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는 공공병원 비중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5.4%)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민간 병원들은 환자유치를 위해 고가 시설과 장비를 경쟁적으로 보유하고 점차 대형화했다. 경쟁에서 밀린 동네의원들은 점차 영세화해,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일차의료연구회 이재호 회장(가톨릭의대 가정의학과)

이에 정부는 제27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종별 기능에 맞는 합리적인 의료전달체계 구축과 상급종합병원·협력의료기관의 동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고 표명했다.

3차 병원에서 경증환자의 비율을 줄이고 중증환자 비율을 높이겠다는 의도다. 얼핏 보면 바람직해 보이지만 일차의료 부재라는 본질을 그대로 두고 대형병원 환자 쏠림 현상만을 바꾸려는 것 같아 갑갑하다.

국내에서 대형병원 환자 쏠림이 나타나는 것은 동네의원이 일차의료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지역사회 일차의료 체계가 없어서 동네의원이 최초접촉 기능을 담당하지 못하고, 행위별수가제에 의한 서비스 분절화로 포괄적인 서비스 제공이 어려우며, 동네 의원 의사가 주치의가 아니어서 서비스의 통합과 자원의 조정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며, 환자-의사 사이의 지속적인 신뢰관계 형성이 어렵다.

이 때문에 동네 의원 진료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을 느끼는 환자들이 경증 질환을 가지고 대형병원을 방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차의료 강화 정책이 필요하다. 일차의료 강화는 지역사회에서 주민의 건강을 지키는 일에 초점을 두며,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정책이다. 혹시 질병이 생기더라도 경증 단계에서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중증으로 진행을 막아 불필요한 병원 방문을 줄이는 정책이다.

일차의료 강화를 위해서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동네의원이 일차의료 제공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건강을 위해 가장 먼저 대하는 주치의를 두고 포괄적인 건강관리를 할 수 있도록 해 양질의 일차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주치의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건강을 관리할 때 효과적인 건강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주치의는 반드시 일차의료 전문의가 아니어도 된다. 환자에게 전인적인 건강 돌봄 서비스 제공에 관심을 두는 의사라면 모두 가능하다. 그 다음 단계로 환자가 주치의로 지정한 의사들을 파악해 이들에게 주치의 역할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환자-의사 사이의 신뢰관계가 지속하도록 지원하는 일이 일차의료 강화정책의 핵심이다. 주치의를 보유한 국민의 비율이 높아지면 주치의제도를 쉽게 이룰 수 있다.

아울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인구 5만명당 1개소 이상의 표준 일차의료기관을 지정하거나 설치하고 확대하는 일을 해야 한다. 표준 일차의료기관은 간호사, 영양사, 물리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건강-복지 전문가들이 팀 활동을 하면서 복지와 의료를 통합 제공하는 곳이다.

정부는 기존의 동네 의원이 표준 일차의료기관이 될 수 있도록 구조적 지원도 해야 한다. 필요한 곳에는 정부가 직접 설치해야 한다. 의료 관련 대학은 학생과 전공의의 지역사회 일차의료 임상실습과 교육수련을 위한 기관으로 표준 일차의료 기관을 두도록 해야 한다.

대형병원이 경증환자 진료를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경증환자가 대형병원 방문하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정책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정책이다.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산업재해를 입었을 때 그 책임을 노동자나 기업에게만 묻고 그러한 노동환경을 초래한 관련법과 제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정부는 병원과 질병 중심 정책이 아니라 일차의료와 건강 중심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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