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여행-동유럽

본지는 '의사 양기화와 함께 가는 인문학 여행'이라는 코너를 통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양기화 상근평가위원의 해외여행기를 싣는다. 양기화 위원은 그동안 ‘눈초의 블로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아내와 함께 한 해외여행기를 실어왔다. 그곳의 느낌이 어떻더라는 신변잡기보다는 그곳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꺼리를 찾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터키, 발칸,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에 이어 다시 동유럽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기를 통해 인문학 여행을 떠나보자.<편집자주>

쇤부른궁전이 합스부르크왕가의 여름별궁이라고 했으니, 오스트리아의 역사가 합스부르크왕가로 넘어가는데서 역사이야기를 이어간다. 합스부르크가문은 지금의 스위스에 속하는 슈바벤 지방에 세운 합스부르크성 혹은 하비히츠부르크성(매의 성)에서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 가문이 점점 세력을 확장하여 신성로마제국의 큰 세력으로 부상함에 따라 황제의 선출까지 개입하게 되었고, 1273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오르게 된다. 막시밀리안1세(재위 1493년 ~ 1519년) 시절부터 유럽의 여러 왕가와 혼인을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면서 18세기까지 오스트리아, 독일, 신성로마제국, 에스파냐, 포르투갈을 지배하는 유럽 최대의 왕실가문이 되었다.(1) 혼인을 통하여 유럽 여러 나라의 왕실을 장악하고 영토를 확장할 수는 있었지만, 결국은 계승권분쟁이 생기고 영토를 분할해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오스트리아의 역사는 합스브르크왕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17세기와 18세기가 지나는 동안 합스부르크제국은 유럽의 강대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이 프랑스제국의 황제 위에 오르자. 영토를 보존하기 위한 전략으로 1804년에는 오스트리아제국을 선포하였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급부상한 프러시아가 독일을 지배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에서 제외되었다. 1867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으로 개편되었다.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드 대공이 암살되는 사건을 계기로 세르비아와 시작한 전쟁이 제1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폐지되었고, 베르사이유조약에 따라 1919년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는데, 독일이 패망한 뒤에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성립되었고, 1955년 오스트리아 의회는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영구중립국가로 선언하였다.

벨베데레 궁전 위채로 들어가는 출입문(좌) 출입문에 들어서면 아담한 정원 끝에 벨베데리 궁전 위채가 있다(우)

쇤브룬궁전에서 나온 일행은 벨베데레궁전으로 이동했다. 바로크양식으로 지은 두 채의 벨데베레궁전은 사보이왕자 오이겐(Eugen von Savoyen)의 여름궁전이다. 오이겐은 오스만제국과의 일련의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1697년 헝가리로 가는 주통로인 렌베그(Rennweg)의 남쪽에 있는 땅을 사고 건축을 시작했다. 왕자는 피에몬테전투에서 만난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kas von Hildebrandt)를 수석건축가로 정했다. 1715년 아래채 공사가 먼저 시작되어 1716년 완공되었다. 볼로냐 출신 화가 마르칸토니오 카아리니(Marcantonio Chiarini)가 아래채 중앙 홀의 천정화를 그렸다.

벨베데레 궁전 위채에서 바라본 정원. 끝에 있는 건물이 궁전 아래채

아래채와 위채 사이의 정원은 앙드레 르 노트레(André Le Nôtre)의 제자로 베르사이유 정원 건설에 참여한 도미니크 기라드(Dominique Girard)가 맡아 건설하였다. 위채에 있는 커다란 연못, 계단과 이어지는 작은 폭포 주변에는 요정들과 여신들의 조각을 배치했다. 위채는 1717년 건설을 시작하여 1719년까지 이어졌다. 건물 초입에 있는 대리석홀(Marble Hall)의 천정 프레스코화는 카를로 칼론 (Carlo Carlone)의 작품이다.

