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혁 서피부과연세비뇨기과의원 원장

그 교수님의 회진은 온 병동이 조용한 새벽에 시작된다. 시계가 6시를 가리킬 무렵, 불이 꺼진 저편으로부터 잿빛 머리의 교수님이 성큼성큼 걸어와 스테이션을 지나친다. 그러면 대기하고 있던 4년 차 치프와 이하 전공의들이 재빠르게 그 뒤를 따른다.
1년 차였던 나는 뛰는 걸음으로 일행을 앞서서 안내한다. 침대 앞 커튼을 걷고, 막 잠에서 깬 놀란 얼굴의 보호자가 있는 간이침대를 살짝 옮겨서 교수님이 환자 옆으로 갈 자리를 만든다. 치프가 보고하는 동안 교수님은 환부를 확인한다. 교수님이 고개를 끄덕이면, 모두 안도하며 다음 환자를 향해 움직인다.

겉보기에는 환자를 간단히 둘러보는 정도이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교수님은 새벽 5시에 출근해서 전날 기록을 통해 환자 상태를 이미 철저히 파악했다는 것을, 회진은 그저 사실 확인에 불과한 것임을.

외과 전공의들은 매년 세 개의 분과를 도는데, 이 교수님이 담당하는 대장·항문과를 돌 때는 다른 때보다 더욱 긴장해야 했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게 외과 전공의의 일상이지만, 이때는 칼날 위에서 춤을 추는 시기라고나 할까.

환자가 수술받은 당일 열이 나서 전공의가 무심코 해열제를 처방했다면, 다음 날 회진은 지옥 한 바퀴를 도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정답은 밤새 환자의 등을 두드리며 호흡을 격려해서 기계 마취로 움츠러든 폐를 펴주는 것이다. 수술 직후 발열은 대부분 무기폐로 인한 것인데, 원인을 해결하지 않고 약으로 증상을 억누르는 것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라는 것이다.

‘해열제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악마의 약물이다!’
‘항생제는 수술 전 처방하고 바로 끊어야 하는 심지가 달린 폭탄이다!’
‘무식한 1년 차는 언제 뒤통수를 때릴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므로 항상 감시하고 꺼진 막내도 다시 보자!’

이러한 철칙들은 선배의 선배들이 피눈물 나는 실수를 통해 쌓은 교훈으로, 선배들은 이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거듭 강조했다.

만약 전공의 실수로 문제가 생기면 교수님이 출근하는 새벽 5시 전에 치프가 교수님 방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다리며 사죄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왕년에는 화가 나면 날아 차기도 하셨다는데, 지금은 정년을 앞두고 기력이 달리시는지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교수님의 분노가 약해진 것은 아니다.

“선생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라는 말로 시작해서 끝나면 다행이다.
“당신은……”이라고 시작하면, ‘너는 의사 자격이 없으니 선생이 아니라 당신이다’라는 뜻으로, 더욱 가혹하게 다그치기도 했다.

그중 최악은 “나가세요!”라는 말이었다. 완전히 관계를 끊겠다는 선언이다. 이런 말을 들은 전공의는 교수님에게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강판당한다’라고 불렀다.

치프를 비롯한 모든 선배가 강판당했던 어느 처참했던 날, 회진 막바지에 무언가 말씀하시려던 교수님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나만 남아 있었다. 1년 차 하나만 남은 상황에 기가 찼는지, 교수님은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내 가슴을 쿡 찌르며 말씀하셨다.

“너는 이상한 거 배우지 말고 원칙대로만 해라.” 그러고는 휘적휘적 가버리셨다.
1년 차만 데리고 일할 수 없었기에 이 집단 강판 사건은 흐지부지 끝났다. 어쩌면 치프 혼자만 책임지게 할 수 없다고, 선배들이 머리를 써서 일부러 줄줄이 자폭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일 년이 지났고, 나는 2년 차 전공의가 되었다. 의사 가운은 좀 더 더러워졌고, 한 손으로 담배를 떨어서 끌 수 있게 되었다. 올해는 신입이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여전히 막내였지만.

