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혁 리서치팩토리
환자를 본 경험이 있는 의사라면 누구나 가슴에 품고 있는 환자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제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게 내내 아쉬운 환자라든지, 희박한 확률을 뚫고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큰 보람을 느끼게 해준 환자라든지. 그러나 내가 이 글을 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생각난 환자는 둘 모두에 해당하지 않았다.
때는 7월, 소화기내과 중 ‘간’ 파트를 돌던 때였다. 한 환자가 온몸이 노랗다며 응급실을 찾아 입원했다. 원인은 술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환자 대부분이 알코올성 간경화 혹은 간암으로 입원했기에, 나는 ‘또 한 명의 술꾼이 입원했구나’라고 으레 생각하며 환자를 보러 갔다. 그러나 환자의 얼굴을 본 순간, 일반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과 피부색만 보고도 빌리루빈 수치가 입원 환자 중 최고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 빌리루빈 수치가 정상치인 1의 30배를 넘어갔고, 팔다리는 앙상했으나 배는 불룩했다. 전형적인 간경화 소견이었다.
문진을 해보니 생각지 못한 기구한 사연이 있었다. 환자는 수개월 전에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중학생인 두 딸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술 없이는 하루하루 버틸 수 없었고, 그렇게 지금까지 매일 밤을 술로 지새웠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마음이 일었지만, 나는 사연에 대한 생각을 뒤로 미뤄둔 채 당장 처방을 내야 하는 목록부터 떠올렸다. 그러고는 빚 독촉을 하는 사람처럼 초음파, CT 등 각종 검사를 빨리 해달라고 검사실에 푸시한 뒤 복수부터 급하게 뽑았다.
다행히 복수는 깨끗했고, 초음파와 CT에서도 덩어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간 표면이 오돌토돌했고 실질은 매우 거칠었다. 나는 돈을 반만 돌려받은 빚쟁이처럼 안도와 걱정이 섞인 숨을 깊게 내쉬었다. 동시에 그녀의 사연도 내 한숨에 섞여 점차 뇌리에 박히는 듯했다.
그녀는 이후 오랜 입원 생활을 했다. 환자의 복수가 지속적으로 차올랐고, 나는 3~4일에 한 번씩 복수를 뽑기 위해 환자를 찾았다. 어느새 그녀는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환자가 되어 있었고, 자연스레 마음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그만큼 환자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간절해져만 갔다.
환자는 금주를 유지했고, 스테로이드 등 최선의 약물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빌리루빈 수치가 처음보다 떨어지긴 했지만, 야속하게도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며 20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시험 결과라도 보듯 피검사 결과가 언제 나오는지를 계속 확인했고, 1보다 작은 숫자의 등락에 안심했다가 좌절하기를 반복했다. 설상가상으로 환자에게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장기간 항생제를 쓰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의 퇴원은 계속 미뤄졌다.
한 달쯤 지났을 때, 교수님이 조심스레 간이식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그녀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는 듯했다. 회진 후 다시 찾아가 물어보니, 두 딸 외에는 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만 16세 이상만이 부모 동의하에 이식이 가능하다. 즉, 중학생인 두 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로부터 2주가량 지나, 나는 다음 과로 수련이 넘어가기 일주일 전쯤에 그녀가 퇴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그녀가 운영하던 가게를 인수인계하기 위해 잠시 나갔다 와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빌리루빈 수치는 여전히 20 전후였고 간간이 열이 나고 있었지만, 일상생활도 가능하고 언제까지나 입원해 있을 수는 없었기에 일주일 뒤 외래를 잡고 퇴원했다. 그녀는 연신 고마웠다고 인사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다음 과로 수련과를 옮기기 전날인 일요일 밤, 당직을 서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환자 목록에서 그녀의 이름을 발견했다. 교수님 이름도 같고, 영락없는 그녀였다. 한숨을 푹 쉬며 그녀의 이름을 클릭했다. 그녀는 의식변화를 주소로 응급실에 방문해 입원한 상태였다. 이전 당직의는 간성혼수로 생각하고 수 시간 지켜봤지만 아직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바로 환자를 찾았다. 환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고, 통증에만 반응했다. ‘Stupor’였다. 급성 간부전(Acute liver failure)에 의한 의식변화로 생각하고, 교수님과 상의 후 뇌 MRI를 찍고 바로 중환자실로 내려보내기로 했다.