1736년 오이겐 왕자가 사망한 뒤, 궁전은 조카딸 빅토리아에게 상속되었다가. 1752년 찰스6세의 딸 마리아 테레지에가 인수하여 벨베데레궁전이라고 하였다. 1775년 이후부터는 황실의 회화전시장으로 쓰였다. 계몽군주로 알려지기를 원했던 그녀는 제국의 미술품을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하였고 1781년부터 세계 최초의 공공박물관이 되었다.(2)

벨베데레 궁전 위채와 그 앞에 있는 연못(좌) 대리석홀의 천정화(우)

한 쌍의 사자가 포효하는 조각이 장식된 현란한 주출입구는 닫혀있었다. 쪽문을 통하여 입구를 통과하면 커다란 연못이 있는 위채의 정원에 들어선다. 아담한 건물에 걸맞게 정원 역시 간결하면서도 아름답다. 위채를 돌아가면 커다란 정원이 펼쳐지고, 그 끝에 아래채 궁전이 보인다. 정원을 굽어보는 난간에 여성의 머리가 달린 스핑크스가 앉아있는데, 가슴의 색깔이 다른 것은 이곳을 찾은 남자들의 유별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먼저 대리석홀에 들어 칼론이 그렸다는 천정화를 감상한다. 이어서 천정화를 감상하느라 뻣뻣해진 목을 달래가며 크림트의 <키스>가 걸려있는 회화작품의 전시실로 이동한다. 벨베데레궁전의 전시실은 크림트와 그의 제자 에곤 실레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있어 연간 150만명의 관람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그밖에도 인상파와 사실주의 화가의 작품들이 걸려있다. 개인적으로는 크림트의 <키스>와 <유디트> 그리고 프란츠 아이블(Franz Eybl)의 <독서하는 소녀>는 알아볼만했다. 벨베데레궁전은 30유로를 내야했던 선택관광상품이다.

벨베데레궁전에서 나온 일행은 성슈테판성당이 있는 구시가지까지 걸어가 자유 시간을 가졌다. 가는 길에 슈와로브스키 매장에서 40분이나 지체했다. 역시 해외여행에서 명품에 관심 갖는 것이 일반적인가 보다. 덕분에 비엔나커피를 마시는 호사를 즐기지 못했다. 자유 시간에 먼저 성 슈테판대성당을 구경하였다. 비엔나의 구도심에 있는 성 슈테판 대성당(Stephansdom)은 로마 가톨릭의 비엔나 대주교좌 성당이다. 1139년 파사우의 레긴마르(Reginmar)주교와 레오폴드4세 교황(Margrave Leopold IV)는 비엔나를 가톨릭공동체로 처음 인정하고, 성 베드로 교회를 파사우교구로 옮기기로 한 마우테른(Mautern)에 서명하였다. 협약에 따라 짓기 시작하여 1147년 부분적으로 완공된 성당은 제2십자군을 준비하던 독일은 콘라드3세(Conrad III)와 귀족들에 의하여 성슈테판에게 헌정되었고, 1160년에 완공되었다. 그 이후로 1511년까지 재건축과 확장이 이어졌다.

성 슈테펜 대성당(좌) 성 슈테펜 대상당의 지붕. 합스브르크제국의 문양을 새겼다.(우상) 내부에 들어갔을 때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우하)

1230-1245년 사이에는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서쪽 부분이 지어졌는데, 1258년 대화재로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 1304년 알버트왕은 동쪽으로 합창단석을 설치할 것을 명하여 1340년에 봉헌되었다. 1430년에는 옛 교회의 건축물을 제거하였으며, 1433년에는 남쪽 탑을 완성하고, 1446년부터 1474년까지 본당의 둥근 천정을 설치하였다. 1450년 북쪽 탑을 짓기 시작하였다. 1511년에 최종 마무리된 대성당은 길이가 107미터, 너비가 40미터, 높이가 136미터이다. 건축에 사용된 석회암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회에 쌓ㅇ린 그을음과 대기오염으로 인하여 검은색으로 변했는데, 최근에 복원작업을 통하여 일부를 흰색으로 되돌려놓았다.

슈테플(Steffl)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남쪽 탑은 높이가 136미터에 이른다. 1368년에 짓기 시작하여 68년이나 걸린 1433년 완공되었다. 1529년과 1683년 비엔나 전투 때는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관측소와 지휘소로 이용되었다. 1955년까지도 도시를 감시하는 사람이 지키며 화재가 발생하면 종을 울려 알렸다. 탑의 꼭대기에는 쌍두 독수리의 제국 표장과 헝가리제국의 사도폐하를 상징하는 이중십자가가 걸려있다. 이 표장은 초승달과 여섯 개의 별이 박혀있는 표장으로 교체되었다. 북쪽 탑은 남쪽 탑과 닮은꼴로 지을 계획이었지만, 고딕시대가 저물던 1511년에 건설이 중단되었다가 1578년 재개되면서 첨두를 르네상스 양식의 바꾸었기 때문에 수상탑(water tower top)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남쪽 탑의 절반에 해당하는 68미터로 건설되었다.