어느 날, 교수님의 호출을 받았다. 영상의학과에서 CT 사본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복부영상의학과 교수님이 나를 보고는, 이를 어쩌냐며 안타까워하셨다. 환자의 영상 하나를 복사해가는 것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찾아왔는데, 뜻밖의 무거운 반응에 나는 의아해져 영상의 이름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교수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화면에는 희끄무레한 덩어리가 간과 대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말기암, 4기였다.

CD에 차트 번호와 교수님의 이름을 적어 건네드렸다. 교수님은 그걸 덤덤하게 받아 들고는 “수고했다. 가서 일 봐라.”라고만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13층 개인실에 입원하셨다. 교수님의 부재로 외과는 어수선했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정신을 반쯤 놓고 다니던, 2년째 막내인 나는 그 부재를 별다르게 느끼지 못했다. 어느 저녁, 13층 간호사가 나를 불렀다. 교수님이 찾으신단다.

“서 선생, 팔이 부어서 불편한데 붕대 좀 감아줘.”

교수님이 오른팔을 들어 보였다. 손등부터 어깨까지 부어오른 팔은 환자복을 입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림프부종이다. 암세포가 겨드랑까지 전이된 탓일 것이다. 뚱뚱하게 부어오른 오른팔과 달리, 런닝 아래로 드러난 갈비뼈가 앙상하다.

나는 여전히 교수님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예, 교수님.” 하고는 붕대를 감았다. 모양을 신경 쓰다 너무 세게 감은 것 같아 풀고 다시 감았다. 붕대도 제대로 못 감느냐고 타박하실까 봐 슬쩍 눈치를 살폈지만, 교수님은 아무 말 없이 방 저편만 바라보고 계셨다. 끝나고 수고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병원을 나와 응급실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물었다. 평생 병원에서 살며 환자를 돌봤던 사람이 결국 병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다른 이들의 대장암을 수술하며 살아온 분이, 결국 자신도 대장암으로 생을 마친다는 것이 운명의 장난 같았다.

노발대발한 선배가 “내일 수술 준비 안 하고 어디 짱박혀 있냐”라고 전화할 때까지, 나는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며 담배만 태웠다.

그 뒤로 교수님은 나를 다시 부르지 않으셨다. 하지만 두 번 더 찾아가 붕대를 감아드렸다. 네 번째 방문 때는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가 없었다. 부었던 오른팔이 눈에 띄게 날씬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한 선배가 문병을 와서 밤새 마사지로 부종을 풀어주고 갔다고 했다.

놀랐다. 그렇게 단단한 림프부종이 마사지로 풀릴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밤새 그 일을 한 선배의 정성도 대단했기에. 교수님은 그런 제자를 두고 조금이나마 위안과 보람을 느끼지 않으셨을까?

내가 교수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외과 과장님이 회진을 마친 후 전공의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였다.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계셨던 전과는 달리, 더 핼쑥해진 채 침대 등받이에 기대고 계셨다. 교수님은 전공의들에게 손짓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이리 와서 배꼽 주변을 만져보게. 시스터 메리 조셉 결절이 생겼어."

시스터 메리 조셉 결절은 복막전이의 증상 중 하나로, 진행된 암에서 나타난다. 교수님은 자기 몸에 생긴 그 결절을, 마지막 가르침처럼 보여주고 계셨다. 나는 감히 가까이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을 안타깝게 여기고 위안을 얻길 바란다는 내 생각은, 인간적인 감정으로 교수님을 섣불리 평가하려던 어쭙잖은 내 깜냥에 불과했다. 저건 환자를 넘어선,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였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악화한 상태를 여느 환자를 설명하듯 담담하게 말하며, 만져보라고 권하는 그 오연한 자세. 나는 그것을 결코 이해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을 것이다.