설명하기 위해 병실로 들어갔더니 큰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설명하는 것이 더욱 괴로울 것 같아 입을 떼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환자의 모친에게 전화로 설명하자 모친은 잘 부탁드린다며 연신 울었다. 나는 으레 그렇듯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전실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는데, 이송 요원이 도무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간호사와 둘이 침대를 끌고 MRI실로 급하게 내려갔다. 영상을 찍은 뒤 밖으로 나와 초조하게 기다리며 마주한 영상은 기대한 것보다도 처참했다. 뇌 뒤쪽에 하얀 점들이 가득했다.
“망할.”
MRI실 직원과 나는 거의 동시에 읊조렸다. 급성 간부전이 아니라 소뇌와 후두엽, 뇌간에 발생한 다발성 경색이었다. 곧바로 신경과 당직 선생님께 연락드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중환자실로 환자를 옮기고 중환자실 당직인 고연차 선생님께 인계드린 후 중환자실을 나섰다.
문 앞에 큰딸이 있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뇌 MRI의 결과를 설명한 후, 잠시 후에 다른 선생님들이 더 알려주실 것이라 말하며 당직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새벽 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급박한 상황을 넘기고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곤이 몰려왔다. 그때 큰딸이 나를 붙잡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데 엄마한테 제 간을 주면 안 되는 거예요?”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 같았다. 어린아이가 이 말의 의미는 알고 하는 것일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충 얼버무리고 뛰쳐나온 것 같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잠은 잘 수가 없었다.
환자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매일 환자 상태를 지켜봤지만, 의식은 회복되지 않았고 활력징후도 망가져갔다. 결국 가족들이 연명의료중단에 동의하고, 환자는 40대 중반의 나이로 임종을 맞이했다. 환자의 경과로 봤을 때 회복되지 못할 것이 자명했기에 충격적인 결과는 아니었지만 큰딸의 모습만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날 무렵, 내과 콘퍼런스가 열렸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에 콘퍼런스를 통해 몇몇 논문을 공부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갖는데, 한 달에 한 번씩 지난 한 달간 환자에게 ‘칭찬의 글’을 받는 전공의들을 소개하고 읽는 시간을 가진다.
그날 칭찬 목록에는 내 이름도 있었다.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내게 써 준 칭찬의 글이었다. 그녀가 퇴원하던 날, 고객의 소리함에 편지를 쓰고 떠났던 것이다. 항상 미소로 대해주고 잘 설명해 줘서 고맙다며, 덕분에 편하게 있다가 간다고, 또 보자는 내용의 편지였다.
순간 나는 폭풍 속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폭풍의 이름은 ‘죄책감’이었으리라.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는 결국 환자를 잃었고 두 딸들은 엄마를 잃었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칭찬과 박수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날 밤,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것이 그녀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한 사람을 증오하던 그녀가, 이 편지에 미소와 감사를 써 내려갔다. 마지막 글이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 수취인이 ‘나’라는 것이 너무 과분했지만, 내 덕분에 입원 생활이 지루하거나 우울하지만은 않았다고 해주니 고마웠다. 그날 새벽, 부디 그녀가 고된 지난날은 내려놓고 따뜻한 기억만 품고 갔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것이 내가 의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최선이었다.
병원은 분명 낫기 위해 찾는 곳이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 병원은 죽음의 향기가 짙게 나는 곳이었다. 전공의로 근무하는 한, 환자의 마지막을 지키는 일이 허다할 것이다. 때론 거스를 수 없는 죽음 앞에서 깊은 무력감과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의 마지막에 환자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결정하는 것 또한 의사의 몫이다.
그렇기에 생명과 죽음이 무한히 교차하는 이 곳 병원에서, 나는 또 한 번 진심을 다해야 한다. 또 한 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가 마주하는 환자의 삶, 그 마지막 페이지에는 늘 환자를 향한 나의 진심과 최선이 적히기를 바란다.
내과 사직전공의 김혁입니다. 우선, 저의 부족한 글에 귀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상을 받게 되어 무척 기쁘고, 앞으로의 삶에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소중한 순간이 될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 글을 쓸 용기를 북돋아주시고 늘 응원해 주신 사랑하는 어머니께 가장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글을 꼼꼼히 검토해 주고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은 동생 윤이와 여자친구 예림이에게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한미수필문학상을 알려주시고 항상 저를 이끌어 주시는 유정주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교수님의 가르침과 응원 덕분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일상의 순간과 사람들 속에서 잊고 있던 감사함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경험을 바탕으로 글을 통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성장해 나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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