교회의 입구를 거인의 문(Giant’s door) 혹은 리젠토르(Riesentor)라고 부fms다. 1443년 북쪽 탑을 건설하기 위하여 기초를 팔 때 마스토돈의 넓적다리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교회 입구에는 65미터 높이의 두 개의 탑이 서있는데, 이를 로마탑 혹은 하이덴튀름(Heidentürme)이라고 한다. 로마건축물 잔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 슈테펜 대성당 내부의 비엔나 노이슈타트 제단(좌) 마리아 포취 아이콘.(우) (Wikipedia에서 인용함)

111미터 길이의 지붕은 23만개의 유리타일로 덮여있다. 화려한 무늬와 풍부한 색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특히 남쪽의 성가대 위쪽에는 제국의 상징인 두 마리 독수리의 모자이크가 새겨져 있다. 북쪽에는 비엔나 시와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북쪽 지붕의 모자이크에 숨겨진 비밀을 지적한 작가가 있다. 커피박탈이론에 기반한 음모를 그린 <커피향기>에서 오스트리아작가 게르하르트 레켈은 성슈테판성당의 북쪽 지붕을 장식한 모자이크가 사라센 양탄자의 문양임을 지적한다. 19세기 말 오스트리아제국과 오스만제국은 발칸반도의 지배를 두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오히려 비엔나에는 오스만제국의 풍습이 많이 들어왔던 모양이다.(3)

종탑에는 모두 23개의 종이 걸려있다. 베토벤이 종소리에 놀란 새들이 날아오르는데 종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청각장애를 발견했다고 한다. 가장 큰 종은 성모의 종(St. Mary)인데, 부머(Pummerin)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1711년 침입한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대포를 녹여 만든 20,130Kg의 부머는 쾰른 대성당에 걸려있는 23,500Kg의 페터(Peter)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스윙벨이다. 1945년 화재로 나무틀이 불에 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바람에 다시 주조하였다.

성 슈테판 성당에는 여러 개의 예배당이 있는데, 예배당에 있는 제단들 가운데 높은 제단(high alter)와 비엔나 노이쉬타드 제단(Wiener Neustadt Altar)이 유명하다. 노이쉬타드제단은 1447년 프레데릭3세 황제의 주문으로 설치되었다. 2개의 삼부작으로 된 제단을 평소 72명의 성도가 그려진 장면만 보여주다가 일요일에는 네 개의 패널을 열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 일어난 일들을 묘사한 금박 입힌 나무그림들을 볼 수 있다. 마리아 푀취 아이콘(Maria Pötsch Icon)은 성모와 어린 예수를 그린 비잔틴 양식의 아이콘이다. 헝가리에 있는 비잔틴 가톨릭사원 마리아포츠(Máriapócs)에서 가져온 것이다.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세 줄기 장미를 들고, 목에는 미래를 투시하는 십자가를 걸고 있는 예수를 안고 있다.(4) 성당 안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마침 미사가 열리고 있어서 내부를 둘러볼 수는 없었다.

성 베드로교회

성당을 나와 구도심을 구경하다 성베드로(St. Peter's Church)교회에 이르렀다. 성베드로교회는 800년 샤를 마뉴대제가 처음 세웠다는 주장도 있고 보면,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일 수 있다. 교회 바깥에는 샤를 마뉴가 교회에 봉헌했다는 바이어(Weyr)의 부조가 있다. 1137년 교회에 대한 언급이 처음 등장하는데, 중세 무렵의 교회에는 3개의 제단이 있었고, 애프스는 통상적인 동쪽 방향이 아니라 남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옛교회는 1661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1679-80년 사이에 비엔나가 흑사병으로 황폐되었을 때, 합스브르크 왕가의 레오폴드1세가 성 삼위일체탑과 함께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맹세하였다. 1771년 가브리엘 몬타니(Gabriele Montani)가 로마의 베드로성당에서 영감을 얻어 건축을 시작하였고, 1703년에는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드((Johann Lukas von Hildebrandt)가 완공하였다. 새로운 교회는 비엔나에서는 처음 도입된 바로크양식의 돔형 건축물이었다.(5)

참고자료:

(1) 위키백과. 오스트리아의 역사.

(2) Wikipedia. Belvedere, Vienna.

(3) 게르하르트 J 레켈 지음, 커피향기 209-211쪽,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4) Wikipedia. St. Stephen's Cathedral, Vienna.

(5) Wikipedia. St. Peter's Church,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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