인사를 마치고 일행을 떠나는 뒤에서, 나는 목례를 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으며 마지막 교수님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교수님이 돌아가신 지 15년이 지났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유능한 외과의사가 되겠다는 뜻을 품었지만, 그동안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대학병원에서 큰 수술을 집도하겠다는 목표는 오래전에 내려놓았고, 지금은 작은 의원에서 외과의사라는 직함이 무색하게 국소마취 하에 간단한 수술만 하고 있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적당히 포기하고 타협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진료를 하면서 원칙을 굽히려 할 때마다, 나는 눈썹을 치켜뜨며 노려보는 교수님의 시선을 느낀다. 내 가슴을 쿡 찌르던 그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지막까지 환자이기보다, 교수로서 죽음을 맞이한 원칙주의자이자 고집쟁이였던 교수님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 또한, 좀 더 고집을 부릴 수 있으리라.

수상소감 서장혁 서피부과연세비뇨기관의원 원장
서장혁 서피부과연세비뇨기과의원
서장혁 서피부과연세비뇨기과의원 원장.

저의 외과 전공의 시절은, 기억하기도 싫은 고난의 시기인 동시에 가슴 따뜻한 추억이 서린 시기이기도 합니다.

지금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살인적인 로딩 속에서, 사람이 극한에 몰려 그 본성이 드러나고 폭언이나 폭행이 드물지 않던 때였습니다. 다행히 우리 외과 의국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서로 얼마나 힘든지 잘 알기에, 굳이 피곤하게 서로에게 더 큰 짐을 얹을 필요가 없었던 거겠지요.

하지만 “네 주변에 진상이 없다면 네가 바로 진상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창피하지만 제가 망나니처럼 간호사실을 여러 번 뒤집어엎기도 하고, 화난다고 수납장을 걷어차다가 발가락 다쳐서 절뚝거리며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외과 선배들과 교수님들은 힘들어하는 저를 잘 보듬어서 어떻게든 좋은 외과의사로 만들어주고자 하셨습니다.

아! 이렇게 글을 적다 보니, 전공의 시절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동기 형이 늦잠 자다 본의 아니게 무단이탈하던 날, 의국 출신 교수님께서 “너희도 도망가라. 그래야 병원장이 우리가 전문간호사를 여러 명 뽑는 걸 승인해 주지 않겠니. “하시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도망을 부추기셨던 기억.

3년째 전공의가 들어오지 않자, 과장님이 수석 졸업생을 어떻게든 외과로 꼬시겠다며 생일파티도 해주시는 등 열을 올리셨지만, 결국 수석 졸업생을 꼬드긴 건 “외과하지 말라”고 뒤통수를 친 4년 차 전공의였고, 꼬신 결과는… 결혼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잊지 못할 분은 돌아가신 P 교수님이십니다.

우리 외과 의국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던 교수님은 동문회 술자리에서도 단골 주제였지요. 한쪽에서는 “외과해서 먹고 살기 힘들다”라며 신세 한탄을, 다른 쪽에서는 “P 교수님에게 당했던 일화”를 꺼내며 웃음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십여 년간 가슴에 묵혔던 기억을 이번 기회에 글로 옮겨보니 밀린 숙제를 끝낸 것처럼 후련합니다. 불혹의 나이에 글쓰기에 취미를 붙여 보자고 결심한 게 엊그제인데, 덜컥 상까지 받게 된 건 교수님의 일화가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은 제가 받은 게 아니라, P 교수님께서 타신 겁니다.

“글을 잘 쓰려면 자기 키 만큼 원고지를 쌓아야 한다”라고 하던데, 저는 발등 높이만큼도 못 쌓은 애송이입니다. 이번 상을 과분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고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원고지 24매 분량을 20매로 줄이는데 같이 고민해 준 왕년의 수석 졸업생인 제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런 좋은 기회를 주신 청년의사와 한미약품에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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