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욱의 블루하우스

2016년 1월 8일 국회를 통과한 환자연명의료결정법이 8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환자연명의료결정법 제정의 필요성을 널리 공론화시킨 것은 2009년 김 할머니 판결이다. 미국에도 유사한 판결이 많이 있었다. 초기 판결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76년 뉴저지주 대법원의 카렌 퀸란 판결이다.

1975년 4월 21세의 카렌 퀸란은 술과 약물을 함께 복용한 뒤 의식을 잃고 인공호흡기로 호흡을 유지하는 상태가 됐다. 카렌 퀸란의 부모는 법원에 인공호흡기를 제거해 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1976년 1월 뉴저지주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아래는 판결의 결론인 주문을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담당 의사가 카렌이 혼수상태에서 회복하여 의식을 되찾을 합리적 가능성이 없으며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카렌의 후견인과 가족이 이에 동의하는 경우 그들은 병원의 ‘윤리위원회’ 혹은 유사한 기구에 자문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으며 그 행위로 인하여 후견인, 의사, 병원 등 관련자들 어느 누구도 민사상, 형사상책임을 지지 않는다.”

필자는 김 할머니 사건의 항소심과 상고심에서 세브란스병원을 대리하면서 카렌 퀸란 판결을 주의 깊게 검토할 기회를 가졌다. 그 과정에서 미국 사법부와 우리나라 사법부의 태도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카렌 퀸란 판결과 김 할머니 판결을 비교해 본다.

첫째, 카렌 퀸란 판결은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생명유지장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 것이지 김 할머니 판결처럼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명령한 것이 아니다.

카렌 퀸란 판결은 원고청구 인용이 아니라 기각에 가깝다. 일정한 절차적 조건이 충족되면 의사에게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다는 재량을 부여한 것이다. 강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뉴저지주 대법원 판결은 1976년 1월 선고됐지만 1976년 5월까지 주치의는 인공호흡기 제거를 거부했다.

둘째, 카렌 퀴란 판결은 환자의 상태에 대한 엄밀한 정의 없이 일정한 절차적 기준만 충족하면 연명의료 중단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 할머니 판결에서 우리나라 대법원은 환자 상태를 엄밀하게 정의한다. 의학적으로 환자가 의식의 회복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기능의 상실을 회복할 수 없으며 환자의 신체상태에 비추어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를 ‘회복불가능한 사망의 단계’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 의미를 구구절절 설명한다. 이처럼 대법원은 연명의료라는 전문적 영역에 대해서 과감히 개입하여 마치 전문 의사처럼 정의를 내리고 “이게 정답이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렌 퀴란 판결의 주문에 환자의 상태에 대한 정의는 전혀 없다. 뉴저지주 대법관들의 입장을 쉽게 표현하면 이런 것이다. “우린 의사가 아니잖아? 환자 상태가 인공호흡기를 제거해야 할 상황인지는 의사들이 제일 잘 알잖아? 우리가 그걸 일일이 정의하는 건 이상하지. 하지만 주치의나 가족이 단독으로 결정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주치의, 후견인, 환자 가족, 그리고 윤리위원회(제3의 의사들)의 함께 논의해서 결정해. 그렇게 신중하게 결정한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다면 의사를 처벌할 순 없지.”

셋째, 카렌 퀸란 판결은 의사들에게 행위의 준칙을 명확히 알려주는 반면 김 할머니 판결은 의사들에게 행위의 준칙을 정확히 알려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카렌 퀸란 판결이 일정한 절차적 기준만으로 인공호흡기 제거의 요건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주치의가 판단하고 후견인, 가족이 동의하면 윤리위원회의 의견을 묻고 거기에서도 동의하면 모든 기준이 충족된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의사들은 임상현장에서 직면하는 환자가 김 할머니 판결이 제시한 정의를 충족하는지 도무지 자신할 수 없다.

종합하면 카렌 퀸란 판결에서 미국 뉴저지주 대법관은 연명의료라는 전문적 영역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명령하지 않는다. 관련 당사자들의 자율적 대화야말로 문제해결을 위한 올바른 접근방법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부작용 방지를 위한 큰 틀을 제시하는데 머무른다. 미국 판사들이 우리나라 판사들보다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곧 시행될 환자연명의료결정법의 운영에서도 참고할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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