 신경과전문의/메디컬티스트(medicultist)

2008년 8월 26일 화요일 아침. 곤히 잠든 일행들을 뒤로하고 혼자 마드리드 거리로 나섰다. 아직은 이른 출근 시간이라 한적한 거리에는 한낮의 열기 대신 싸늘한 냉기가 감돈다. 해발 600미터 고지대에 자리한 이 찬란한 도시를 지배했던 여름도 슬슬 떠날 채비를 하는 모양이다. 나처럼 말이다.

나는 까할 연구소(Instituto de Neurobiología Ramón y Cajal)를 찾아 나섰다. 노벨상을 받은(스페인은 지금까지 모두 8명이 노벨상을 받았는데 2명이 생리-의학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학이다) 신경과학자인 까할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연구소에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의사들에게 ‘까할(혹은 카잘)’은 끔찍했던(!) 신경해부학 시간에나 들어보고 잊어버린 이름일 것이다.

산티아고 라몽 이 까할(Santiago Ramón y Cajal; 1852~1934)은 지금으로부터 170년 전인 1852년에 스페인 동북부의 산악지방인 아라곤(Petilla de Aragón, Navarre)에서 의사인 후스토 라몽 이 까할(Justo Ramón y Cajal)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외과의사의 조수 시작해 정식 의사가 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아들도 반듯한 의사가 되길 원했지만 아들은 아버지의 바람을 일찌감치 저버렸다.

‘천재들은 규칙에 굴복하기 어렵고, 대신 규칙을 만들기 좋아한다’는 이제 우리가 다 아는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러질 못했다. 산티아고는 천재가 아닌 괴짜 취급을 받았고 선생님에게 대드는 문제아가 되었다. 학교에도 적응하지 못해 여러 학교를 전전하는 전학생 신세를 면치 못했다. 급기야 자신이 만든 대포로 공공 기물을 파괴한 후 감옥에 갇혀버렸다. 11세의 어린 나이였다.

아버지는 공부에는 뜻이 없어 보이는 아들이 의사가 되는 것은 틀렸다고 생각해 학업을 중단하고 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발사에게 보내 미용 기술을 배우게 했고, 제화공에게 보내 구두를 만들게 했다. 하지만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도제 선생님들과 싸우고 말을 안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위로가 될 만한 건 산티아고가 그림 그리는 것은 무척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화가가 되길 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하자고 타협했다. 아버지는 해부학 교수의 일도 했는데, 아들에게 해부 수업에 참관하고 해부도도 그리게 했다. 그런데 산티아고는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정교한 해부도를 그렸다. 모두들 하나씩 갖고 싶어했을 정도로. 의사들은 다른 해부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산티아고가 그린 인체 해부도만 찾았다.

이 일은 중대한 전기가 되었다. 산티아고는 그림 재능이 의학에도 도움이 되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의사가 되어서 마음껏 인체를, 내가 본 것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때부터는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말썽도 피우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사라고사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1873년에 졸업했다.

21세의 까할은 황혼기에 접어든 스페인 제국의 군의관이 되어 쿠바에서 근무하다가(1874~75년) 말라리아와 결핵에 걸렸다. 귀국해 1877년에 마드리드에서 의학사 학위(M.D,)를 받았다. 1879년에는 자청하여 사라고사 박물관장 일도 했고 모교인 사라고사 대학과 남동부의 발렌시아대학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1887년에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의 조직학-병리학 교수로, 1892년에는 마드리드 대학교의 조직학-병리학의 주임교수로 임명되었다(40세). 1900~01년에는 국립 위생 연구소(Instituto Nacional de Higiene)와 생물학 연구소(Investigaciones Biológicas)의 소장이 되었다.
까할은 임상의사는 아니었고, 그가 원하던 대로 해부학, 조직학, 병리학을 연구하고 현미경으로 본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가 현미경으로 관찰한 것은 신경세포였다.

까할이 의대를 졸업한 해에(1873년) 이탈리아의 병리학자인 까밀로 골지(Camilo Golgi; 1843-1926)는 사진을 현상할 때 쓰는 질산은(silver nitrate) 용액을 이용해 신경세포를 염색했다. 그전까지 신경세포는 현미경으로 제대로 볼 수 없었는데 ‘골지 염색(Golgi stain)’ 덕분에 인류는 처음으로 신경세포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좌) 골지의 해마(hippocampus). 축삭돌기들의 끝이 희미해지면서 그물처럼 얽혀져 보인다. (우) 까할의 해마. 축삭돌기들의 끝이 분명히 구분되어 보인다. 물리적으로 단절된 것을 보여준다. 위키백과 자료. 
(좌) 골지의 해마(hippocampus). 축삭돌기들의 끝이 희미해지면서 그물처럼 얽혀져 보인다. (우) 까할의 해마. 축삭돌기들의 끝이 분명히 구분되어 보인다. 물리적으로 단절된 것을 보여준다. 위키백과 자료.

골지는 신경계를 신경세포에서 뻗어 나온 잔가지들이 촘촘하게 얽힌 연결망(network)으로 보았다.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와 볼타(Alessandro Volta: 1745~1827)연 연구로 신경이 전기신호를 전달하는 것은 알았지만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몰랐다. 골지는 신경의 잔가지들이 전선처럼 이어져 신경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다시 말하면 ‘신경계=전선망’이라는 주장인데 이처럼 신경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이어져서 하나의 단위를 구성한다고 생각했고 이를 골지의 ‘신경망 이론(reticular theory)’이라 부른다.

물론 까할도 골지의 염색법을 이용해 신경세포를 관찰했다. 하지만 까할은 좀 더 단순한 신경세포를 구해 관찰했다. 신경계가 아직 성숙하지 않은 어린 동물의 뇌세포를 관찰했다. 이런 세포들은 축삭돌기(axon)이 잘 보였다. 이렇게 나름대로 연구를 발전시켜나간 까할은 골지와 다른 생각을 한다. 신경세포들이 전선그물로 이어진 신경망을 신경계의 기본단위로 주장한 골지와 달리 까할은 신경세포 자체가 기본 구성 단위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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